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tretien de l'infini <무한과의 대담>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블랑쇼의 질문과 대답이라면, <재난의 글쓰기>는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에 대한 블랑쇼의 질문과 대답이다.
◆ La faiblesse, c'est le pleurement sans larme, le murmure de la voix plaintive ou bruissement de ce qui parle sans parole, l'épuisement, le tarissement de l'apparence. La faiblesse se dérobe à toute violence qui ne peut rien (serait-elle la souveraineté oppressive) sur la passivité du mourir.
허약함, 그것은 눈물 없는 흐느낌, 애끓는 목소리의 중얼거림 혹은 말 없이 말하는 자의 부스럭거림, 나타남의 고갈, 마름. 허약함은 죽음의 수동성에 대해 아무 것도 할수 없는 모든 폭력(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억압적인 주체의 지상권일 것이다)을 회피한다.
- 허약함은 레비나스에서 주체의 유한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인식의 유한성도, 죽음의 존재로서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유한성도 아닌, 유한한, 분리된 향유의 주체가 떠 맡는 파악할 수 없는 무한으로의 열림 안에서 드러나는 그런 허약함.
◆ 우리는 말의 상실에 대해서 말한다 - 곧 닥칠 그리고 기억불가능한 재난 -,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종의 예언에 의해,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기가 말에서 - 말하기dire에서, 반박dédire에서 - 정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그것을 반박한다는 것을 예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무엇인가 말해지고 아무 것도 말해지지 않는 것이 예감되도록 내버려 두면서: 말의 상실, 눈물 없는 울음. 항복은, 그것을 완성함이 없이, 죽음의 보이지 않는 수동성 - 인간의 허약함 la faiblesse humaine을 알려온다.
- l'invisible passivité du mourir, 죽음에 이를 수 없는, 끝없이 다가오지만, 끝날 것이라고 예고하지만, 그것에 이르지 않는, agonie interminable.
◆ 그치지 않는 것의 단절, 이것은 조각난 글쓰기의 고유한 것이다: 단절은 그치지 않는 그것과 같은 종류의 의미를 가진다, 둘다 모두 수동성의 효과이다; 여기서는 어떤 가능성도, 어떤 창발도, 어떤 의도도, 어떤 결정도 지배적이지 않다, 죽는 것은 사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회피하는 삶의 수동성, 어떤 현재도 없는 시간과 혼동되는, 잠정적으로 견디는 재난, 어떤 불행을 기다리면서, 도래하지 않는, 그런데 항상 이미 와 있는, 그런데 자신을 현시할 수 없는: 이런 의미에서, 미래, 과거는 모두 무차별적인 것으로 떨어진다. 둘다 현재가 없기에. 이 때 파괴된 인간들(파괴 없는 파괴)은 나타남 없이, 우리가 그것을 볼 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존재한다, 만일 그들이 말을 한다면, 타자들의 목소리에 의해서이다, 일종의 고발인 타자의 목소리, 그들을 고발하는, 그들이 의식함이 없이 짊어지는 침묵의 불행에 대답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 L'interruption de l'incessant, 헐떡임, 그칠 수 없는, 조각난 말.
◆ 그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 도래하기를!, 이 소망은 내가 제외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 "Puisse le bonheur venir pour tous, à condition que, par ce souhait, j'en soit exc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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