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로고진스키, 애무에서 상처로: 레비나스의 과장(4)

aurorepark 2013. 5. 8. 22:24

같은 어려움은 로고진스키가 설명하듯이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에도 발견된다. 첫 번째 윤리(전체성과 무한에서 드러나는 윤리)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는 무한한 거리로 고려되었다면, 두 번째 윤리(존재와 다르게에서 드러나는 윤리)에서 타자는 아주 가까이서 나를 짖누르는 근접성proximité으로 나타난다(l'Autre dans la proximité; l'autre dans l'intimité, 라캉이 말하듯 'extime', extimité="내밀성 안에 존재하는 외재성"처럼). 그런데 이러한 나눔은 환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전체성과 무한>의 "유한 안의 무한", "실재와 그림자"에서 말하는 "내밀한 외재성", 타자의 의한 동일자의 넘침débordement, 마치 듀피의 타블로에서 윤곽을 넘어가는 색의 넘침을 떠 올릴 때,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는 즉각적인 근접성 안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설의 "내재성 안의 초월성"의 한 변형인 "유한 안에 무-한"의 과장을 읽을 수 있다. 타자는 동일자로부터 그 안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내 안에, 내 생생한 살 안에 기입된 타자의 흔적으로 타자는 무한히 내 안에서 나를 넘어선다. <존재와 다르게>의 분석들은 어떤 의미에서 <전체성과 무한> 안에서 이미 진술된 이러한 주장들을 다만 더 명시적으로 드러낼 뿐일 수도 있다. 앞선 진술들의 함축적 결과들을 끌어내면서 말이다. 또한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폭력과 형이상학")ㅡ전적인 타자는 동일자의 언어 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는 비판ㅡ에 대답하면서 말이다. 이 경우 둘 사이에 여전히 일종의 연속성이 그 지배를 획득하는 듯이 보인다. 다만 "동일자 안에 타자"ㅡ내재성 안에 초월성ㅡ의 "안"이 <존재와 다르게> 안에서 전적으로 전복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그런데 앞서 제기한 자아, 나의 "분노gonflement", 타자로 향한 "화의 분출épanchement"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 운동은 전적으로 뒤집힌다. 이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자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침투해 들어오는, 더 이상, 환대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적으로 주입된injecté 전-기원적인 타자가 문제이다. 전-기원적인pré-originaire, 전-원리적인an-archie, 통시적인dis-chronie 다시 말해 이미, 항상 나를 관통하는, 내가 나이기 이전에, 나에게 떨어진, 정해진, 강요된assigné, imposé 그런 타자가 문제이다. 여기에서 "안"은 같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단절을 표시한다고 로고진스키는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자아가 "자신의 비밀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듯이 "사회의 다원성은 이 비밀로부터만 가능"(TI, 244)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와 다르게>에서 강조는 타자에 대한 "자제없는 노출"을. "자기의 비밀 안에 숨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AE, 226) 타자에의 노출exposition을 주장한다.


ㅡ그런데 타자에의 노출, 자제없는, 남김없는sans retenu 노출은 사실 레비나스가 설명하듯이 그의 과장의 논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하나의 이념에서 다른 이념으로,  그런데 다른 하나가 전자에 의존하지 않고, 전자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것이 연역이든 귀납이든, 어떤 논리로도 환원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과장의 논리가 아닌가?("question et réponse" in DQVI, p. 142) 전혀 새로운 것, 로고진스키의 말로하면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의 단절이 일어난다.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자기의 운동의 한 공식: 정립se poser - 노출s'exposer - 탈정립se déposer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연역적인 논리도 아니고 귀납적인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도약이, 그가 단절, 혹은 승화라고 부르는, 최상급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