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Les temps modernes (n° 664. 6월-8월 2011, pp.119-136)에 실린 자콥 로고진스키의 글, "애무에서 상처로: 레비나스의 과장적 폭력"(Jacob Rogozinski: "De la caresse à la blessure : outrance de Lévinas")을 몇 번으로 나눠 읽는다.
로고진시키는 이 글에서 레비나스의 고유한 방법론, "과장적 방법"의 "hyperbolique"를 유사한 의미의 "outrance"로 읽는다. 왜? hyperbolique라는 단어가 가진 수사학적 가벼움 안에 감춰져 있는 레비나스 방법의 폭력적 성질을 폭로하기 위해 'outrage' 즉 '화rage'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정도를 지시하기 위해서, 그 한계를 넘어서면서outre=passer outre, au-delà la limite, 그 한계를 넘어서자마자 드러나는 '폭력'을 지시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레비나스의 말하기le dire의 폭력을 질문하기 위해서.
[je tenterai plutôt de m’interroger sur cette violence du dire, antérieure à tout concept et toute thématisation, cette hyperbole qui caractérise la démarche de Lévinas et qui serait sa manière singulière d’exercer l’épochè. Il
la désignait comme « passage au superlatif », « sublimation »,
« surenchère » ou « emphase » : « l’exaspération comme méthode de
philosophie ». J’aimerais lui donner un nom que, sauf erreur, il n’emploie jamais : l’outrance -car ce terme, qui dérive de la même racine qu’outrage, signifie l’acte de passer outre, de se porter au-delà (ultra) d’une limite, de l’outrepasser. Violence
hyperbolique, seule en mesure de soutenir tout l’excès, toute la
démesure d’une pensée qui prétend nous conduire au-delà de l’être.]
*
"어떻게 타자에게, 타자의 계시에, 그의 선함에, 그의 곧음에ㅡ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의 얼굴의 정직함에ㅡ폭력을 가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 그의 허약함에, 그의 궁핍에, 매순간 부정의의 가능성을 폭로하는 그의 얼굴의 벌거벗음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또 어떻게 나를 강요하는 타자의 얼굴에, 예를 들어-그런데 단순한 사례 이상인ㅡ타자의 이 탁월한 모습에, 나에게 우리에게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이름을, 그가 우리에게 남긴 이 수수께끼에 폭력을 가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의 질문은, 이미 그가 Faire part 에서 데리다에게 행한 폭력으로, 그 보다 앞서서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읽으면서 레비나스에게 행한 질문으로, "말해진 것이 부동하는 신탁"이 아니라면, 한 사상가에 대한 진정한 충실은 부정의와 불충실의 부분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충실과 불충실은 레비나스의 후설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모든 철학자의, 더 나아가 읽는 모든 독자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 한 단어 'trahir'가 지닌 이중성이 놓인다. 드러내면서 배신하는 모든 읽기의 역설.
그런데 위의 질문(...폭력을 가하지 않을 수 있는가?)은 두 방향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모든 가능한 폭력을 피해서 텍스트와의 화해를 찾는 윤리적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와 저항의 길이다.
그런데 어떻게 폭력을 자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레비나스의 사유가 우리에게 모든 폭력을 금지하는 한에서ㅡ"살인하지 말라!"ㅡ, 그러면서도 이 사유 자체가 극단의 폭력을 우리에게 가하지 않는 것이 아닌 한에서, 또 그 사유가 자기가 제정한 법을 매순간 스스로 조롱하는 것처럼 그 금지를 끊임없이 넘어선다면, 비폭력적 윤리는 다만 속임수인 한에서, 모든 부정의와 전쟁에 대한 선고는 분명,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선의 폭력'과 같은 다른 폭력을 부르는 한에서, 어떻게, 여기 지금, 이 금지의 사유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감출 수 있는가? 윤리적 비폭력의 불가능에 대한, "폭력의 경제"로의 이행의 필연성에 대한 성찰, 주제로서 파악된 이 질문은 우리를 이미 특히 데리다에 의해 전개된 한 영역으로 이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제기하는 질문은 데리다와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는 "말하기le dire의 폭력에 대해서, 모든 개념, 모든 주제화에 앞선 이 말하기의 폭력에 대해서, 레비나스의 사유의 논리를 특징짓는, 또 그 만의 독특한 에포케를 수행하는 한 방식인 이 과장법"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 방법은 레비나스가 "최상급으로의 이행", "승화sublimation", "가격상승surenchère" 혹은 "강조법emphase"이라고 부른 것ㅡ"철학의 방법으로서 고조exaspération"(DQVI, 141-143)ㅡ이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가는 이러한 과장은 가까이 데카르트의 영악한 천재의 가설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톤에서, 레비나스가 자신의 "철학을 인도하는 하나의 끈"이라고 말한 "존재 너머l’épekeina tès ousias"로부터 온다. <공화국>에서 글루콘이 존재 너머l’épekeina tès ousias를 처음들었을 때, 아이러니로 채색된 그런 놀라움이다. "아!(mon dieu, par Zeus!) 거의 신적인 과장daimonikè huperbolè이구나"(VI, 509a). 여기에는 일종의 거의 신적인 초월une transcendance quasi-divine이 있다."
레비나스 읽기에서 읽어나는 이런 놀람, "아연실색sidération", 충격은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 특히 <존재와 다르게>에서 전개되는 과장된 폭력, 수난, 죄의식, 박해, 태어난 것에 대한, 살아남아 있음에 대한 죄의식 등등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어떻게 저항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여기서 레비나스의 과장법은 칸트의 과장적 숭고의 폭력과 조우한다고 로고진스키는 말한다: "칸트에서 한계를 넘어서, 감각적인 형태를 지움에 의해 오는 이런 숭고의 감정이 초-감성적인 윤리적인 법의 이념들의 현시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낸다면, 이 과장적 폭력을 통해서 레비나스의 과장은 법 없는 윤리의 말하기le dire de l'éthique sans loi 를 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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