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옥'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일련의 과장적 절차에 의해 과도하게 규정됨이 없이 어떻게 살의 접촉을 생각할 수 있는가? 애무도 상처도 아닌 다만 단순한 접촉으로서, 한 살이 다른 살을 만지는 것으로서 접촉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떤 경험을 통해서, 이 현상은 본래적으로 주어지는가? 후설이 믿듯이, 만지는 주체로서의 살은 이 행위 안에서 만져진 살을 자신의 고유한 살로서 인정한다. 이것은 메를로-퐁티가 '키아즘'으로, 혹은 '서로 얽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념들 II>에서 혹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기술된 것들, 가장 본래적인 살적 접촉의 이 현상은 나의 살이 자기를 만지는 것에 대한 자기의 경험épreuve이다. 이런 고전적인 분석은 레비나스는 처음부터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석은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에 대한 자기-촉발auto-affection의 우선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거부는 자기 통각보다 더 넓은 어떤 얽힘 안에서 육화가 작동한다는 것을, "나의 신체에 연루되기 이전에 다른 신체와 연루된다"(AE; 123)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접촉의 변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낯선 살의 타자성의 의한 자기와의 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은 마치 만짐이 스스로 멀어지듯이, 항상 이미 다른 것인듯이, 나와 어떤 공통된 것도 가지지 않은 듯이 분리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접촉에는 이미 애무가 잠재하고 있으며, 모든 애무 안에는 상처가 이미 잠자고 있다. 레비나스가 접촉le toucher을 타자의 살에서 나를 찢는 노출로 정의할 때, 그는 모든 종류의 자기-촉발적 접촉을 거부한다. 여기서도 레비나스는 후설위 테제, 그것의 궁극적인 함축 안에서, 최초의 이방인으로서의 타인이라는 후설의 테제에 충실하다.
이 지점에서 로고진스키가 질문하는 것은 바로 이 후설의 테제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이 테제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키아즘의 경험에서, 나는 사실 나의 살과 살 그 자체 사이에 파이는 환원불가능한 간격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에서 이방인의 경험을 한다. 이 익명적인 최초의-타자성은 타자의 타자성으로ㅡ 그것이 타아의 그것이든 혹은 타인의 얼굴의 타자성이든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 타자성이든ㅡ, 타자의 타자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자아 안에서도 만지는 자와 만져진 것은 분리된다. 마치 나의 살이 항상 타자인 것처럼. 그리고 나는 내가 만지는 이 다른 살이 나의 살의 다른 극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만난 이 최초의 이방인은 나의 고유한 살의 부분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감추고 마치 초월적인 어떤 것une Chose transcendnate으로 잘못 이해된다. 이로부터 로고진스킨의 지속적인 테제가 나온다: "따라서 타자들과 연루되기 전에 나는 우선 나의 살과 연루된다. 다시 말해 나 자신과 관계한다".
따라서 이제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로고진스키가 돌아가는 데카르트는 레비나스가 기리는 데카르트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자아의 궁극적인 진리 안에서 타자의 전적인 지배에 대한, 나를 속이는 영악한 천재(악령)에 대한 한 저항점을 발견하는 제 2 성찰이다. 여기서 나를 속이는 자는 결국 자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맹목적인 환상으로서 드러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중심을 다시 자아로 옮기는 것, 초월적 증여에 대한 자기-증여의 우선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상처받을 수 있음, 강박, 트로마티즘이 마술처럼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것들의 의미는 전적으로 다르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만일 나를 사로잡는 이방인이 나 자신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제 상처와 비참을 넘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나의 살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 아래에서 윤리의 영역은 다시 교려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과, 나의 살과 가지는 원초적인 관계가 내가 타자와 맺는 관계의 가능성을 조건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타자성은 이제 내가 우선 내 안에서 만나는 최초의 살의 초월적인 투사로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열리는 질문은 화면 위에 던져진 모습, 즉 내가 타자 위에 던지는 이 유령을 통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로 향하는 길을 열 수 있으며, 강박과 판타지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타자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이다. 로고진스키가 전개하는 이 나-살moi-chair의 현상학(그의 책, Le moi et la chair, cerf, 2006를 참조할 수 있다)은 그가 말하듯 레비나스에게 진 빚을 떠나면 떠날수록 커지는 빚이다. 레비나스의 윤리가 나-살의 현상학의 음화négatif인 한에서 말이다.
ㅡ이 지옥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로고진스키와 다르다. 나는 그의 길이 레비나스 스스로 열어 논 길을 보지 않는데에서 나오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레비나스의 논문 "쓸데없는 고통"은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한 대답일 수 있다. 레비나스가 Saint jean Croix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도 레비나스는 타자를 만지는 것이 가져오는 그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촉발이 아닌 타자-촉발을 말하는 것, 최소한 거리를 타자와 가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또한 레비나스에게 나와 타자의 관계와 나와 타인의 관계는 영감의 관계이지 이 둘이 같은 지평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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