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로고진스키, 애무에서 상처로: 레비나스의 과장(5)

aurorepark 2013. 5. 9. 14:22

자아 안에 타자의 주입injection이 나를  전적으로 관통하고 도망칠 여유도 없이 나를 내집에서 내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전적으로 관통하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가장 깊은 곳까지 관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타자에 의한 나의 구멍뚤림perforation으로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타자의 타자성이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도입되었을 때, 타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존재와 다르게>는 이 구멍뚤림이 자아에 가하는 효과, 트로마즘, 자기의 균열fission, 자기의 비틀림에 대한 분석에 바쳐진다. 그런데 그 분석은 타자에 가해지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석은 처음부터 타자를 동일자에서 타자의 열림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일자 안의 타자의 얽힘"(AE, 48)으로서 정의하기 때문이다. 마치 타자는 나와의 차이에서 전혀 변질되지 않는 것처럼, 나와의 모든 접촉, 모든 전염에서도 자신을 그대로 보존하며, 절대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는 것처럼 이 시련을 겪을 수 있는 듯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타자에 의해 산산이 찢겨진 나의 상처ouverture에, 자기에서 살 가죽을 벗겨냄에, 타자는 나의 이 고통에, 나의 이 비참에 대해서 부동하고, 무관심한 수수께끼 같은 울타리로 대답한다. 더더욱 내 안으로 파고 들어와서 나의 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부식시키고 갉아먹은 것이 이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세계의 어둠, 우울은 존재의 빛에 이르지 않는다."("L’expérience de la pensée", Questions t. III, Gallimard, 1966, p. 21.) 하이데거가 이 용어들 안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듯이 신성sacré, heilig, 다시 말해 항상 모든 재난으로부터, 그것이 인간에 끼치는 재난과 손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자신은 면제된(구원된)sauf 존재, 항상 손상되지 않는indemne 존재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비나스가 "신성sacré에서 성saint"으로의 전향에도 불구하고 변질되지 않는 것l'inaltérable이 지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일단의 한계를 넘어서 희브리어 kadosh(분리)를 함축하는 분리가 Heile의 구원과 혼동되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이러한 혼돈을, 존재와 타자, 존재론과 윤리, 또 아테네와 예루살렘, 서양의 두 종교 사이의 혼동으로, 조이스 방식으로 말해서 유대적 그리스는 그리스적 유대Greekjew is Jewgreek라는 두 극단의 만남으로 이해하는 것에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 이러한 믿음, 이러한 내기(타자의 변질되지 않음)는 레비나스 윤리의 "비대칭적 원리"로부터 정당화된다. 모든 위험과 모든 공격에 대해서 나를 희생해 가면서도 "모성적으로" 타자를 보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내 안에 타자가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면서, 내가 타자 안에 들어가는 것, 내가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 다시 말해 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를 개념 안에 집어넣는 것을 금지하는 이 윤리의 비대칭성은 타자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내 안의 타자의 주입의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리의 로고진스키의 오랜 질문이 자리한다.


"타자는 동일자에 의해서 변질됨이 없이, 동일자의 타자, 즉 동일자에 의해 변형된 타자가 됨이 없이 동일자 안에 연루될 수 있는가? 이러한 타자의 주입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것은, 타자를 환대하기 위해, 그의 현시에 내가 대답을 하건 안 하건 타자를 환대할 최상의 가능성을 남겨두면서, 나를 무화하는 데까지, 나 자신을 전적으로 지우는 데까지, 나의 신체, 나의 지속, 나의 자기성을 전적으로 지울 위험이 있지 않은가? "동일자 안에 타자", 이 "안"은 타자의 내 안의 주입의 양태, 결과만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오랜 과거로부터 내 안에 들어온 것이라면, 이 수수께끼같은 타자성은 나를 파열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나와 무한히 떨어진 절대적인 타자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는가? 이 타자는, 내 안에 이 타자는 여전히 타인인가?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지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타자는 타인의 얼굴의 현현과, 내 앞이 정면으로 항상 다가오는 정직한 타인의 얼굴과 엄격히 구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 이전에, 나의 기억 이전에 나를 사로잡는 익명적인 이 타자성은 타인의 얼굴과 구분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서 얼굴은 형태를 가진 가시적인 모습figure이 아니다. 얼굴은 이미 정해진 선험적인 어떤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얼굴은 매번 단독적으로, 고유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것은 온 몸으로일 수도, 그의 축처진 어깨일 수도, 그의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일 수도, 그의 먹을 것을 구하는 내민 손일 수도 있는 단독의 사건으로서 주어진다. 이러한 얼굴의 사건은 얼굴이 불러내는 "방해dérangement"에 의해서만, 나의 마음의 고요를 깨는 불-안in-quiètude에 의해서만 측정된다면, 또 그것이 나의 나르시스적 자기-촉발을 중단시키는 데 있다면, 타자의 내 안의 침투, 트로마티즘은 <전체성과 무한>에서 분석된 타인과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탁월한, 과장된 그 "얼굴"이 아닌가? 그런데 대면에 의한 타자의 접근이 두 번째 윤리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탁월한 공식인 얼굴 이상le plus-que-visage, 얼굴의 현시 없는 계시,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최초의-얼굴archi-visage를 위해서가 아닌가?


예전 철학의 현자의 '고요'를 깨는 이 불-안, 이 시끄러움, 이 방해, 트로마티즘은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타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