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육화, 살의 철학, 삶의 계시와 세계의 나타남

aurorepark 2013. 1. 24. 22:20






미셸 앙리, 육화, 살의 철학』이 지난 23일 출간 되었다. "역자 후기"를 옮겨 놓는다. 

 

삶의 계시와 세계의 나타남


미셸 앙리의 육화, 살의 철학은 그의 후기 철학, 보통 기독철학 3부작ㅡ『내가 진리다(1996), 육화, 살의 철학(2000), 그리스도의 말씀(2002)이라고 불리는 것 중의 하나로. 그 책이 출간되었을 때 프랑스 철학계와 종교계의 반응은 마르크스(1976)가 출간되었을 때와 그 상황이 아주 유사했다. 그의 마르크그에 대한 테제가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난을 다른 한편 철학자들의 무관심에 버려진 것과 유사하게, 육화, 살의 철학은 정작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환대를 받기보다 신학적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평가받고, 다른 한편 철학계에서는 현상학의 신학적 전향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앙리 철학에 대한 무수한 오해와 그 수용의 어려움은 한 철학자가 말하듯, 또 우리가 앙리를 직접 읽으면 바로 느낄 수 있듯이, 그의 철학의 본질적 특징, 그의 철학의 근본성radicalité’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철학의 근본성은 그 근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서, 그 근본성이 그 본성상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의해 감탄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적인 사유를 통째로 뿌리 뽑고 그 근본에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쉽게 그의 철학을 수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을 통째로 뿌리 뽑는다고 상상해 보라! 오랜 시간 그 사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유가 뿌리 내리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철학적 수용의 문제는 레비나스도 똑같이 겪은 것으로, 앙리나 레비나스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글쓰기가 우선 우리 안에 즐거운 철학적 경이(tauma)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지식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의 기원으로서 자신의 무지의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놀라움이 아니라폭력 같은 트라우마(trauma)”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타우마와 트라우마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거울 앞에 선 자기라면, 후자는 자기와의 어떤 거리도, 조금의 간격도 가질 수 없는 자기에 전적으로 몰린 상태를 지시한다. 이 둘은 앙리에서 하나는 세계의 나타남으로 다른 하나는 삶의 계시로 말해진다. 이것은 앙리가 현시의 본질에서 고전적인 현상학을 존재론적 일원론으로 비판하면서 획득한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원리로 나타남의 이중성”, 결국 현상학적 이중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미 앙리는 이 원리를 마르크스 철학에, 그리고 야만에서 문화에, 그리고 칸딘스키를 읽으면서 예술에 적용했다. 이제 이 이중성은 육화, 살의 철학에서 신체corps’chair’의 나타남의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객관화가 가능한 우리의 신체와 주관적으로만 느껴지는 고통의 살은 고통이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자기와의 어떤 거리도 없이 전적으로 자기에 몰려있다. 이 두 종류의 나타남의 관계는 토대적인 관계로, 세계의 나타남은 전적으로 삶의 나타남에 의존한다. 앙리의 근본성은 전자는 아무것도 아니고rien 후자는 다tout라고 말하는 국면에까지 이른다. 이 토대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이행도 없다. 다시 말해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으로, 혹은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근본성은 육화, 살의 철학2살의 현상학에서 3육화의 현상학으로 필연적으로 넘어가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육화, 살의 철학의 출간을 앞두고 있었던 한 대담에서 앙리가 말하듯, 이 책이 그의 철학적 전개의 단계에서 변한 것이 있다면, 우선 용어들의 변화이다. 이 책이 신체와 살의 차이와 그 관계를 다루는 한에서, 특히 그의 공식적인 출판과 상관없이 그의 글쓰기의 순서에서 그의 첫 저작인 멘느 드 비랑의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의 심화인 한에서, 멘느 드 비랑의 철학적 언어들이 복음서와 교부들의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 후기의 저서는 그의 최초의 저서의 심화, 더 나아가 그로부터 전개된 그의 전 철학, 우리가 물질 현상학근본적인 현상학적인 실체에 탐구이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용어의 변화는 자니코가 말하듯 현상학으로부터의 이탈혹은 현상학의 변질이 아니라, “현상학의 완성, 더 정확히 물질 현상학의 완성을 의미한다.


앙리가 말하는 현상학의 완성의 의미는 그의 "현상학적 이중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현상학이 세계의 현상학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는 순간에 세계의 현상학이 삶을, 자신의 초월론적인 삶을 파악할 수 없었을 때, 현상학적인 봄이 자신의 봄을 볼 수 없었을 때 부딪친 아포리아는 그 현상학의 토대로서 삶의 현상학에 의해서만 극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앙리가 말하는 현상학의 완성은 그 전 단계로서 현상학의 전복renversement 혹은 현상학의 전회retournement를 전제한다. 현상학의 전회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써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에게 삶에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유가 자기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을, 그리고 결국 사유가 매번 자기인 바의 것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삶, 思惟의 자기-계시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전회는 앞선 것에 대한 인정이며. 현상학의 전복은 사유에 앞서서 오는 것을 이해하는 사유의 운동이다. 그의 물질 현상학과의 연속선상에서 삶의 실체삶의 현상학적인 물질, 후설이 인상”, 더 나아가 본래적인 인상Urimpression”이라고 부른 것은 이제 최초의-자기인 최초의-살 안에서, 즉 말씀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정념적인 자기-증여로 말해진다.


이 최초의-, 삶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앙리는 이 책에서 우선 그의 지속적인 주제인 고전적 현상학의 전복(1)을 다루고, 이어서 살의 현상학(2), 그리고 살의 현상학의 극복으로서 육화의 현상학(3)을 다룬다. 여기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전l'Avant”에 대한 질문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살 안에 도래를 밝히는 일종의 살의 고고학인문학의 고고학이 아니라이다. 그래서 육화, 살의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살의 현상학, 자아의 현상학이 아니라, 육화의 현상학, 자아 이전의 현상학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자아가 자아로 도래하는지, 삶이 살 안에 도래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근본적인현상학을 제시한다.


근본적인 현상학은 따라서 우리의 삶에 앞서서 오는 것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 안에 이미존재하는 것에 의존한다. 바로 여기에 고고학의 의미가 자리한다. 미셸 앙리의 말대로 이런 강독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주체 이전, 자아 이전에 대한 탐구, 살 이전avant la chair”에 대한 책이다. , 그것은 내재성이며, '살아있는 자 '안의 현전présence-dans'으로, 살아있는 것le vivant 안에는 삶의 흔적들이 아니라, 절대적인 삶이 있다. 이 부분은 그가 서문에서 고전적 현상학과 다른 레비나스의 현상학의 '예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삶이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것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에 앞서 온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le vivant, 그 자신 안에 존재하기 전에, 자기-증여auto-donation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그의 테제이다.


여기에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수동성이, 모든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어떤 살아있는 자도 스스로 자기 자신 안에 도래할 수 없기때문이며. 어떤 힘pouvoir,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우리의 일상의 움직임일지라도 그 자신으로부터 올 수 없다(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스스로 자기에 도래하는 이 절대적인 삶/생명의 자기-증여 밖에, ‘사랑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앙리는 삶은 이유가 없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 자기를 현시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인 바의 것이기 위해 삶이 의존하는 어떤 자기 밖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며, 삶은, 또 왜 삶은 그것인 바의 것인지를, , 어떤 목적으로 그것은 삶인지를 물어야 하는 어떤 자기 밖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의 자기 정당화로 삶이 매번 자기를 느끼고 견딜 때, 삶이 모든 상황에서 지속하고, 고통과 불행의 절정에서도 지속하는 한에서, 삶이 스스로를 인증하는 것이다.


이 전언은 앙리가 500쪽에 달하는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유일한 전달이다. 앙리가 가장 단순한 것들의 진리하고 말하는 전언은 앙리가 고백하듯이 때때로가장 단순한 것은 때때로 가장 어려운 것이기에아주 어렵게, 힘들게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