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테마들,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로부터 구원되는가?라는 가장 일반적인 주제들ㅡ그의 책에 발견되는 ‘죄의 도약’과 ‘무구의 전적인 상실’, 그로부터 ‘신과 인간의 단절’과 ‘신앙의 도약’을 통한 초월성에 의한 구원ㅡ은 사실 근본적인 내재성과 삶의 자기-생성auto-génération을 말하는 앙리의 철학 안에서 그 자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가 “삶의 정념적인 상기”라는 제목 아래에서 행하는 불안의 분석은 우리에게 죄의 도약도, 그로부터 우리 안에 들어오는 “새로운 성질”도 잘라낼 수 없는 우리 안의 내재적인 한 실재의 증명을 제시한다. 바로 여기에, 이전에 모든 해석에 반한, 특히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해석에 반한 앙리의 키르케고르 읽기의 내기가 자리한다.
앙리는 자신의 근본적인 현상학, ‘물질 현상학’을 토대 짓기 위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두 철학자가 있다. 그 하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실질적인 행위의 현상학적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Je peux”로 해석한ㅡ앙리가 “철학의 왕자”라고 부르는ㅡ멘느 드 비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직관을 그 근본성에까지 이끌었다고 앙리가 말하는 “천재” 키르케고르이다. “모든 실질적인 행위가 하나의 노력이고, 모든 노력이 이 “노력의 감정”이라면, “나는 할 수 있다”의 현상학적인 가능성은 정념pathos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리고 이 정감성에 대한 근본적인 직관을 가지고 있었던 키르케고르는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가능성을 “힘의 불안한 가능성l'angoissante possibilité de pouvoir”(Le concept de l'angoisse, CA, tel Gallimard, 205)으로 파악한다. 이런 이유로 앙리는 키르케고르를 데카르트, 그리고 멘느 드 비랑과 함께 “근본적인 현상학의 발명가”(I, 272)라고 부른다. 앙리의 근본적인 현상학적 읽기에 의하면, 불안의 개념을 처음부터 가능성 혹은 힘의 개념과 연결한 키르케고르는 이 연결을 위해 불안의 정념만이 아니라, 정념 일반을 철학적 반성의 중심에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우선성 위에서 힘과 연결된 정감성은 행위의 원리로 이해된다. “정감성은 다만 모든 행위의 동기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본질을 제공한다”(I, 271). 왜냐하면 앙리에게 현상학적 물질로서 정감성은 실재 그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앙리는 키르케고르 읽으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테제, 즉 초월론적 정감성이 모든 생각 가능한 힘들pouvoirs의 내적 가능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편으로, 불안과 가능성과의 내적 관계로부터 불안의 심연에 접근하고,(『육화, 살의 철학』 37절) 이어서 키르케고르가 ‘역설’이라고 부르는 관계로부터ㅡ앙리적인 용어로는 나타남의 이중성으로부터ㅡ불안의 심연에 접근한다(38-39절). 그리고 끝으로 이 두 흐름이 결합하는 ‘에로티즘’ 안에서 불안을 설명한다(40-43절). 여기서 첫 번째 주제만을 다룰 것이다.
첫 번째 불안의 심연은 무한의 가능성l'infinité du possible으로부터. “우리의 살에 기본적인 힘들pouvoirs 각각이 짊어져야 하는, 견뎌야 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가능성”으로부터 설명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키르케고르가 ‘잘못’ 혹은 ‘타락chute’의 무한성이 설명된다. 앙리가 처음부터 “나는 할 수 있다”의 이 ‘힘’과 그것의 ‘무한’을 연결하는 이유는, 생각 가능한 모든 힘들/가능성들이 절대적인 삶의 “나는 할 수 있다” 안에 자리하는 한에서, 불안의 기원을 절대적인 삶과의 관계 안에 놓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 무한의 가능성은 잘못, 혹은 추락의 심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반면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의 심연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의 가능성ㅡ자유의 현기증 나는 무한한 가능성ㅡ하고만 관계한다. 이러한 추락의 이미지로부터 죄인과 신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ㅡ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ㅡ무한의 거리가 산출하고, 필연적으로 초월성, 도약, 신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이 요청된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선택’으로서 죄의 도약과 신앙의 도약이 설명된다. 키르케고르가 기술하는 죄 이전에 아담의 상태에는 대립된 두 성질 사이의 선택이 자리한다. 그 선택은 키르케고르에게 일단 행해지면 “결정적”이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영원의 가치를 가진다. 이러한 한에서 키르케고르에게 두 상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단절과 거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앙리의 읽기는 여기에 자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내재성의 철학을 주장하는 앙리에게 키르케고르의 도약을 내재성 안에서 설명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것, 내재성 안에 자유를 도입하는 것이 여기에 걸려있는 내기이다. 이를 위해 앙리는 키르케고르를 데카르트나 멘느 드 비랑과 함께 “근본적인 현상학의 선구자”라고 부르도록 한 키르케고르의 최초의 인간의 최초의 상태인 ‘무구innocence’를 분석한다. 이 계기는 왜 들어오고, 그것의 기능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앙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불안의 익숙한 예들로부터 시작해 보자. 앙리가 여기서 사르트르의 사례를 불러오는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끌어들이고 하이데거의 무를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이 예들을 다시 드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이 사르트르에 자신을 기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아주 단순히 그의 주장들을 기각하기 위해서이다.
“동료들과 아주 어려운 절벽 등반을 떠난 한 사람이 절벽 꼭대기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한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될 수 있다. 추락의 가능성이 그를 마비시키고 불안이 그를 잠식한다. 이 가능성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그가 피하고자 하는, 빠져들 것 같은 낭떠러지 좌우로 열린 심연에 자리하는가? 어디서 불안은 그를 숨 막히게 하는가? 이것들은 다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다른 사람—혹은 같은 그 사람—이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열차가 들어오고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다. 애를 써서 그는 겨우 그 앞에 파인 공허로 빠져 들어갈 가능성에서 빠져나와서 역의 벤치에 앉아서 눈을 감고 웅크린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허약한“ 존재들이라고 말해진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여기 아주 정상적인 두 사람이 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무용 연습실을 떠나 넓은 베란다에서 그 앞에 펼쳐진 밤을 지켜보고 있다. 조금 후에 그의 파트너들 중의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그처럼 난간 위에 손을 놓는다. 이들이 피하고자 한 것은 연습실의 숨 막히는 열기, 시끄러운 음악, 모든 소란인가? 아니면 그들이 피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불안인가? 어떤 불안인가? 불안이 그들을 이 베란다로 이끌고 불안은 그들을 놓지 않는다.”(I, 272)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키르케고르는 우리의 설명들이 처음부터 길을 읽어버리는 객관적인 상황을 단번에 지워버린다. 객관성의 부분적인 제거가 아니가 전적인 환원은 그가 불안의 분석을 ‘무구innocence’의 분석을 통해서 시작하면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무구는 무지이기 때문이다”(CA, 201) 다시 말해 전적인 무지는 외적 상황들에 대한 인식에 타격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적 상황들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전적인 의심, 또 후설의 세계 그 자체의 전적으로 환원에 대응하는 이러한 무지의 가설은 그 유명한 불안과 두려움을 구분하는 유명한 기준이 되기도 하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아담은 처음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가 내려졌을 때, 전적인 무지에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금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나중에, 즉 일이 저질러지고 나서나 올 수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가, 그리고 앙리가,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아담이래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더 이상 무구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우리가 언급한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예로 돌아가 보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공중에 매달린 가능적인 것의 척도가 되는 것은 사르트르가 말하듯 사유, 의식이 아닌가? 남자가 자신의 손을 조금 움직여서 난간에 놓인 여자의 손 위에 놓았을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녀는 자신의 손을 치우는가? 사르트르가 말하듯, 자신의 손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사물처럼 무화하는 것에 만족하는가?
앙리는 “다만 사랑놀이라고 잘못 명명된 이 놀이를 이끄는 ‘가능적인 것’은 절대로 사유의 시선 앞에서 전개되는 내용과 동일하지 않으며, 미리 계획된 모험을 좇는 주인공들과 동일화되지 않다”(I, 273)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키르케고르가 무구를 불안의 분석에 예비적인 것으로 만들었을 때, 다시 말해 불안의 원리가 될 가능적인 것을 사유의 장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내재성 안에, 무구가 그것의 모범적인 정념을 제시하는 그런 내재성 안에 놓았을 때, 그가 행한 객관성의 환원의 의미이다”(I, 274).
위의 진술에서 앙리는 더 나아가 무구를 하나의 정념으로 삶의 근본적인 내재성 안에서 삶의 모범적인, 즉 보편적인 정념으로 해석한다. 그러한 한에서 무구는 어떤 실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키르케고르가 묻듯이 “죄는 어떻게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가?” 죄가 무구의 상실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면,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각자는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는지를 안다면, 이해한다면”(CA, 211) 이제 우리는 어떻게 각자가 무구를 상실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무구는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구는 다만 그것이 상실된 후에만 자신이 어떠했었는지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무구가 결핍하고 있는 지식은 이런 사유의 지식이다. 그럼 사유의 지식을 회피하는 무구는 비실재인가? 아니면 무의식인가? 그런데 그것을 비실재라고 혹은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다만 사유의 기준에서, 사유에 의해서일 뿐이다. “사유의 지식을 회피하는 무구는 자신의 정념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기를 그치지 않을 뿐이다”(I, 274). 그래서 무구와 같은 것은 다만 자신의 정념적인 직접성 안에서 주어지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무구는 “살의 무구”(275)라고 앙리는 말한다. 더 나아가 이 살을 살로 만드는 것은 무구라고, 또 모든 살은 무구하다고 앙리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 무구를 아주 오래전에 모두 상실했다면, 이 살의 무구는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가? 앙리는 그것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마치 타성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아서 맹목적인 것으로 다뤄지고 아주 쉽게 잊힌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보통 ‘습관적’이라고 말하는 주의하지 않고도 살이 자신의 힘들/가능성들을 전개하는 일상적인 몸짓들, 일상적 삶의 실천들이다. 일어나서 걷고 무엇인가를 들어 올리고 나의 사지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실천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무구한 나의 살의 실천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실천들에서 너무 쉽게 잊히는 것은 이 실천에 내재하는 “나는 할 수 있다”의 무구의 힘이다. 한 의사가 말하듯 건강은 “기관들의 침묵”이다. 이렇게 종종 삶은, 이런 직접성 안에서 건강처럼 잊힌다. 그런데 ‘살의 현상학자’로서 우리는 다만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살의 현상학의 원리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실천, “사실적인 힘들”을 실행하게 하는 초월론적인 힘, 즉 나의 “나는 할 수 있다”의 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물어야 하고, 살의 현상학자로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본질적인 구분에 의존한다. 이 힘의 가능성ㅡ힘의 힘un pouvoir pouvoirㅡ은 불안 안에서 갑자기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힘의 불안한 가능성”이라고 키르케고르가 부른 놀라운 직관이다. 그래서 앙리는 모든 삶의 실천의 쉬움이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무구가 아무리 무구하다고 할지라고 거기에는 불안이 자리한다(275).”
“무구가 무지하고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구하다는 사실, 혹은 키르케고르의 결정적인 다른 진술을 따르면, 힘의 가능성과 연결된 불안이 ”아무것도 아닌 것“ 앞에 불안이라는 사실은 이 불안 안에서 이 힘의 가능성의 현전도, 또 그 안에서 이 가능성이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을 불안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사정은 이와 전혀 정반대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힘의 가능성은 고조되고, 이때 불안은 무구에 전적으로 스며든다. 불안은 무구에 그 자신의 고유한 정념, 다시 말해 알려지지 않은 것l’connu 앞에서 끄는 힘과 밀어내는 힘의 섞임을 부여한다. 이 불안한 상태는 무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선도 악도 아니라고—할지라도 그것이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점령되고, 그것에 복종하고, 이 ‘현기증 나는 자유’의 불안에 의해 잠긴다(275-276).”
불안이 비밀스런 이유는 그것이 시선을 회피하고 정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무구는 자신의 불안을 어린아이처럼 일종의 즐거움과 모험심을 가지고 느낀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불안은 본질적으로 아이에 속하기 때문에, 아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불안 안에서 일종의 쾌락이 자리한다. 그런데 이 쾌 안의 불안은 정념과 자유의 현기증에 복종한다고 앙리는 말한다. 다시 말해 ”불안은 스스로를 짊어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고유한 짐fardeau 아래서 으깨진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자기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그를 삼키려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불안 한가운데에서 불안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로부터 도망치거나 자기를 제거하는 것은 또한 이 불꽃 한가운데에서 불안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 몰려서 그 안에서 도망칠 수 없는 불가능성에 부딪칠 때 힘의 가능성은 자기 자신으로 다시 던져진다. 다시 말해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되던져진다. 이때 그 가능성은 그 힘 안으로 유일한 출구인 것처럼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행위로 나아간다“(276). 이러한 불안은 현기증 나는 산 능선 위에서 역의 플랫폼에서 무용가들의 발코니에서 완성된다.
앙리는 이 불안의 과정은 인간의 행위 한 가운데에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제기한 것처럼, 이들은 이미 무구를 읽어버렸기에, 앞에서 우리가 기술한 일련의 상태들ㅡ불안ㅡ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지 모험을 찾아서, 쾌락을 찾아서 외출했을 뿐이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쾌락이 불안의 쾌락이라면, 이 쾌락은 자기를 자기에게 돌려주지 않는가?”(277) 왜냐하면 “불안은, 자기의 본질, 정념이 절정에 달한 표현”일 뿐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우리가 불안 안에서 무한의 자유인 이 힘의 가능성이 자기 안에 이미 언제나 부여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상태가 아닌가?
조금의 차이도, 조금의 간격도, 조금의 비판도 언급함이 없이 앙리가 자신의 텍스트 안에 기입하는 키르케고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케고르의 도약, 죄의 도약에 의해 세계에 들어오는 죄가 가져오는 전적으로 새로운 성질, 다시 말해 전적인 무구의 상실, 그 단절, 그리고 신앙의 도약을 통한 신과의 화해를 위해 초월성을 불러내는 키르케고르를 어떻게 지울 수 있는가? 앙리의 해석을 그대로 읽어보자.
“키르케고르는 사회의 진화를 모르지 않았다. (...) 세대를 거쳐서, 무규정적인 반복을 거쳐서 불안은 양적으로 집적되고(”객관적인 불안“), 죄가 가능한 악화된 조건들을 산출한다. [그런데] 이 조건들과 죄 사이에는 어떤 ‘이행passage’도 기술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는 어떠한 이행도 없고 다만 ”도약“만이, 새로운 ”성질“의 절대적인 정립만이, 다시 말해 모든 조건과 결과적으로 모든 설명에 환원 불가능한 도약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도약은 죄이고 행위 그 자체이다. 이로부터 결정적인 진술ㅡ”죄는 그 자체 전제된다“(CA, 191)ㅡ이 나온다. 행위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 생성 과정 안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근본적인 자유로부터 나온다”(277).
위의 진술은 앙리의 키르케고르 읽기에서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위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죄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 생성 과정 안에서 각각의 개인에게 부여된 근본적인 자유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과 절대적인 삶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앙리의 생성génération의 개념ㅡ창조가 아니라ㅡ안에서는 인간과 신 사이의 어떤 외재성, 어떤 단절도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절대적인 삶에 대한 개인의 삶의 절대적인 수동성만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생성된 것은 그것을 생성한 힘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앙리가 말하는 인간은 키르케고르와 달리 세계의 모든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런데 한 순간도 이 삶으로부터, 신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그러한 한에서, 엄격하게 말해서 키르케고르의 죄의 도약, 무구의 전적인 상실, 구원의 도약은 삶의 생성의 근본적인 내재성 안에서 그 자리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분리,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 보다 더 강한 “삶의 정념적인 상기”로서의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삶의 전적인 상실이 아니라, 망각으로부터 우리를 깨운다고 앙리는 주장한다. 이 모든 주장들을 위해서 이어지는 글들을 마저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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