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타인이 적이 아니라면 (가끔 헤겔에서 그런 것처럼 - 타인은 호의적인bienveillant 적이다 - 특히 사르트르의 초기의 글들에서처럼) 어떻게 타인은 나에게서 나의 동일성을 떼어낼 수 있으며, 그의 지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 이웃의 지위 - 그의 억압이 나를 상처내고, 나를 피곤하게 하고 나를 괴롭히면서 나를 쫓으며, 자아 없는 자아인 나는 이 괴로움과 나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무기력에 책임을 지게되는가, 인종의 극단인 책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 내가 대답 없이 존재할 때에도, 내가 나 없는 존재할 때 조차도, 다만 빌린, 가상의, 혹은 동일자의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는 자아일 때조차도, 다만 규범적으로 유지되는 자리. 책임은 죄가 없는 죄의식. 매일 맞아도 아픈 매. 창조의 혹은 탄생의 트로마티즘. 만일 피조물이 "자신의 자리를 타자의 호의faveur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면¨[나의 자리가 타자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책임의 존재로 태어나고 나의 탄생에 앞서서 책임을 가진자로 태어난다. 마치 책임이 나의 동의, 나의 자유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미리 정해진 어떤 호의faveur에 의해, 모든 이들의 불행인 타인의 불행에서 태어난 것처럼. 레비나스는, 타인은 성가신encombrant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시 사르트르적인 전망이 아닌가? 우리에게 구역질을 유발하는, 존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과잉으로 인한. 내가 덜어내고 싶은 잉여. 그런데 내가 무관심할 수 없는, 왜냐하면 무관심에서조차, 나는 타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자로, 다만 그의 자리를 유지하는 자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faveur, 레비나스가 종종 élu 선택된, 이라고 쓰기도 하는 것.
◆ 여기에 하나의, 가능한, 대답이 있다. 만일 타인이 나에게서 나를 벗겨내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나를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타인도 절대적인 벌거벗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원은 극심한 고통에 이를 때까지 내 안의 나를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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