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물질 현상학과 삶의 철학 ㅡ 세계에는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aurorepark 2014. 8. 3. 22:10


물질 현상학과 삶의 철학 - 세계에는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I.

 

미셸 앙리, 프랑스의 현상학자들 중에 가장 근본적이라고 말해지는 - 그 근본성에 대해서 우리는 곧 이어서 물을 것인데 -, 아직은 우리에게 그 이름이 낯선 그에게 한 발 다가가기 위해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한 인터뷰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1996년 그에게 바쳐진 국제 콜로키움이 열린 자리에서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그 자신의 현상학적인 의 개념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받은 철학자는 그의 삶의 한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지스탕스와 빨치산의 경험은 나의 삶의 개념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은밀성(la clandestinité)은 나에게 일상적으로 그리고 아주 첨예한 방식으로 자기 은닉(incognito)의 의미를 전달했다. 이 기간 내내,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감춰야만 했다. 이 지속적인 위선 덕분에, 진정한 삶의 본질이 나에게 드러났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최악의 순간에도, 세계가 최악으로 잔인해지는 경우에도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보호해야 할 비밀처럼 삶을 체험했으며, 삶은 나를 보호했다. 세계의 현시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현시가 인간의 조건을 결정한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앙리가 말하는 은밀성(la clandestinité)은 레비나스의 이름 없음”(sans nom)을 상기시킨다. 전쟁 당시 유태인의 상황을 레비나스는 이름 없음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국경을 넘어서 은밀히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있데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또한 밀입국자 혹은 불법이민자(clandestin)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세계의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페스포트가 없다.

이 앙리의 고백에서 우리는 그가 나중에 나타남의 이중성이라고 부를, 즉 자신의 고유한 삶의 한 사건 안에서 보이지 않으며 비밀스런 삶의 나타남과 세계의 나타남의 대립을 발견한다. 모든 시선을 회피하는 듯이 보이는 이 자기를 현시하는 이 힘, 그가 삶의 정감성(affectivité)”이라고 부르는 이 초월론적인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에게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자기에서 나타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누가 이런 삶을 본적이 있는가? 누가 이런 삶을 지각한 적이 있는가? 누가 그것을 하나의 사물처럼 하나로 드러내 보여준 적이 있는가? 마치 산에 숨어 살던 빨치산들에게 삶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듯이, 그들에게 이름이 있데 이름이 없듯이, 세계 안에는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이 자리, 세계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이 감춰진, 비밀스런 이 삶의 자리를 밝히는 것, 다만 형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익명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가 항상 강조하듯이 각자에게 실재적이고, 실질적이며, 구체적이라고 말하는 이 자리를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 그리고 그것에 철학적인, 현상학적인 토대와 권리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바로 미셸 앙리 철학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그의 철학의 여정 안에서 그의 세계의 거부, 삶의 근본적인 내재성의 주장은 종종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앙리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무엇이 진정으로 실재적인가?” “무엇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가 실재라고, 진리라고 믿는 세계의 가시성을 비실재화”, 탈신비화, 혹은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면 탈주술화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줄어들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마른 가죽들과 곡식과 소금이 담긴 자루들을 들고 천천히 다른 사람들에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눈을 껌뻑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봐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품들 안에 포함된 노동, 살아있는 노동.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천, 노력, 각자의 고통을 볼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시선 앞에 그들이 이 고통, 이 노력의 등가라고 상상하는 것, 즉 그들의 표-상을 놓았다. 즉 노동 시간, 노동의 난이도, 노동의 질적 등급 등등 우리가 나중에 노동의 인식대상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초월적 본질로서 cogitatio의 특수한 본질과 같은 것을 놓았다. 경제적인 실재 전체는 우리가 항상 그것들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하고 셀 수 있어야 하는 한에서, 객관적이고 이념적인 비실재의 등가물들의 합일뿐이며, 이것이 그들의 삶을 대체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 가장 근원적인가장 구체적인 사실성으로서 생생한 이 삶의 망각이라고 - “존재의 망각이 아니라 - 앙리가 말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비판 - 칸트적 의미의 비판 - , 그의 전 저작 - 철학, 특히 현상학에 대한, 문화, 사회, 정치, 예술에 대한, 종교에 대한 비판 - 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맑스의 1857-1858수고들(Grundrisse)에서 나타나는 살아있는 노동으로부터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앙리의 대작 맑스(1976)는 우리가 믿고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정치-경제학의 대상들에 대한 탈실재화의 과정으로, 맑스가 진정으로 생각한 것은 -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 앙리에 의하면, 정치-경제학의 이 대상들에 앞선 것”, 그것들의 초월론적인 발생을 생각한 것이다. 그 가능성은 다만 형식적인 선험적 조건들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개인적이며, 주체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은 살아있는 노동으로부터 교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앙리가 나타남의 이중성의 토대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 역사, 세계, 사회, 자본, 언어, 계급, 노동, 등등의 개념들의 탈주술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 개념들의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진리보다 더 본래적인 인간의 진리로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개인으로부터, 그 개인의 측정할 수 없는 삶으로부터 오랜 철학의 대상인 진리를 밝히는 것이다. 더 이상 진리는 지적인 것과 사물과의 일치에서 생각될 수 없고, 그것의 앞선 것, 앙리가 정감적 실재라고 부르는 삶으로부터 밝혀진다. 이로써 세계는 비로소 실질적으로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세계는 이 토대 위에서 그 자신의 본래의 색깔을 되찾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세계의 거부는 세계의 버림이 아니라, 세계를 우리에게 정당한 방식으로 돌려주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삶의 철학, 물질 현상학은 처음부터 모든 학의 앞선 것으로서, 정치에 앞선 것으로서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주체의 잊어버린 초월론적인 탄생을 소생시키는(revivre) “윤리적 염려를 전제한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의 나타남의 탈실재화는 현상학의 포기가 아니라, 현상학의 그 본래적인 의미의 전개이다. 왜냐하면 후설적인 탁월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우리에게 현시하는 지를 묻는 질문의 방식의 전향에서 그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설이 그 어떻게를 의식의 지향성에서 찾았을 때, 후설은 그 현상학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다고 앙리는 말한다. 물질 현상학은 바로 후설의 시간 분석(1)과 방법론(2),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타자와의 관계(3장과 4)에 대한 분석 비판을 통해 그의 이 잃어버린 삶의 기원을 밝히는 데 바쳐진다. 이로부터 후설 현상학의 유산과 그 지반의 확산, 교정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의 질문 자체의 갱신을 통한 현상학의 근본화, 현상학의 전복의 요구가 드러난다.

 

현상학의 갱신은 오늘날 하나의 조건에서만, 현상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질문, 그 철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질문 자체가 갱신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갱신은 확장, 교정, 더 나아가 다른 것을 위해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의존하는 것을 전복해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현상학을 근본화하는 것이다.”

 

현상학을 과학의 사후작용으로서 반성활동에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의 기본원리가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은 바로 현상학의 질문 자체이다. 그 질문의 대상은 우리가 잘 알듯이 더 이상 현상이 아니라 현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어떻게 안에서의 대상들(Gegenstä̈nde im Wie)”, 다시 말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남 그 자체, 즉 현상의 현상성과 관계한다. 그런데 이 현상의 현상성이 세계의 나타남으로, 보는 의식이 자기를 스스로 볼 수 없는 무능으로 인해 의식의 탈자적 형식 - 초월성, 차이, - 으로 나타났을 때, 물질 현상학의 요구가 나타난다.


현상학의 질문을 근본화하는 것은 다만 순수한 현상성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성이 자신을 본래적으로 현상화하는 방식과 그것이 일어나는 바탕인 실체, 소재, 현상학적인 물질, 즉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성을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물질 현상학의 과제들이다.”


근본적이라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지시하듯이 사물들을 그것의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뿌리는, 맑스가 말하듯 사회도 역사도 구조도 무의식도 아닌, “인간 그 자체이다”. 다만 그 인간 그 자체는 매번 자기가 자기를 느끼는 내재적인 삶의 고유한 자기체험이다.


물질 현상학은 이 비가시적인 현상학의 실체를 지시할 수 있다. 이 실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어떤 정감(un affect), 더 잘 말하면 모든 정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모든 촉발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 현상학의 관점에서 현상학적인 실체는 삶이 자기를 느끼는 정념적인(pathétique) 직접성이다. 이런 삶은 정념적인 밀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런 방식으로 삶은 본래적인 현상화의 어떻게에 의한 현상성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물질 현상학의 요구는 후설의 질료 현상학의 불충분성과 그것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태어난 것이 아니라, 1963현시의 본질이 획득한 것과 이 이후의 연구들의 성과로, 그것은 차라리 이 불충분성에 대한 명확한 통찰의 조건이다. 여기서 앙리가 말하는 은 따라서 생물학의 대상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구체적인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앙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나타나는 것과 나타남 그 자체”, “현상과 현상성 그 자체”, “촉발하는 것과 촉발되는 것이 일치하는 모든 것의 원리로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s'éprouver soi-mê̂me)” 자아의 존재로서 자기(le Soi)의 자기성(ipséité), 정감성으로서의 현상학적인 삶, 절대적인 주체성이다. 우리들 각자 안에 끊임없이 지나가면서 머무는 이 자리는 절대적이기에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며, 주체적이기에 절대로 익명적인 아닌 나의 것으로 그 말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기-경험, 자기-체험, 더 정확히 자기-감정(sentiment de soi)”이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적 현상학적 전제들을 뒤집는 이 공식 - 자기를 느끼고 견딤 - 은 그의 철학의 출발이자 그의 철학의 끝이기도 하다. 앞에서부터 여러 번 이미 반복한 앙리가 정감성이라고 부르는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견딤은 어떤 것(quelque chose)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느끼는 원초적인 사실, 그로부터 다른 모든 촉발이 가능해지는 그런 것이며, 현상학적인 실행의 실행성 안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 그것이 내감이든, 외감이든, 지각에 의한 의미의 본질 직관이든 - 지평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촉발의 원초적인 형식이다. 다시 말해 정감성은 그것이 외적인 세계에 의한 촉발이든 그것이 내감에 의한 시간적 촉발이든, 촉발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촉발되는 이 힘, 촉발하는 것과 촉발되는 것이 일치하는 - 위의 공식과 함께 자주 반복되는 공식 - “자기-촉발”, “자기-감정은 우리가 오랫동안 혼동해 왔던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해 촉발되는 힘, 우리가 감성(sensibilité)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분된다. 더 나아가 후설의 느끼는 행위(l'acte de sentiment)’와도 하이데거의 기분혹은 처해있음과도, 셸러의 감정과도 구분된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또 삶이 존재의 중심에서 본래적인 현상화이며,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그 자체가 존재해야한다면 삶은 다만 존재의 한 영역, 즉 영역적인 존재론에 한정되지 않는가? 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와 사유의 법칙을 따르는 이런 전통적인 위계질서는 앙리가 제안하는 다른 앎의 질서, “삶의 법칙들을 따라서 이제 전복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삶을 종속시켰던 존재는 그리스적 존재, 즉 세계적 존재자의 존재로, 그로부터 사유되고 잉태된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의 순수한 현상성이 전개되는 탈-자가 이미 삶의 정념의 직접성 안에서 촉발되지 않는다면 이런 존재는 다만 죽은 존재 혹은 비-존재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삶은 항상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를 제공한다. 절대로 그 반대가 아니다.

 

앙리가 제시하는 삶의 법칙, 내적 구조는 그가 즐겨 인용하는 카프카의 말처럼 네가 서 있는 바닥이 그것을 덮고 있는 두 발보다 더 크지 않을 행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행운(chance)”은 동시에 (fardeau)”이기도 하다. 여기서 앙리는 이 삶의 내적 구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행운, 혹은 자기에 전적으로 몰린 삶의 견딜 수 없는 짐이라고 말한다. 모든 경우에 삶이 자기 자신과 매 지점에서 맞아 떨어지는 이 삶의 근본적인 내재성, 사물의 외적 동일성이 아니라, 삶이 자기와 매 지점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 이것은 즉각적으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순수한 사실로서 절대적인 주체성의 본질이며, 자기성의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삶의 본질이 자기에 대해 어떤 균열도 거리도 없이 정념적인 자기-촉발의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순수한 사실인 한에서,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수동성을 표시하며, 삶은 어떤 자유보다도 더 강한 자기-시련(se souffrir), 자기-감내(se subir)”를 의미한다. 이런 삶의 구조를 앙리는 삶의 지식이라고 부른다.

 

봄이 자신을 자신에게 드러내는 계시의 힘(le pouvoir de la révélation)삶의 지식, 삶이다. 봄이 자신의 보는 것, 즉 대상을 발견하는 그러한 계시의 힘은 인식의 지식이다. 여기에 이어서 과학과 인식 일반이 자신을 근거짓는다. 여기서 두 힘은 후자가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이 관계를 궁극적으로 근거짓는 것 - 최초의 간격의 출현, 지평과 거리두기, -- 안에서 자신을 고갈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힘을 설립하는 현상성은 초월론적인 외재성의 현상성이다. 모든 종류의 외재성과 객관성, 그리고 물론 과학적 세계의 객관성이 형식을 취하는 것은 모두 이 안에서이다. 반대로 삶을 계시하는 힘 안에는 간격도 차이도 없다. 삶은 거리 없이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이 체험의 현상성은 정감성이다.”

 

후설에게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의 물질은 현상성의 타자이다. 이제 앙리에게 현상, 물질은 현상성의 본질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해 물질, 현상은 스스로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현상은 더 이상 현상학의 어떻게 안에서 파악하는 대상이 아니다. 현상은 새로운 땅에서 더 이상 세계의 법칙들이 아닌, 사유의 법칙들이 아닌, 삶의 법칙들에 의해 존재한다.” 이로써 현상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

 

II.

 

앙리의 전 철학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에 의존함이 없이, 눈과 시선에 의존함이 없이 보이는 것으로 이끄는 데 있다. 첫눈에 이 기획은, 마치 하양 위에 하양을 그리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앙리도 이 주장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본래적으로 탈-자에 낯선 삶이 원리상 모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가시화의 힘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떤 이론 안에서, 다시 말해 어떤 시각 안에서 그것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은 그 말 자체가 모순적이 아닌가?” 현상학의 현상성이 열 수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극단까지, 그 한계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일단의 현상학자들은 현상학의 제한된 엄격한 한계를 주장하는 현상학적 최소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상의 현상성의 탐구는 현상학의 내적 역사 안에서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연다. 왜냐하면 한 현상의 나타남은 한 사물의 이면처럼 항상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드러나는 것은 충족되어야 할 공허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현상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보이는 것과 보이는 않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그 둘을 연결하는 형이상학적인 방법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것의 결과로서 보이는 것으로의 이행하거나, 반대로 보이는 것에서 그것의 근거로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거슬러 내려가는 것이다. 그 방향이 어떠하든 간에 두 경우 모두 두 양태 사이의 변형의 연속성, 다시 말해 한 목소리를 가정한다. 이 한 목소리는 앙리가 현시의 본질에서 존재론적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이러한 동질성은 일단의 현상학 안에서 반복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같은 세계에 속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계 그 자체에 속해야 한다. 앙리의 전 철학적 노력은 이 존재의 한 목소리, 전체성을 반박하는 데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에게 보이는 것은 세계에서만 주어지며, 세계에로만 열린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것은 세계로 열리지 않으며, 세계와 더불어 세계를 형성하지고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이동을 전제하며, 이 두 항은 같은 하나의 동질적 현상성 안에 머문다. 메를로-퐁티가 “605이라는 날짜가 붙은 노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현재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시적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상관적이라고 할지라도 사물처럼 보일 수 없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러한 전통에 자신을 기입한다. “현재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사물의 감춰진 혹은 비-현실태적인, 즉 잠재적인 사물의 측면으로 - 저기(ailleurs)에 감춰져 있는 - 여기와 저기의 측면들이다.” 이것은 감각 경험(quale) 그 자체를 객관적인 현전에서 잠재적인 것(latence)으로, 다시 말해 명백하면서 어두운 감각의 이념으로 이해하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 진술은 감각적인 것의 가시성이라는 선험성에 의존한다. 이 모든 경우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의 이동은 상관적인 부정성(négation-référence), 즉 무엇의 제로(zéro de...), 보이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존재의 영역이라는 유일한 영역에 전적으로 속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같은 초월성의 양태일 뿐이다.”

이러한 전통은 후설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까지 이어지는 현상학적 전통 안에서 굳건히 유지된다.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 -현실태적인 것, 즉 잠재적인 것의 영역은 현대의 무의식의 개념과 조우하면서 이념의 역사 안에서 괴물 같은 혹은 위대한 발견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여기서 절대적인 깨어 있음, 지적인 명증성과 일치하는 현실태의 개념은 익명적이며 모호하고 어두운 삶에, 잊혀진 풍경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 후자는 의식에 의해 대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로부터 새로운 심리학이 아닌, 새로운 존재론이 시작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존재는 사유의 상관자로서 자신을 정립할 뿐만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사유 그 자체를 근거지우는 것으로 발견된다.” 이 존재의 구성하고 구성되는, 근거짓고-근거지어지는(fondant-fondé) 이 역설적인 구조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전 작품에서 드러나는 구조이다. 메를로-퐁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현상학의 한 가족과 대립해서 앙리와 레비나스, 더 나아가 데리다 그리고 블랑쇼로 이뤄진 다른 한 현상학적 가족은 이런 전통과 단절한다.

후설의 지향성의 함축적인 것, 잠재성의 지평은 주체의 상황, 즉 상황 안의 주체로 하이데거에 의해 세계-안의-주체로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지향성이 표현하는 사물들 곁에서의 의식의 현전은 하이데거에게 처음부터 세계 안의 역사를 지닌 초월성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함축된 지평의 개념은 마치 구성된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구성을 조건짓는 것처럼 드러난다. 존재자로 향하는 모든 사유는 이미 존재자의 존재 안에, 다시 말해 모든 자리를 결정하는 지평, 풍경을 밝히는 빛 안에서 유지되며, 이 빛은 이미 주체의 모든 자발성과 동기를 인도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노력은 바로 이 영역, 전통적인 철학의 객관주의 입장에서 보면, 주관적인 이 영역, “모든 객관적인 것보다 더 객관적인 이 주관적인 것의 영역을 탐색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재(Sein)라는 이름을 준다.

레비나스, 앙리 그리고 데리다의 철학적인 노력은 후설의 위대한 발견 - “지적인 명증성과 일치하는 현실태의 개념이 익명적이며 모호하고 어두운 삶에, 잊혀진 풍경에 의존한다는 사실” - 을 그들의 유산으로 해서 그것이 열어 보일 수 있는 그 한계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열린 듯이 보이는 지향성의 구조가 제한된 경제 안으로 다시 닫힐 때, 그들이 주목하는 잠재태의 영역은 현실태로 혹은 존재로 환원되어지지 않는 그 자신의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낮으로 이어지는 밤이 아니라, 표상을 기다리는 전-술어적인 영역이 아니라, 구성하는 지향성으로 환원되는 영역이 아니라, “또 다른 밤으로 열리는 어떤 영역, 현재로 환원되지 않는 한 번도 현재 해 본적이 없는 과거로, 밤으로, 심연으로 열리는 밤을 생각한다.

 

III.

 

프랑스 현상학의 풍요로움 안에서 세계와 그 세계가 함축하는 죽음 밖에서 인간을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물질 현상학의 가능성은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독일의 본질 현상학과 또 그것의 변형인 근본적인 존재론과는 다른 길을 연다. 자기 밖에서, 세계 안에서 사유하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와 구분되는, 레비나스, 블랑쇼, 데리다 앙리로 이어지는 한 현상학의 흐름이 그것이다 - 물론 이 흐름에 고유명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앙리이다. 이러한 흐름은 그렇다고 그들 서로 간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차이는 풍요로움을 나을 뿐이다.

사물이 자신을 우리에게 준다고 했을 때, 이 사물이 주어지는 방식은 언제나 대립의 양태로 주어진다. 다시 말해, 빛의 현상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줄 때, 빛은 그 빛을 드러내는 어둠을 전제한다. 실재가 드러나기 위해 그림자를 전제하는 것처럼, 검은 네모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흰 바탕을 전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흰 바탕에 검은 네모의 대립은 현상학의 모든 개념들 - 지향성, 지평, 초월성 등등 - 을 대신한다. 본질 현상학에 대립하는 의미로서의 물질 현상학은 그래서 말레비치의 하양 위에 하양처럼 - 앙리는 칸딘스키의 이름을 불러내기를 선호하지만 -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그려진다.

모든 지평의 배제, 모든 기투의 배제가 함축하는 것은 세계 안의 가능성으로 존재함이 없이 자기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주체임은 세계 없이 존재함을 말한다. 특히 죽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모든 주제에 종속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특히 하이데거의 죽음, 무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존재론적 의미의 함축의 거부를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세계--존재의 조건이며, 존재의 전이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세계, 이 둘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룬다. 레비나스와 앙리 그리고 데리다가 블랑쇼가 현상학적 세계 개념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 개념에 필연적으로 연루되는 이 죽음에 대한, 특히 헤겔과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하이데거에서 주체는 죽음에 의해서, 다시 말해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통해 세계--존재가 된다. 세계라는 개념은 단지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드러나게 하는 빛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물질 현상학자들의 세계의 거부는 몽상가의 꿈이 아닌, 사물들이 드러나는 지평으로서, 사물 뒤에 영사막으로서의 빛의 거부이다. 빛은 이미 그리스 이래로 그것이 자연적인 빛이든 보이지 않는 지성의 빛이든 사물을 밝히는 것으로 존재론적인 빛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빛을 받고 밖으로부터 온 사물은 결국 우리로부터 온 것이 된다. 사물을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허락하는 이 지성의 빛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형상이라고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다. 형상은 현상학에서 지향성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물이 드러나는 양태, 다시 말해 자기 밖에 사물을 정립하는 의식의 드러냄의 양태, 후설이 어떻게 안에서 드러나는 대상이라고 부른 것, 현상의 현상성, 어떻게는 현상학의 역사 안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서양 철학사 안에서 의식의 초월성의 양태로, 탈존(Ex-siste)의 양태로 드러난다. 이러한 드러남의 양태는 레비나스에게 그리고 앙리에게 하나의 망각을 의미한다. 이 초월성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성의 망각, 존재의 망각이 아닌 삶의 망각”. 세계의 거부로서의 물질 현상학은 결국 형상의 이면,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듯, 이면에 짝하는 정면이 없는 이면”, 앙리가 자기-현시, 자기-촉발, 혹은 자기-증여라고 부를 때, 세계로의 열림이 아닌, 자기(auto)로의 열림을 말한다. 형상의 이면 혹은 자기의 내재성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물질 현상학의 내기는 무엇인가? 세계를 초월성이 아닌 내재성의 근거지우는 것, 다시 말해 초월성의 가능성을 내재성의 근거짓는 것, 그것은 세계의 현실을 전적으로 세계--존재가 아닌 자기의 내재성과 관계시키는 것이며, 세계를 초월론적인 가상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앙리가 말하는 자기-정감성의 실질성(effectivité)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내재성과 외재성의 변증적인 종합으로서의 헤겔의 현실성(Wirklichkeit)이 아니다. 후자의 사유는 죽음을 삶의 궁극적인 의미로 기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헤겔주의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변증적인 인간에 대한 코제브의 헤겔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헤겔의 학은 전체적이고 변증적인 한 존재자로서의 이해되는 인간에 대한 기술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헤겔이 인간을 변증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유한한 자(mortel)"나타난다(apparaître)"는 것을 의미한다(현상학적 기획). 혹은 같은 말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연적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너머가 존재하지 않는, 즉 신을 위한 자리가 없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형이상학적 기획). 혹은 같은 말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 안에서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진리 안에서 행위일 수 있다(존재론적 기획).”

 

죽음, 세계 그리고 세계의 시간성은 유한한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다. 코제브가 유한주의(finitisme)’라고 부르는 것, 무신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유한주의는 칸트의 인식의 유한성(finitude)과는 구분해야 한다. 칸트의 유한성은, 마치 데카르트에서 유한한 자아 안에 무한의 이념이 열리듯이 무한으로 열린다. 이 무한은 세계의 체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닫힌 세계의 체계를 여는 것이다. 바타이유가 헤겔을 코제브와 달리 읽으면서 절대를 생각하는 것, 그가 새로운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 무한으로의 열림(무한 경제)은 절대적인 내재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레비나스가, 앙리가, 그리고 더 나아가 데리다와 블랑쇼가 열어 보이는 절대로서의 내재성의 정치적인 함축은 인간의 인간주의를 세계와 죽음과 세계의 시간화 밖에 기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계의 시간성 밖에 인간을 기입한다는 것은 새로움”, 한 번도 존재했던 적이 없는 새로움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측할 수 있는 미래로부터 오는 그런 새로움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삶 안에서 삶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형상의 이면에 속하는 인간, 즉 인간의 물질성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인종도,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다만 한 개별적인, 단독적인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을 처음부터 정치적 동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개인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수동성 안에서 드러나는 개별적인 주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의 법칙들은 다만 살아있는 주체의 법칙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들의 욕망과 충동들의, 그들의 성공한, 혹은 놓친, 혹은 결핍된 만족의 규정되지 않은 반복의 법칙, 즉 주체성의 원리 안에서 촉발된 역사의 법칙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앙리가 말하는 역사(l'historial)는 레비나스의 통시적 시간성(dia-chronie)과 혼동되는 것으로 삶의 정감성의 운동으로 변화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머무는 것은 따라서 보편적인 흐름 가운데에서 변화하지 않는 실체나, 강바닥의 바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의 역사(l'historial du l'absolu), 삶의 영원한 자기에의 도래이다. 이 도래가 도래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에, 머무는 것은 변화이다. 매순간 자기 밖으로의 틈의 열림, 즉 도망이 아니라, 자기-시련 안에서 그리고 이 시련의 내적 폭발로서 자기에 이르는 것이며, 자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성장이 있다. 그래서 머무는 것은 성장이다. 성장은 삶의 본질과 삶의 주체성에 의해 그리고 그것 안에서 완성되는 삶의 운동이다.”

 

, 그것은 머무는 것으로, 지나가면서 지나가지 않는다. 근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모든 것이 생성되는, 세계의 근원인 삶의 내적 본질 안에는 더 이상 탈-(l'ek-stase), 즉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앙리는 말한다. “이 말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에크하르트(Eckhart)어제 일어난 일은 나에게 만 오천년 전에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멀다라고 말했을 때, 이러한 삶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혹은 앙리가 죽은 자들과의 공동체를 말하면서 - 죽음의 공동체, 세계--존재가 아니라 - 키에르케고르가 그리스도와 공통된 존재, 그가 동시대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우리보다 그를 추방한 자들에게 더 어렵다라고 말했을 때 이 정신세계의 이상한 울림은 예감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존재”, 즉 죽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자들과의 공동체즉 삶의 정감성에 기초한 정신세계의 이상한 울림안에서 퍼지는 주체성의 철학은 레비나스의 타자”, 데리다의 유령”, 앙리의 과 함께 -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 사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갱신이라는 이름하에 세계와 존재의 현상학을 삶의 현상학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형상의 이면에서 인간을 상상하고 생각해 볼 수 이 가능성들 -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 - 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물질 현상학이 지닌 실천성이다. 물질 현상학이 말하는 형상의 이면은 그래서 익명적인 있음(il y a)”의 나열도 무관심한 차이도 아니다. 이러한 속성은 반대로 소위 차이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해지는 세계의 나타남이 가지는 것들이다.

 

“[하이데거에서] 차이 안에서 세계의 나타남은 나타나는 모든 것을 다만 차이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관심한(indifférent) 원리 안에서 그렇게 한다. 나타남은 나타나는 것을 사랑하지도 욕망하지고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보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타남은 나타나는 것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친밀성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빛이 부정의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자들을 똑같이 비추는 것처럼, 세계의 나타남은 그것이 비추는 것을,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것을 받아들임이 없이 끔찍한 중성성 안에서 비춘다. 희생자들이 있고(il y a), 가해자가 있고, 자선의 행위가 있고, 학살이 있고, 규칙이 있고, 예외들이 있고, 정확함이 있고, 바람, , 대지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앞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이것이 존재한다(Cela est)”, “있다(Il y a)”라고 말하면서 표현하는 존재의 궁극적인 방식으로 있다.”


세계의 나타남의 이 무관심성은 그것이 탈은폐하는 것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탈은폐하는 것에 실존을 부여할 수조차 없는 무능으로 인해, 하이데거가 모르지 않았던 이런 무능으로 인해 탈은폐는, 즉 진리는 탈은폐하고 발견하고 열지만그것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에게 세계의 무를 탈은폐하는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정감인 불안은 우리를 시간의 지평 안에서 - 미래 안에서 - 죽음으로 내 던질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모든 것은 무차별적이 된다고 앙리는 말한다. 이런 불안은 조용히 머물 수 없는(in-quiétude), 그로 인해 그로부터 깨어나는 그런 삶의 운동을 촉진하는 그런 불안도, 레비나스가 1942노트에서 우울한, 끝나지 않는, 어두운 나의 꿈은 망각의 강(레테)이 아닌 어떤 짓누르는 강물에 붙잡혀있다라고 적으면서 불러내는 라신느의 페드르의 하늘을 덮고 있는 조상의 무게도, 1852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에서의 18에서 맑스의 뇌를 짓누르던 악몽도 아니다. 그런 불안은 산자를 죽은 자도 불러내지 않으며, 죽은 자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도 않으며, 산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는다.

앙리가 물질 현상학의 마지막 장에서 어떤 감각적 지각에도, 어떤 지평에도 어떤 표상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제시하는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 중에 원초적인 시련안에서 산자가 죽은 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는 이러한 불안 없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앙리가 맑스의 자본을 읽으면서 맑스의 입을 빌어 하나하나 불러내는 개인들”, “이름들” - 살아있는 혹은 죽은 이들의 이름들 - 도 이 불안 없이는 절대로 불리어질 수 없을 것이다.

 

윌리암 우드, 아홉 살, 그는 일곱 살 열 달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의 일은 건조기로 항아리를 나르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공장에 와서 저녁 9시까지 일을 했다. 뮤레, 열두 살 아동,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나는 틀을 나르고 기계를 돌리는 것이다. 나는 아침 6, 때로는 4시에 집에 돌아온다. 밤을 새우고 아침 8시까지 일하기도 한다. 나는 며칠째 잠을 자지 못했다라고 진술한다. ...페니우, 열 살 아동, ...압슨, ...튜너, ....에드워드 테일러... 윌리암 스미스... 헬리 마튜만, 열일곱 살, ...”

 

맑스가 불러내는 이 고유명들은 하늘을 덮고 있는 페드르의 조상들처럼 피할 수 없이 그의 뇌를 짓누르던 악몽이며, 그의 유령들이다. 그것은 앙리의 것이면서, 데리다의 것이면서, 레비나스의 것이면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앙리는 이 고유명들이 단지 자본주의의 잉여창출의 논리, 일반적인 법칙을 밝히기 위한 사례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 설 것이라고 말한다. 맑스가 열거하는, 끝나지 않는 이 이름들, 사례들, 이야기들은 과학의 실재가 아닌, 형이상학적인 원리로서 삶의 실재이다. 바로 여기서, 맑스의 자본의 전 체계와 이론 안에서 마치 부록처럼 들어가 있는 이곳에서, 앙리는 맑스의 사유가 서양 철학사 안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자리를 발견한다. 맑스의 헤겔에 반한 논쟁은 이념성의 지배에 균열을 만들고, 지식의 벽에 열린 이 균열을 통해서, 살아있는 자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무리로 되돌아 온다고 앙리는 말한다.

이 돌아오는 영혼들은 세계 안을 떠돌면서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 우리집에 불법이민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페스포드가 없다.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불러냈던 앙리의 은밀성의 삶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질문이다. 이 질문 안에서 우리는 산자들과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철학자와의 정감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죽은 자를 땅을 묻지 않는다. 그는 우리 안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으로, 기억으로 와서 우리 안에, 유한 안에 질문으로 자리한다



*<물질 현상학>의 역자 후기의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