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로고진스키, 애무에서 상처로: 레비나스의 과장(6)

aurorepark 2013. 5. 10. 16:49

이러한 질문, 매 현상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것을 보여주는" 이러한 과장에 대한 로고진스키의 질문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그의 표현대로 "맹목적으로", 고집스럽게 내 안의 타자의 요구가 타인에 대한 책임의 요구인 한에서 이 둘의 동일화를 주장한다. 그런데 로고진스키에서 이러한 동일화는 여전히 그렇게 명백하지 않아보인다. 사실, 나를 사로잡고, 나를 박해하고, 나를 촉발하는 전-기원적인,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의식하기 전에 이미 내 안에 있는 이 타자를 어떻게 알아차리고. 그 타자가 타인이라고, 그가 누구인지 규정하지도 않고 그 타자가 타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 타자의 증여의 양태를 존중한다면, 우리는 그 타자를 X로, 익명적인 타자성으로 지시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적일 뿐 아니라(타자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면서 타자의 중성성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현상학적인(현상을 외곡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는 의미에서) 명령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축자적으로 파악된 현상학적 테제, "자기 안에 최초의 이방인(최초의 자아가 아닌 자non-moi), 그것은 타자l'autre moi이다"("Das an sich erste Fremde (das erste « Nicht-Ich") is das andere Ich » – Husserl, Méditations cartésiennes §49, Vrin, p. 90)라는 후설의 테제와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이런 방식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레비나스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후설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다. 비록 그가 축자적으로, 쓰여진 후설과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타인이 타아로 동일하기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라고, 후설이 말하지 않은 것에서 더 후설다운 후설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최초의 이방의 근본적인 타자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후설에게 절대적으로 충실하다. 우리는 레비나스가 후설의 이 테제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다는 것을 그의 저작들은 우리에게 증언한다. 그런데 이 나 아닌 최초의 이방인, 타인은 후설의 철학적 전개 안에서 유일한 가능한 유일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후설이 이 최초의 이방인이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후설은 여기에 여러 대답을 준다. 그 중의 하나는 "원-질료Ur-hylé"이다. 그것은 "자아 안의 씨Ichfremdekern"처럼, "내 안에 이방인"처럼 본래적으로 자아가 그 안에서 촉발되는 감각재료이다. "내 안의 타자"는 결국 레비나스 혹은 데리다의 발견이 아니다. 그런데 보다 자세히 보면, 후설에서 타인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이 이방인은 나의 타자성, 나 자신의 타자성이다. 이러한 타자성은 리쾨르의 soi-même comme autre에서 처럼, 혹은 헤겔의 자기의 타자성과 더 가깝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질료적 토대와 분리되지(in eins mit und ungetrennt) 않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운동감각ㅡces Empfindnisse, ces « sentances », 뜨거움, 차가움, 단단함 등등ㅡ은 모든 지향성 이전에, 나를 촉발한다. 이 모든 감각은 나의 내적 삶에 속하며, 나와 분리되지 않고 나와 함께한다. 나와 다른 것autre que moi으로 드러난다면, 내 안에 나와 다른 이방성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나와 함께한다.


이것은 아주 오랜 철학적 문제로 전통적으로 동일자와 타자. 나와 타인,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것은 후설이 제기한, 그에 이어서 레비나스가 제가한 전례없는 질문이다. 만일 이 타자=X가 나이면서 이방인이라면, 이 이중성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이방성, 나에게 절대적으로 낯설지 않은 이 이방성은 어떤 분리clivage, 나의 파열을 가져오는가? 이 이방인을 나로, 나의 어두운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와 혼동하지 않으면서 그와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내재적인 타자성과 타인의 초월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내가 타인을 만날 때, 내 밖의 이 타자에 대해서 내 안의 타자의 타자성을 던지지 않는가? 다시 말해 그에게서 발견하는 일련의 특징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들과 동일화하지 않는가? 결국 타인은 내 안의 이방인으로, 나의 더불, 나의 마스크가 아닌가? 이러한 결론이 윤리적인 기획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일단 두 종류의 타자, 두 종류의 타자성을 구분해야 한다. 즉 타인의 얼굴의 타자성과 내 안의 타자의 타자성을 구분해야 한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타자의 이름에서, 타자의 유일신론을 포기하는 "애매한 유일성l’équivoque unicité"을 봐야하지 않는가?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후설의 최초의 테제, 본래적인 이방성을 가진 타인의 테제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이 충실은 로고진스키가 지적하듯이 최초의 테제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 가치와 의미를 증가시켜가는 가치상승의 방식이다. 우선 타인을 전적인 타자tout-Autre로, 이어서 "동일자 안의 타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매번 이 과정에서 레비나스가 거부하는 것은 타인의 타자성보다 더 근본적인 혹은 그와 다른 또 다른 타자성autre altérité, 타자의 타자성보다 앞선 타자성이다. 나의 레비나스 독서에서 그를 계속 읽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이 거부이다. 그에게 타인보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종종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신과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것은 레비나스 읽기에서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이다. 그를 신학적으로 읽고자 하는 사람들, 유혹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레비나스를 잘못 읽는 것은 없다. 물론 레비나스에서 "타인과 다른 타자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명확히 하듯이 이런 다른 타자autrement Autre는 "모든 이웃과 다르며, 부재에 이를 지경에까지 초월하며. 일 이 아의 중얼거림과 혼동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다시 말해 존재의 비인격적인 무의미에 이른다."(DQVI, 115)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최초의-타자성archi-altérité는 그가 말하는 "내 안의 최초의 이방인"의 타자성도, 후설이 말하는 최초의-질료Ur-hyllé의 타자성도 아닌다. 그것은 "신"이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것과 레비나스가 말하는 "동일자 안의 타자"와 동일화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동일화할 경우, 우리는 고전적인 신의 테제로, 나보다 나 자신에게 더 내밀한 신이라는 테제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레비나스 읽기에서 가장 길을 읽기 쉬운 한 읽기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동일자 안의 타자는 타인과 동일화하기 때문이며, 윤리적인 타자성과 신적인 타자성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장'은 "얼굴의 윤리적 Illéité"를 "시나이의 빛la gloir de Sinaï"에, "존재 너머의 진술"을 "신의 이름"과 접근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Autre"라는 유일한 이름 아래 세 개의 다른 규정들이 서로 혼동된다. 이 규정들 사이의 차이는 그 강도가 증가함에 따라서, 그 정도를 과장함에 따라서 점점더 흐려지고 서로가 서로를 덮으면서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바로 이 타자의 다른 영역들 간의 혼동이 레비나스의 후기의 윤리, 두 번째 윤리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주입된 타자, 그로부터 나를 사로잡는 강박으로서의 타자의 타자성=X와 전적으로 다른 타자tout-Autre로서, 나와 근본적으로 분리된 무한으로서의 외재성으로서 타인이 겹친다. 이러한 타자의 이중적 조건, 함께 할 수 없는 두 성질이 동시에 글정된다. 마치 전적으로 다른 타자의 타자성이 그 자체로 내 안에, 나의 심장처럼 들어와서 나를 파열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이제 자기임être-soi은 자기의 균열fissure du soi, 자기의 탈취arrachement à soi로서, "자신의 피부를 벗기는 신체", "혈우병 환자의 출혈"로서 기술된다. 이러한 기술은 다만 과장된 표현도, 단순한 은유도 아니다. 이것은 윤리적 과장에 살chair의 기입을 지시한다. 신체는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자기성의 수축contraction이다. "살을 가진 자아moi incarné"(AE, 127)의 규정은 다시 한 번 레비나스의 후설에 대한, 그의 "Ichleib"에 대한 충실을 보여준다. 


ㅡ레비나스의 소위 '피부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타자들의 혼동에서 유래한다. 절대적인 외재성으로서의 타인과 내 안에 나를 파열시키는 타자성이 만나는 지점은 밖과 안의 경계인 '피부', 살가죽에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