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삶과 세계라는 두 우주

aurorepark 2013. 4. 6. 05:00






후설의 현상-학ㅡphénoméno-logieㅡ은 그 시작에서부터 둘로 잘려졌듯이, 그의 유언 속에서도 Lebenswelt, le monde-de-la vie는 마치 두 우주처럼 세계와 삶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구성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자아 안에서 구성하는 것이다(여기서 절대적인 자아만 빼면 들뢰즈가 된다). 현상학의 흐름은 이 분리 안에서 어디에 무게의 중심을 놓는 가에 따라서 두 우주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혹은 기약없이 멀어지기고 한다.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집을 지어야 할까 ?

한 타블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다만 색깔만을 보여주는 한 타블로를 보자(예를 들러 칸딘스키의 타블로를 보자. 세잔의 타블로 안의 사과의 빨강을 혹은 초록을 봐도 좋다). 그 타블로 위에 색깔은 우리를 어디로, 어떤 우주로 인도하는가 ? 만일 당신이 색깔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있는 어떤 소리를, 어떤 내적 울림을, 마치 심장의 뛰는 소리 같은 것을, 그 소리의 정조를 ㅡ 때로는 장조, 때로는 단조를ㅡ 듣는다면, 당신은 세계가 아닌 삶에 집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닌 경우, 당신은 세계에 집을 질 것이다.  전자의 경우, 보이는 색깔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인상 안에 그 자리를 갇는다. 후자의 경우 보이는 색깔은 세계 안에서,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전-인간적인 세계라고 할지라도, 혹은 그것을 자연이라고 부를지라고 그것은 세계의 개시를 알려온다. 

칸딘스키의 역설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퇴의 색채론을 떠나서, '색깔의 비가시성'이라는 아주 이상한 조합을 말을 발설하기에 이른다. "Voir l'invisible", "비가시적인 것을 보아라"라는 앙리의 진술은 그래서 우리가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면서만 가능하다. 칸딘스키가 한 것이 이것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파울 클레의 반대 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타블로 안에 파란색이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보인다면, 타블로 안에 파란색 혹은 빨강색, 혹은 초록색의 이미지는 표상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잘 알듯이 무한으로서,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은 칸트주의자가 아닐지라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예술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것이 마치 마술처럼 가능해진다. 헤겔의 철학의 미학화는 아마도 이런 것을 말할 것이다. 헤겔과 멀지않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를 정착시키고 대지를 산출한다".

가시적인 세계이든, 이 세계의 근거로서 이 세계에 앞선 것으로서 비가시적인 삶이든, 이 둘이 예술에 부여하는 하나의 지위는 어떤 신비적인 것이다. 그래서 화가, 시인, 음악가는 "우리보다 더 잘 말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말해진다. 여기에 현대 미학의 한 '신화'가 생겨난다.

레비나스는 그의 "실재와 그림자"를 열면서 "예술가는, 그가 화가이든, 음악가이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라는 하나의 도그마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천박한 지각과 구분되는 이들의 표현은 형이상학적인 직관과 일치하고 환원 불가능한 본질 안에서 진리를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일상어는 침묵하고 시인과 타블로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작품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고, 절대지식 안으로 이끌리는 예술적 상상의 위엄을 증명한다.

예술에 달갑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레비나스는 예술 안에서 어떤 진리의 현시도 어떤 혁명의 씨앗도 발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미'에 직면해서 어떤 자리를 주기를 주저한다. 그는 그림 앞에서, 관객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타블로 앞에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욕구를 느낀다. 그에게 예술은 거짓말쟁이이거나 위대한 천재 그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는 다만 예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미끼'에 걸려들지 말 것을, 미적 향유의 무관심성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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