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표시될 수 있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être(be)에 반한 불어의 한 동사 'avoir(have)'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멀리는 소유propriété를 의미하는 희랍어 'ousia'(hypostase, 동사einai=être가 명사화된 분사형)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의 철학의 언어가 무거운 이유는 바로 이 동사 때문일 것이다. 소유의 카테고리들이 짓누르고 있는 그의 철학 안에서 "나는 정신처럼, 미소처럼 혹은 부는 바람처럼"(EE, <존재에서 존재자로>, 37)존재하지 않는다.
"염려는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의 주변에 서성이는 존재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존재함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자기 자신의 넘침trop-plein에 의해 버거워지는 존재의 고체성solidité에 의해 부여된다."(EE, 37)
따라서 자아의 자유로운 자기에의 도래는 자기 자신에 의해 무거워지고, 자신의 존재에 의해 으깨져서 결국 자기 자신에 종속된다. 그래서 "자아le je의 발은 항상 자신의 고유한 실존existence 안에 잡혀있으며, 모든 것과 관계에서 외적인 자아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내적이며, 자기 자신에 묶여있다. 자아가 감당하는 실존에 자아는 영원히 얽혀있다. 자아가 자기일 수 없는 이 불가능성은 자아의 근본적인 비극을 표시한다. 다시말해 자아가 자신의 존재에 못 박혀있다는 사실을 표시한다."(EE, 143) 그래서 자기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진 것에 의해, 그것을 내버릴 수 없는, 그것을 떼어낼 수 없는 그 불가능성에 의해 버거워지고 그것에 의해 숨이 막히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일 수 없는 불가능성 안에, 더 이상 자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그 불가능성 안에 자아는 자기에 못 박혀있다. 이런 소유의 관계는 거리를 가지고 내 밖의 것들을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손으로 잡듯이 잡을 수도, 그렇다고 그 손을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자기를 볼 수 있는, 즉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가 없는 이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자아는 자신을 상실한다. 그런데 이중적으로, 한편으로는 자기 현전의 부족으로 충만하게 자기가 될 수 없는 무능 안에서, 다른 한편 자기 현전의 과잉으로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무능 안에서 자아는 자신을 상실한다. 소화를 시킬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이런 관계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끝없는 흔들림에, 이 현전의 역설에 한 이름을 준다면, 그것은 키르케고르가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세자르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아가 되지 못해서"라고 했을 때, 그 '절망'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자아의 정의는 그의 책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의 <절망의 논고> 첫 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이다. 그럼 자아는? 자아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un rapport se rapoportant à lui-même이다. 다시 말해, 자아는 관계 안에서 이 관계의 내적 정향orientation intérieur이다. 다시 말해 자아는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의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retour sur lui-même du rapport이다"(D, <절망의 논고>, Gallimard, 351)
그런데 이어지는 글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아는 동시에 타자로부터 정립된, 타자로부터 나온 관계라고 말한다. "인간의 자아는 발생된dérivé 혹은 정립된 관계로, 이런 관계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타자와 관계하는 관계이다"(D, 352) 이로부터 정신의 병이라고, 자아의 병이라고 말해지는 두 종류의 진정한, 엄격한 의미에서 절망이 생겨난다.[키르케고르는 처음 세 종류의 절망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는 자아가 있다는 의식이 없는 절망으로, 이것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두 개는 자아가 있다는 것avoir un moi에 대한 의식을 가진 자아로부터 나오는 두 개의 절망을 지시한다] 그런데 이 둘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끝없이 진동하는(위에서 레비나스에서 보았듯이) 하나의 것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D, 352)이다. 우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함은 스스로 자기이고자 하는 것으로, 키르케고르에 의해 "허약함의 절망désespoir-faibless"(396)이라고 특징지우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여성적인féminine 형식으로 "헌신, 포기"와 같은 관대함의 형식으로 현시되거나, 남성적인mâle 것으로 자기에 대한 증오로 이것은 자살로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관심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허약함의 속성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아가 자기가 아니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자기이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이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허약함에 대한 의식은 신 앞에서 자기를 비하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사실 더 깊은 곳에서 보면, 자신의 허약함에 대한 멸시에 이르게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렇게 허약한 자아이기를 원치 않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자신에 의해 정립된 자아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아는 가장 깊은 곳에서 이 진정한 단절에 이를 수 없으며, 그로부터 자기를 전적으로 읽어버리면서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를 상실한다[키르케고르가 말하듯 잃은 자가 이기는 이상한 게임을 상기할 수 있다. 장 쥬네가, 이어서 사르트르가 하는 게임이기도하다]. 거꾸로 고독 안에서 자기이고자 함ㅡ키르케고르가 악마적démoniaque 절망이라고, 혹은 도전적 절망désespoir-défi라고 부르는 것으로, 여기서 자아는 자아를 정립한 힘puissance 위에 자리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아가 다른 것에 의해 정립된 자기와의 관계일 때, 진정한 자아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아니고자 하는 욕구 혹은 의지와 반대로 자기이고자 하는 욕구는 결국 이중적인 불가능성에 이른다. 다시 말해 자아를 그것을 정립한 힘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불가능성, 즉 자기를 파괴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 이른다. 반면 파생된 혹은 도래한 자아를 죽이고, 절대적으로 자기이고자 하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죽일 수가 없다. 키르케고르는 자아는 이렇게 자신에 영원히 못 박혀있다고 말한다. 자아는 인간 안에 영원성의 흔적으로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고통, 악의 끝terme이 아니다. 여기서 끝terme은 끝나지 않는, 그칠 수 없는interminable 것이다"(D, 359). 그래서 "절망은 태울 수도 소진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에, 자아에 불을 집히는 것이다."(D,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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