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dans le rappoet moi à Autrui, 타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 분리된 것, 지-고le Très-Haut, 나의 가능성을 회피하는 것, 따라서 가능성 없이 존재하는 것,sans-pouvoir 이방인, 박탈된 자le démuni이다. 그런데 타인의 나에 대한 관계 에서 dans le rapport d'Autrui à moi, 모든 것이 뒤집히는 듯이 보인다 : 먼자는 가까이 있는 자가 되고, 이 접근은 나를 짓누르는 강박이되며, 나를 나에서 분리한다. 마치 분리(나의 타인에 대한 초월성을 측정하는 것)가 내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나를 탈동일화하고, 나를 수동성에 내버린다, 어떤 의도도 어떤 현재도 없이. 이 때 타인은 절박한 자, 탁월한 자, 박해자가 된어, 나를 짖누르고, 나를 방해하고, 나를 부수고, 그의 범죄에 대답하도록 강요하는, 나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측정할 수 없는 sans mesure- 내가 그를 "대신substitution"하는 수준에까지 가기에 - 책임을 내 위에 실는 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타인의 나에 대한 관계는 - 그것이 정상과 비정상이 그 의미를 가지는 세계 - 존재 밖으로 나를 던진다면 - 사도-마조의 관계처럼 나타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동일자le Même가 타자l'Autre를 대신 하듯이, 타자l'autre가 동일자le Même를 대신한다. 초월성(하향초월의 초월성)의 특징들 - 이 최상의 모순을 이끄는 것, 이 최상의 의미의 역설로 이끄는 것 - 이 그려지는 것은 이제부터 내 안에서 - 나 없는 나 안에서 un moi sans moi - 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수동성은 나를 무위로 만들고 désoeuvre, 파괴하면서, 동시에 나를 추월할 뿐만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실행할 수 없는 -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나는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기에 - 책임을 나에게 강요한다. 이런 책임의 수동성은 말하기Dire일 것이다. 모든 말해진 것에 앞선, 존재 밖에서, 말하기는 대답을 주고, 불가능한 것에, 불가능에 대해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역설은 애매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나 없는 나, 내가, 타인이 나를 근본적인 소외에 이를 때까지 나를 짖누를 때, 이 가장 수동적인 수동성의 시련에(그것을 겪음이 없이) 속한다면, 여전히 내가 관계하는 것은 타인인가? 아니 차라리 지배적인 "나" "Je", 이기적인 절대, 박해하는 지배자가 아닌가? 다시 말해, 박해는 가장 긴 인내에 나를 연다. 박해는 내 안에 익명의 정념이며, 나는 나의 동의와 상관없이 대답하고 짊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부, 저항, 투쟁에 의해 그것에 대답해야 한다. 지식으로, 지식의 자아로, 타인이 아니라 적인 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나, 이기적인 전능, 죽음을 부르는 의지. 당연히 이것에 의해 의지는 나를 그 놀이 안으로 이끌고, 그것은 나를 그의 공모자로 만들고, 따라서 항상 두 언어, 두 요구가 있다. 하나는 변증적인 것이고 다른 것은 비변증적인 것이다. 하나는 부정성의 일이고 다른 것은 존재와 비존재와 구분되는 중성적인 것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말하는 주체가 존재해야 하는 동시에 죽음이 가로지르는,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인내-수동으로서 사라지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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