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로댕과 감각

aurorepark 2013. 4. 25. 20:13




" 핑크가 얘기 하는 것처럼 타블로 위에 그려진 나무 그림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 우리는 마치 창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타블로를 통과해서 저 밖의 실제의 나무로 향할 수 있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또한 실재와 다른 타블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핑크에게 이 세계는 비실재이며, 중성화된 세계이며, 괄호 안에 넣어진 것처럼 잠정적으로 정지된 것이다. 그래서 핑크에게 그 세계는 이국정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한다. 그 결과로 그 타블로의 세계는 우리가 어떤 "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제거되고, 타블로의 세계 그 자체의 성질을 상실한다. 이런 핑크의 생각과 달리 타블로는 이미 우주의 한 조각을 탈취해서 따로 떼어놓는 것이며, 타블로라는 안에서 서로 낯설고 서로 침투할 수 없는 세계들을 함께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학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타블로가 지니는 한계는 그것을 한정짓는 물질적인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이 한계는 반대로 미학의 긍정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댕의 조상들이 이어지는 저 무차별적인 덩어리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재는 이 지반 위에서 세계 없는 실재의 이국적인 벌거벗음으로 정립되고,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난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Vrin, 88)

ㅡ 레비나스의 예술에 대한, 로댕에 대한 한 성찰이다. 별로 길지 않은 이 문장에 나는 이틀간 붙잡혀있다. 위에서 레비나스는 타블로에서 혹은 조각에서, 혹은 영화에서 모든 예술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탈취이고 다른 하나는 정립이다.  그가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문에서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존재자의 정립이라고, 그런데 존재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어떤 것이 자신 안에 갇혀있을 때" 자신을 내어 주기를 거부할 때 그것을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것, 그것은 탈취이다. [어떤 것이 그 본질상 자신 안에 갇혀있는 것은 그리스에서 피지스라고 불리던 것이다.] 그리고 탈취한 것을 그 지반 위에 놓는 것이다. 로댕의 조상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러한 두 가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레비나스의 시선이 집중하는 조상들을 받치고 있는 블록, 그 지반으로부터 그 지반에 '균열'을 만들면서 그 '틈' 사이로 벌거벗음이, 형상 없는 질료, 감각이 솟아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예술이 보여주는 이국적인 정서exo-tisme, 그 말 그대로 밖le dehors의 경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분하는 안과 밖의 구분에 낯선 것이라고 말한다.
ㅡ 레비나스는 여기서 그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연출la mise en scène'에 대해서 말한다. 1937년 그의 철학 노트 첫 줄에, 현상학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가 적어놓은 후설의 말, "Wie liegt es drin ?", 모든 작용l'acte, 모든 존재에는 이것cela이 있다라고, 현상학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이라고 한 이 말. 이 말은 comment, de quelle manière cela réside-t-elle là-dedans ?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것은 저 안에 자리하는가? 이것은 후설이 저 밖에 초월적 대상, 존재자들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구성하는 의식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장님인 자연적 태도의 순진함을 거부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후설에 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후설의 이념을 인용하면서 말한다: "초월성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작용의 의도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이 자신을 초월하면서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노에마의 존재 양태,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Wie es liegt, 체험 안에서 의식되어야 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181)
- 레비나스는 1986년 Jean Atlan의 전시회에 붙인 한 짧은 글에서 아틀랑이 말하는 "삶의 리듬"에 대해서 말한다: "아마도 그는 붓으로 연속적인 형상들의 동시성에서, 화폭 위에서 완수되는 원초적인 공존에서, 붓 자체가 긍정하고 헌신하는 공간의 본래적인 공간성에서 리듬의 통시성 혹은 시간성의 박동 혹은 지속 혹은, 이 삶을 덮고 감추는 종합의 모음의 공간을 부정하는 삶을 탈취해 내지 않는가?"


ㅡ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헤겔이 믿듯이, 또 다른이들이 생각하듯이 내적인 영혼의 표현이, 예술가의 영혼의 반사가 아니다. 이 생각은 그의 장소에 대한 사유로부터 온다. 의식의 여기, 의식이 잠을 청하는 여기, 그 장소는 기하학적 공간 이전에 로댕의 조각을 바치고 있는 지반이다. 이 지반으로부터 로댕의 조상이 솟아나듯이, 육체가  솟아난다. "육체는 익명적인 존재 안에서 용출이다"(EE, 122). 이것은 레비나스가 정립, 자리잡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과 눈은 영혼의 거울이라고, 표현의 탁월한 기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육체의 정신성은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힘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EE, 123)라고 말한다. 이어서 레비나스는 "육체는 정립에 의해서 모든 내재성의 조건을 완성한다. 육체는 한 사건을 표현하지 않는다. 육체는 이 사건 그 자체이다. 이것은 바로 로댕의 조각이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인상들 중의 하나이다. 로댕의 존재들은 절대로 예술이 강요하는 규범과 추상적인 지반socle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조상들이 완성하는 사건은 영혼과의 관계에서가 보다 그것들이 가지는 지반, 정립과의 관계에서 자리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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