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재난의 글쓰기(18)

aurorepark 2013. 12. 16. 07:21

◆ Le non-concernant (en ce sens que l'un[moi] et l'autre ne peuvent tenir ensemble, ni se rassembler dans un même temps : être contemporains), c'est d'abord autrui pour moi, puis moi comme autre que moi, cela qui en moi ne coïncide pas avec moi, mon éternelle absence, ce que nul conscience ne peut ressaisir, qui n'a ni effet ni efficace et qui est le temps passif, le mourir qui m'est, quoique sans partage, commun avec tous.(42)


◆ (하나(나)가 다른 하나와 같은 시간에 함께 있을 수도, 모일 수도 없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동시대적일 수 없는 의미에서) 무-관한 자, 그것은 우선 나에 대한 타인이며, 이어서 나의 타자로서의 나, 이것은 내 안에서 나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영원한 부재, 어떤 의식도 다시 잡을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결과, 어떤 효력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그런 것은 수동적 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나눔도 없이, 내가 모든 이들과 공유하는 죽어감이다.


다시 읽으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의미에서 동시대적일 수 없는 나와 무관한 것, 그것은 우선 타인일 것이고, 그것은 내 안의 나의 타자일 것이다. 이것은 내 안에서 나와 일치하지 않는 것, 영원한 부재로 어떤 의식도 다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가능성으로서 어떤 효력을 밝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수동적인 시간,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이들과 공통으로 가지는 것이면서도 어떤 나눔도 없는 죽음, 죽어감이다.


◆ Autrui, je ne puis l'accueillir, fût-ce par une acceptation infini. Tel est le trait nouveau et difficile de l'intrigue. Autrui, comme prochain, est le rapport que je ne puis soutenir et dont l'approche est la mort même, le voisinage mortel (qui voit Dieu meurt : c'est que "mourir" est une manière de voir l'invisible, une manière de dire l'indicible - l'indiscernable où Dieu, devenu en quelque sorte et nécessairement dieu sans vérité, se rendrait à la passivité).  


◆ 타인, 나는 그를 환대할 수 없다. 무한의 감수에 의해서만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무한의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의 새롭고 어려운 요소이다. 이웃으로서 타인은 내가 지탱할 수 없는 관계이며, 타인의 접근은 죽음 그 자체, 필멸의 이웃(그는 신의 죽음을 본다. 왜냐하면 죽어감은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한 방식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인지할 수 없는 것, 거기서 일종에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리 없는 신이 된, 신은 수동성에 이른다)의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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