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모두 말해졌을 때, 글쓰기는 단편적인 것에 속한다."(저 너머로의 발걸음, Le pas au-delà, PAD, 62)
이 진술은 블랑쇼의 글쓰기의 한 전제에 속한다. 블랑쇼가 '단편le fragment'과 구분해서 '단편적인 것le fragmentaire'이라고 쓰는 것은 조각난, 파편의, 불완전한 어떤 것을 말한다. 단편이 하나의 글쓰기의 스타일로서 짧고 축약적인 단상, 혹은 금언과 같은 '단장斷章'을 의미할 수 있다면, '단편적인 것'은 그것이 길던 짧던 '완성'으로서 작품의 개념을 처음부터 지운다.
그런데 쓰기 전에 모든 것이 이미 다 말해졌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우선 글쓰기의 행위를 '반복'으로 만드는 것, '말하기'를 '다시 말하기'로, 모든 글쓰기를 해석으로, 모든 글쓰기를 표절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창작자로서 작가의 무로부터 창조의 개념을 지우면서 글쓰기에서 순수한 창조의 개념을 처음부터 지운다.
이 진술이 가져오는 것들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다는 것은 예술가가 꿈꾸는 유사 신의 개념을 지운다. 그리고 "처음에 말이 있었다"라는 진술이 함축하는 시간의 연속성, 역사, 질서, 로고스, 전체성의 개념을 지운다. 글쓰기가 이미 말해진 것의 반복이라면, 시간, 역사의 반복은 동일한 것의 회귀와 만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이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바닥에 깔린 허무주의의 상처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블랑쇼의 선택,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용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수동성,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재시도로서 시작, 고유성으로서 탈소유, 차이로서 반복과 같은 타당성의 논리를 가지고 글쓰기를 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처음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이 반복과 회귀로서의 쓰기의 개념으로부터, 쓰는 행위의 가해지는 글쓰기의 요구가 출현한다.
"Tout doit d'effacer, tout s'effacera. C'est en accord avec l'exigence infini de l'effacement qu'écrire a lieu et a son lieu." (PAD, 76)
"모든 것은 지워져야 하고, 모든 것은 지워질 것이다. 글쓰기가 일어나고, 자신의 장소를 가지는 것은 지움의 무한한 요구와의 일치 안에서다."(저 너머로의 걸음)
쓰는 행위가 지움을 위해서라는, 쓰는 행위는 지우는 행위라는 이 진술, 모든 쓰기와 읽기의 행위가 지움에 있다는 것, 블랑쇼가, 당신이, 네가, 그가, 그들이, 내가 쓰는 것은 지워지기 위해 쓴다면, 왜 말을 하고, 왜 쓰는가? 그 말해진 말, 써진 말, 기억, 역사의 기록, 증언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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