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과장적인 과도함의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동일자와 존재의 범주들만을 겨냥하는가? 이때 레비나스의 윤리는 마치 스스로를 극단화하면서(radical이 가진 그 또 다른 의미에서) 자기에 반해서contre soi, 자신의 고유한 담론 안에서 드러나는 것se trahir에 반해서ㅡ이 말이 가진 모든 의미에서ㅡ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그 담론이 여전히 존재론의 개념과 언어에 사로잡힌 동일자의 지배에 머문다는 것이 드러나면서trahir, 자신의 고유한 폭력을 포기하면서(배반하면서)trahir, 감춰진 잘못을 자백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와 다르게>는 과장을 과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저작은 이전의 저작의 주요한 주장들을 다시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과장적인 모습들을 한편으로는 그것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교정하면서 폭력적으로 배가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말하기le dire éthique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미 말해진 것들les dits을 반박하는dédire 것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비나스 자신도 인정하는 것처럼 <전체성과 무한>에서 그는 "존재론적 차이"를 존재자의 우위를 제공하면서, 다시 말해 타자의 우위를 제공하면서, "존재에 손상"을 가하는 것에 만족했다면, 이러한 전복은 다만 "윤리를 존재론적 차이 너머로 이끄는 운동의 첫 번째 걸음"일 뿐이다. 자아, 타자, 그리고 그들의 "관계 없는 관계"를, 존재에의 종속에서 해방하면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윤리의 의무가 될 것이며, 이 과장의 내기 안에서 윤리는 "존재론보다 더 존재론적으로", 존재론의 과장으로 드러날 것이다. 모든 윤리적 담론과 스타일, 이 사유의 분위기는 전적으로 변형된다. 자아moi, 에고이즘의 코나투스, 자기 동일화, 세계의 향유적 소유에 의해 정의되는 자아는 자기soi에게, 힘pouvoir도 성질도 없는 자기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여기서 자아의 단일성과 동일성은 전적으로 타자에게 맡겨진다. 자아의 과장은 여기서 자아의 파면destitution, 자아의 자리를 내어놓음dé-position과 동일시된다. 얼굴이 문제인 경우,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은 신의 덕성을 닮은 정직, 절대적인 진정성과 일치했다면, 이제 얼굴은 "애매성"에 의해서, 타자의 흔적이 그려지고 지워지는 마스크의 애매성으로 그려진다. 이전에 나의 희생자였던 얼굴, 나를 가르치는 주인의 탁월성이었던 얼굴은, 한 발 더 멀리 가서, 과장의 과장이 되어서, 나의 박해자의 얼굴이 된다. 나와 타자의 얽힘intrigue은 더 이상 제자와 스승,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로부터 사유되지 않으며, 박해. 강박, 트로마티즘의 시련에서 사유된다. 이 얽힘이 짜이는 장scène, 만남의 장소는 더 이상 같은 곳이 아니다. 분리와 무한한 외재성 대신에, 우리는 여기서 타자가 "동일자 안의 타자"로서 드러나는 내밀한 얽힘intrication intime과 관계한다. 이 미끄러짐, 이 이행, 이 변경은 나에게 레비나스의 최초의 윤리(전체성과 무한)와 두 번째 윤리(존재와 다르게)를 구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ㅡ레비나스의 용어 'intrigue'는 라틴어 'intricare', 복잡하게 얽히다, 그로부터 상황의 복잡해짐을 지시한다. 'intrication', 같은 어원을 가진다.
ㅡ로고진스키의 "애무에서 상처로"는 그 제목이 지시하듯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기에서 후기로의 이동, 특히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문제일 때, <전체성과 무한>의 접촉. 피부 위에 머물던 애무, 그 쓰다듬에서 그 피부에 채직과 칼을 가하는 박해로서의 상처로의 이동을 다룬다. 이 이동에는 레비나스 철학의 한 고유한 방법론이 작동한다. 이미 데카르트의 무한의 개념을 가져오면서, 사용했던 과장의 방법은 <존재와 다르게>에서 이 과장의 과장으로 드러난다. 거기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어떤 단절이 있는가? 이것은 레비나스 읽기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전향"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럿이듯이-연속 혹은 단절ㅡ, 레비나스 읽기에서도 이런 문제는 피할 수 없이 전개된다. <전체성과 무한>이 전개되는 자리가 분리라면, 그로부터 절대적인 외재성으로서 타자라면, 로고진스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드러나는 타자는 더 이상 분리와 외재성이 아닌 "동일자 안의 타자"로서 "내밀한 얽힘"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전체성과 무한>의 <유한 안의 무한>, <내밀성 안의 외재성>은 이미 말해진 것이 아닌가? 그 관계의 양태가 중기와 후기 사이에 정도의 강화, 과장의 과장을 통해, 타자는 더 이상 내가 상처주는 타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아니라, 타자는 이제 내게 상처주는, 나를 박해하는 자로 드러난다. 이러한 이동 안에 아들과 아버지,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동하면서, 그 관계는 강박, 트로마티즘으로서의 윤리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전체성과 무한>의 윤리와 후기, <존재와 다르게>의 윤리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이 단절을 연결하는 것 자체가 그의 철학의 방법론, 과장이 아닌가? 이 둘을 연결하는 열쇠는 그의 전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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