블랑쇼

침묵과 글쓰기

aurorepark 2015. 5. 28. 22:40

"그렇다, 글쓰기에는 침묵이 필요하다. 왜? 비트켄슈타인에 반해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비트켄슈타인에 반해서), 나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글쓰기는 자신의 원천과 필연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작가는 가능한한 자기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자기는, 비록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살아남아서는 안된다. 원리상, 누구도 자기를 모르며 그 자신도 자기를 모른다. 


거의 65년 간 나는 유일하게 말을 놓는 친구인 엠마뉘엘 레비나스와 관계를 가졌다.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과분한 축복. "

(Blanchot, "Oui, le silence est nécessaire à l'écriture"(1990) in Ecrits politiques, p. 247 )


ㅡ 침묵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 이중의 과제, "더 이상 우리에게 표현할 말이 없는 거기에서"(후설), 침묵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길이 없는 비-존재의 길은 가지 않는 것이 좋다"(파르메니드), 왜냐하면 죽음의 경험이 문제인 경우, "죽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기"(Platon) 때문이며, "누구도 이 증인을 증언하지 않기"(Celan) 때문이다("Le dernier à parler" in Une voix venue d'ailleurs, p. 71)). 그런데 그 '경험'을 너머 가는 걸음/불가능 pas au-delà(step/not beyond)=글쓰기, 재난의 글쓰기는 그치지 않는다.



낮으로 이어지는 밤, 그 밤이 아닌 밤으로, 빛으로, 어떤 말로도 인도되지 않는 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밝힐 수 있는가? 하양 위에 검정이 아니라, 하양 위에 하양, 혹은 검정 위에 검정을 그리는 것, 불가능의 현상학 : "가능한 것은 명명하고, 불가능한 것에는 대답하면서(우리 안에 모든 본질적인 말의 비밀스런 나눔)". 예를 들어 우리는 시와 "가능성, 이해, 계시가 아닌 관계, 어둠과 알려지지 않은 것과 관계한다". 그런데 "시는 불가능을 말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답하면서만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거기에 존재한다.

(L'entretien infini,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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