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진스키는 이러한 사유의 운동이 윤리를 근본화, 그 말의 한 의미에서 극단화하면서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 않는지를 묻는다. 'im-passe', 말 그대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더 이상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는, 다만 견디는 것만이 있는, 한 방법이 있다면 다시 되돌아나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그런 벽 앞에 놓이지 않는가?
로고진스키의 읽기의 새로움은 그가 "과장의 동기들이 중기와 후기에서 일관되지 않다"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존재와 다르게>에서 전개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를 관찰하면, "익명적인 타자성을 위해서" 전기의 존재자로서 구체적인 "타인의 박탈dé-position", "타인의 중성화(중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초기의 'il y a'의 익명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우리가 '불면'에서 만났던, 또 예술에서 만났던 그런 타자를 만나다. 이러한 결과는 저자가 보기에 우연적인 도달이 아니라, 과장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이끈 결과라고 주장한다. 사정이 그러한 경우, 과장은 단지 과장적 환원l'emphase de l'épochè으로ㅡ드러나는 것을 드러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ㅡ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R. Calin이 읽듯이 가시적인 것의 한계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상급은 보다 더 명백하게, 보다 가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장이 가해지는 대상에 근본적인 변질을 가져온다." 바로 여기에 "타자의 변질altération de l'Autre"이 자리한다. 이로부터 자아의 변질이,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가 변질된다. 레비나스가 자주 강조하듯이 '변질'은 '변형modification'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면, 레비나스가 말하듯 제 2성찰에서 제 3성찰로의 "혁명"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전복을 말해야 하는가? 이 경우 그의 넘어가기outrance는 모든 것을 그 경계로 이끄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사유 안에 잠자는 함축된 모든 것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여기에는 어떠한 진정한 단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가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의 벌거벗음, 얼굴의 허약함, 상처받을 수 있음은 타인에 대한 나의 무한한 책임을 요청한다. 이러한 명령이 강화되면 얼굴은 요청을 넘어서 그 한계를 넘어 나를 사로잡고, 강박이된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말 그대로 per-sécute=poursuivre, 나를 좇아다니는 유령이 된다. 선의 폭력. 얼굴의 현현éphiphanie에서 박해로의 이행에는 어떤 연속성이 유지된다. 그런데 관계의 의미가 뒤집힌다. 즉 같은 용어가 이제는 타자의 "사악함"으로, "박해자의 증오심 안에서 드러나는 이웃의 얼굴"(AE, 175)이 된다. 우리는 이것이 박해자의 얼굴, 구체적으로 나지의 얼굴이라는 것을 안다. 두 얼굴은 같은 얼굴인가? 가난한, 희생자인 이웃과 박해자, 살인자의 얼굴은 같은 얼굴인가? 여기서 로고진스키가 질문하고자 하는 핵심이 드러난다. "이 둘을 혼동하는 데에서, 이 두 얼굴을 구분하기를 거부하면서, 박해받는 자의 전적인 수동성 안에서 결국 게토들의 반항을 부인하지 않는가?" 모든 반항, 모든 정치적 혁명, 모든 저항을 부인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가?
ㅡ이 자리는 모든 정치적인 질문이,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윤리의 지위가 문제되는 곳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에서 윤리와 정치의 구분, 레비나스의 윤리의 '인내'에 반한 '조바심impatience'이 자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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