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읽은 것이지만, 다시 읽어도 다시 읽히는, 다시 다르게 읽히는, 다른 것을 발견하는 레비나스의 한 논문은
<실재와 그림자>이다. 한 달, 3월 4일 부터 시작을 했으니깐 아진 한 달은 안 됐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이 번에는
다른 미궁으로 빠진다. 왜냐하면 이전에 명백한 것이 이제 더 이상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것이 그것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전에도 한 말이기는 하지만, 레비나스는 예술 작품을 말하면서,더 정확히 이미지를 말하면서, 현상학의
감성적인 것le sensible의 지위를, 즉 감성적인/감각적인 것의 현상학을 말하고 싶어한다. 바로 이 감각적인 것이 이제
나에게 미궁처럼 다가온다.
이 감성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것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플라톤이래로, 철학이
가는 길마다 걸리는 돌과 같다. 모두가 길을 매끈하게 포장하고 싶지만 철학은 항상 이 돌에 걸려 넘어진다. 때로는 아주
성공적으로 길이 박힌 돌들을 잘 파내고 길을 잘 다진 듯이 보이지만 그 포장도로는 곧 어디선가 솟아나는 돌들에 의해
갈라진다. 플라톤은 이미 그의 공화국에서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들에 대항에서 이 감각적인 것을 '구해'내려고 했다.
아리스코텔레스는 이 감각적인 것에서 벙어리의 천국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철학이 아닌 듯 하기에 그는 그 감각적인 것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로고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면에서 칸트를 닮아있다. 데카르트도 마찬가지로 코기토를 다루면서 이
감각적인 것을 수학적인 갈릴레이 세계에 흡수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구해내고자 했다. 그것이 그의 코기타티오cogitatio/사유,
혹은 아주 이상하게도 그가 관념idée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이후 칸트와 후설, 모두 이 감각적인 것을 철학 안에 사생아가
아니라 정당한 자식으로 자리를 부여하고자 하지만, 자기가 판 무덤에 빠진다. 프랑스의 예민한 현상학자들이 자리하는 곳은 바로
감각적인 것esthétique이다. 나는 이곳에 오랫동안 빠져있지만 아직 그 길이 훤히 보이지 않는다. 감각적인 것의 역사는 생명과 더불어 시작해서
끝나지 않는 생명, 삶의 역사와 같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감각적인 것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생명의 종말을 말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