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에게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대상을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파악하고 그 대상과
생생한 관계를 유지한다. 반면 개념이 아닌 이미지는 우리가 대상과 맺는 이 현실적인 관계를 괄호 안에 넣는다. 이러한 중단을
칸트는 "무관심성"이라고 부른다. 실행되고 있는 미학적 분석은 여기서 멈춘다. 레비나스는 우리를 여기서부터 더 나아가게 한다.
'다시' 칸트의 이 말을 생각해 보면, 예술가는 사실 이 무관심성과 관계가 없다. 예술가는 칸트의 이 개념이 함축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가 전제하는 복종도 처음부터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미지는 창발성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전적인 지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지의 근본적인 수동성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예술가는 영감에 사로잡혀서
뮤즈의 소리를 듣는다. 이미지는 음악적이다. 이러한 종류의 수동성은 마법, 노래, 음악, 시에서 아주 가시적이다. 레비나스는 이
'마법'이라는 용어는 미적 실존을 사로잡고 있는 아주 고유한 구조인 이 수동성을 설명하는 데 아주 요긴하다고 말한다.
어렵지 않게 이 말에서 떠 올려야 하는 것은 주체이다. 마법 안에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이를 위해 레비나스는 음악을 음악이게 하는 리듬을 분석한다.
음악을 들을 때 주체는 어디에 있나 생각 해보자. 주체는 리듬 안에 아무 저항없이 실려간다. 리듬 안에는 "주체에도
불구하고"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더 이상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서 익명성으로의 이 이행"은 다름 아닌 시가, 음악이
가진 주술, 매혹이다. 이것보다 리듬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은 무용가 또는 군가에 맞춰서 행진하는 병사들이다. 아주 '특별한'
이 자동성에는 무의식적인 어떤 것도 없다. 거기에는 의식이 있다. "자신의 자유 안에서 마비가 된" 리듬 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의식이 있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 것은 춤을 추거나 행진하는 것을 참는 것이다"라는 진술이 나온다.
그래서 이제
이미지를 말하면서 우리는 무관심성보다 '관심'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유용성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관심'이라는 말의 어원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야 한다: "inter-esse". 즉 이미지는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사물들 사이에"라는 이 구조는 "꿈의 상상적인 세계의 정념"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주체는 사물처럼, 스펙타클에, 자기 자신 밖에 스펙타클에 참여하는 것처럼 사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런데 신체의 밖이
아닌 한 '외재성'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나-배우'의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나-관객'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 이런 외재성을 레비나스는
"내밀성의 외재성extériorité de l'intime"이라고 부른다. 의식과 무의식 밖에 자리하는,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현실과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리듬, 꿈의 이 역설적인 구조는 레비 부륄이 분석하는 원시인들의 탈자적 제의 안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리듬, 이미지의 구조는 감정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집단행위의 "idéo-moteurs"의 메타포로만 사용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레비나스는 덧붙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양 존재론의 해체로까지
이끌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의도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