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앙리가 2000년 <육화, 살의 철학> 출간 이후, 잡지 Communio n° 25-26에 실었던 글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육화’라는 말은 우선 신체corps 혹은 살chair을 소유한 존재의 조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체와 살은 같은 것인가? 그것은 현상학적인 토대로부터만 밝혀질 것이다. 현상학적 토대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은 토대로서 ‘순수한 나타남l'apparaître pur’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순수한 나타남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모든 나타남을 나타나게 하며, 그것에 앞선다. 그래서 현상학은 현상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이 현상들의 본질, 즉 이 현상들을 현상이게 하는 현상성을 연구한다. 현상학의 용어들ㅡ드러냄, 순수한 현시, 계시, 진리ㅡ은 또한 철학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타남'에는 근본적인 두 양태의 나타남,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다른 두 현상성ㅡ세계의 나타남과 삶의 나타남ㅡ이 있다. 우선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외적인 것으로, 타자로서, 차이로서 드러난다. 이 사물들ㅡ존재자들ㅡ의 속성들은 사물들 각각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만 그것들이 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순수한 나타남에서 이해된 세계는 자기 밖에서, 다시 말해 외재성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밖에서 발견되며, 우리 앞에 우리 밖에서 ‘대상’으로 혹은 우리에 ‘대면’해서 주어진다. 세계의 나타남에 의존하는 사물은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신체, 우리의 고유한 신체이다. 신체와 같은 것은 그래서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신체는 ‘외적인 신체’이다. 현상학적인 ’세계‘의 개념은 사물들, 존재자들 혹은 신체들의 총합이 아니라, 그것들의 나타남의 양태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하이데거가 “탈자Ekstase”라고 부르는 수수한 외재성의 이 지평의 열림 안에서 스스로 발광發光하는 동물처럼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래서 이 “바깥(탈자)에 의한 밖의 도래”는 빛의 공간을 산출하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ㅡ그것이 감각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ㅡ은 비로소 가시적이 된다.
그런데 삶 안에는 나타남과 이것이 나타나게 하는 것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순수한 현상성과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없다. 이 현상성과 현상의 이 기이한 동일화가 산출되기 위한 조건은 다만 이 삶이 전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즉 순수한 현상성으로 이해될 때에만,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현상성을 가능하게 하는 이 현상성이 스스로 현상화되는 가장 본래적인 양태로서 이해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화는, 삶의 현상화의 양태가 세계의 나타남의 양태를 근거 짓는다고 할지라도, 전자가 후자와 전적으로 다를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전자의 나타남을 계시révélation라고 부른다.
삶의 계시와 세계의 나타남은 어떻게 대립되는가? 세계의 나타남이 자기 밖에서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그래서 그것이 탈은폐한 것이 모두 외적이라면, 삶의 계시는 그 자신 안에서 어떤 간격도 자기와의 어떤 차이도 가지지 않으며, 자기 자신만을 계시한다. 삶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다. 삶은 자기-계시auto-révélation이다. 계시의 작업을 완성하는 것은 삶이고, 삶이 계시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삶의 계시는 그것이 계시하는 것과 하나이다.
이러한 상황은 삶이 있는 어디에서나, 그것의 가장 단순한 양태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통증을 고려해보자. 통증은 우선 보통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체적 통증으로 객관적인 신체와 관계한다. 여기서 이 통증에 대해서 환원을 수행해 보자. 모든 외적인 조건을 제거하고 수수하게 느껴지는 고통만, 그것의 순수한 인상만을 고려해보자. 이 순수한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계시된다se révèle soi-même”. 이것은 고통만이 우리에게 우리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계시 안에서 계시된 것은 고통의 사실과 다른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이다. 이 고통의 자기-계시 안에는 세계의 “자기 밖”은 부재한다. 여기서는 어떤 간격도 고통을 고통 그 자체와 분리하지 않으며, 고통은 전적으로 자기에 몰려있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무게에 짓눌려 있다. 고통은 자기에 대해서 어떤 후퇴도, 어떤 도망도 불가능하다. 고통과의 어떤 거리를 취할 수 없음 안에, 한 시선이 고통으로 향할 모든 가능성이 제외된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쾌락을 자신의 즐거움을 본적이 없다. 고통, 이 인상은 모든 인상들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이다.
비가시적은 부정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전혀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다시 말해 세계로부터 그것의 결핍 혹은 부정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에 전적으로 낯설며, 전자는 후자에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다. 비가시적인 것은 가장 원초적이며 긍정적인 양태를 지시한다면, 인상은 인상적인 직접성 안에서 자기에 대해서 극복할 수 없는 수동성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딜 뿐이다. 그런데 한 인상이 계시되는 것은 절대로 자신의 힘에 의해 그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인상이 자기 자신 안에서 놓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다만 절대적인 내재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수하는 삶의 자기-촉발 안에서이다. 이 자기-계시 안에서 각각의 인상은 수동적으로 자기를 느끼고 견딘다. 이때, 자기-계시는 어떤 개별적인 인상에 속한 한 속성이 아니라, 모든 인상과 관계한다. 따라서 모든 인상은 하나이며 같은 삶의 변화하는 양태들일 뿐이다.
이 항상 변하는 인상들 전체는 다름 아닌 우리의 '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살은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이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살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의 인상들처럼 삶 안에서만 가능하다. 자기-계시 안에 내재적인 삶의 단일성은 모든 인상들의 단일성과 동일하며, 이것은 정확히 모든 인상들을 하나이며 같은 살로 만든다.
따라서 본래적인 현상학적인 이원성을 따라서 신체와 살이 대립한다. 신체는 자기 자신을 현시하는 힘이 없으며, 자신의 현시를 세계라는 자기 밖에 요구하며, 현상학적으로 세계적 신체라는 이름으로 현상학적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의 직관적 형식과 범주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반면 살은 삶의 자기-계시의 과정 안에서 스스로 각인되고, 삶으로부터만 자기-계시를 유지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신체는 살이 삶과 다르지 않은 곳에서 도래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살이 삶 안에 도래로부터 획득하는 속성들에 대해서 질문하기에 앞서서, 신체와 살이라는 이 두 실재의 관계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계 안에서 신체는 한편으로 기하학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를 가진 연장된 신체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세계적 신체는 다만 연장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적 신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상적 조직texture을 가진다. 그것은 빨갛고 어둡고 소리가 나고, 구역질을 일으키기도 한다. 갈릴레이의 본질적인 분석과 이것을 밀랍의 분석에서 다시 취한 데카르트의 분석에 의하면, 연장된 신체는 그 자체 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가지지 않은 것으로 아름답지고 추하지도 즐거움을 주는 것도 불쾌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감각적이고 가치론적이고 정감적인 층들은 신체의 탈자적 구조와 다른 곳에서 온다.
따라서 모든 감각적 신체는 이것을 가능하게 다른 신체를 요구한다. 그것은 초월론적인 신체로 세계의 대상적 신체le corps-objet가 아닌 주관적 신체le corps-sujet이다. 더 이상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아닌 이 원리로서의 초월론적인 신체의 나타남의 양식은 무엇인가?
현대 현상학에서, 특히 후설과 메를로-퐁티에서 초월론적인 신체의 본성은 세계의 지평 위에서 밝혀지며, 이것에 종속된다. 이 신체는 물론 지각의 대상에 환원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지각을 연다. 이 신체적 주체는 고전적인 사유의 오성을 대체한다. 이 초월론적인 신체가 우리를 세계로 던지는 지향적 신체로 이해되는 한에서, 다시 말해 바깥의 밖의 도래와 더불어 현상성이 솟아나게하는 보여줌faire-voir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현상성과 그것에 의존적인 신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화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의 신체는 이중적인ㅡ세계 안에 자리하는 대상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탈자적 나타남 안에서 세계에 열리는 것으로서ㅡ의미에서 세계로부터 이해된다. 우리의 신체는 세계에 속하며,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종속된다.
우리에게 색깔, 소리, 냄새 등등을 주는 초월론적인 신체의 수행은 우리의 감각기능sens의 수행들이다. 이 “먼 감각기능sens du lointain”은 우리를 사물들과 결합하며, 다만 사물들 안에서 세계의 탈-자의 초월성이 작동하는 한에서만 우리를 사물들과 결합시킨다. 바로 여기서 신체에 대한 모든 세계적 이론의 아포리아는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 막는다. 세계의 자기 밖에서는 삶의 내재적인 자기-계시 안에서만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인상도, 살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신체는 세계로 향할 수가 있다. 즉 일단의 지향성은 사물들의 감각적인 성질로 자기를 넘어서 갈 수 있다. 우리의 다양한 감각기능들의 초월론적인 신체의 수행들은 삶의 자기-증여 안에서만 지향적으로 자기 자신을 완수하고, 그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감각기능들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수행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작동으로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자신을 인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감각기능들은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가?
이 아포리아는 현상학적인 지향성의 아포리아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지향성 그 자체는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초월론적인 삶을 익명으로 넘기면서만 이 무한소급의 순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것 이상의 것이 있다. 우리의 초월론적인 신체는 절대로 감각기능들의 합에 제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기능들은 사물들로 향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데에 한정되지 않는다. 신체는 또한 내재적이고 본래적인 운동의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우리의 감각기능들의 실질적인 실천에서 우리의 감각기능들의 운동만이 아니라. 신체는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게 세계 안에서 외적으로 우리의 손의 객관적인 이동은 그 자체 안에서 자신의 운동의 완성 안에서 자기 안에 머무는 파악의 힘의 자기 운동이다. 다시 말해 삶의 인상적인 자기-증여 안에서 자기에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주의를 가지고 우리의 초월론적인 신체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지향적 신체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 지향성 그 자체 안에서 모든 외재성이 배재된 원초적인 자기-인상성을 전제한다. 이 조건에서만 아주 사소한 힘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만일 우리 신체의 모든 힘들이 삶 안에서만 행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자신 신체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화의 전적인 전복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우리 신체의 본래적인 실재를 정의하는 것은 이 세계에 자리하는 우리의 세계적 신체가 아니라, 우리의 살이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힘들은 자신의 자리를 가지며, 이것은 우리가 신체에ㅡ우주의 감각적 신체에, 감각적이고 객관적인 우리의 고유한 신체에, 또 지향적 신체 그 자체에ㅡ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살이 우리에게 이 신체에, 그리고 세계의 신체들에 접근을 주는 것은 다만 우리의 살이 우선 자기 자신에 접근을 줄 때에만, 우리의 살을 인상적으로 만든 자기-증여가 성취되는 거기에서, 즉 삶 안에서 그리고 삶에 의해서 인상적으로 주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최초의 질문으로, 더 이상 우리의 세계적 신체의 성격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이 삶에서 유지되는 본질적인 현상학적 속성들을 검토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삶인가? 더 이상 인상들과, 그것들로 이뤄진 살은 스스로 자기 자신 안에 도래하지 않는다s'apporter elles-mêmes en soi(스스로 자신을 자신 안에 가져오지 않는다). 이것들은 삶의 자기-증여 안에만 자기에 주어진다. 더 나아가 이 삶, 우리의 삶은, 이 삶을 삶으로 만드는 자기-증여를 스스로 완수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삶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도래할 수 있는 능력이 지닌, 자기-계시의 과정 안에서 스스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절대적인 삶만이 어딘가에 삶을 존재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삶들을 살게 할 수 있다. 절대적인 삶의 속성들만이, 사실적인 속성들이 아니라, 이 자기-생성의 과정 안에 포함된 초월론적인 가능성들로서 이 속성들만이 모든 종류의 삶의 현상학적인 속성들을, 가까이는 우리의 살의 본질적인 현상학적 속성들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삶la Vie이 자기에 도래하는 이 절대적인 과정을 질문해야 한다. 사는 것vivre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s'éprouver soi-même”이다. 따라서 자기성Ipséité은 그 원리상 삶이 자기에 도래하는ㅡ삶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면서, 자기에게 계시되면서 자기 자신을 낳는ㅡ이 절대적인 과정에 속한다. 이 자기성 없이는 어떤 자기 시련/경험épreuve도 가능하지 않다. 삶la Vie이 절대로 개념이 아니고 실재적인 삶인 한에서, 다시 말해 현상학적으로 실질적인 한에서, 삶은 자기를 느끼고 견딘다. 이 자기성은 실재적인 자기Soi réel이며, 이 최초의 살아있는 자기le Premier Soi Vivant 안에서 삶la Vie은 자기 자신에, 자신의 말씀에 계시된다. 삶의 말씀인 이 자기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가능성에 속하며, 이 자기는 또한 모든 가능한 삶에 속한다. 따라서 자신 안에 자기를 지니지 않은 살은 없으며, 이 살의 증여 안에 함축된 이 자기는 이 살의 자기로 발견된다. 마치 이 살이 이 자기의 살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살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 기쁨이 아닌 기쁨,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 ‘인상’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왜 삶의 자기-증여는 우리 안에, 다시 말해 우리의 유한한 삶을 입고 나타나는가? 또 인상은 다양한 인상의 살을 가지고 나타나는가?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살의 모든 성질들은 삶으로부터 살에 오는 것이라고, 결국 존재하는 유일한 삶인 절대적인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떤 삶도 절대적인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분리되는 경우, 삶은 더 이상 자기를 느끼고 견디기를 그치며, 삶은 더 이상 살기를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삶은 자기 안에 도래해서 우리의 살과 그 살의 모든 속성들의 기원이 될 수 있는가?
"삶의 고유한 내재성 안에서"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삶의 자기-계시의 내재성 안에서, 그치지 않는 자기-촉발 안에서 자기 안에 머물기 때문에, 이 속성들 또한 절대로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우리의 살의 속성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삶의 파괴할 수 없는 피륙은 어떤 단절도 없다. 다만 우리의 살의 내재성은 스피노자처럼 사변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 이것은 현상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직접 느까고 견디는지, 그래서 우리의 살의 내재성은 우리 안의 절대적인 살의 계시와 다른 것이 아닌지, 또 절대적인 삶이 우리의 살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방식은 결국 우리의 살이 이 삶 안에서 견디고 느끼는 것인지를 기술해야 한다.
어떤 거리도, 어떤 간격도 없이, 어떤 매개도 없이 자신의 본질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정감성 혹은 정념 안에서, 모든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정감성에서, 혹은 나의 정감성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삶의 정감성 안에서 주어진다. 그런데 절대적인 삶이 자기에 도래하고 자기를 느끼고 견디고, 자기를 향유하는 이런 정감성은 '사실'도 '상태'도 '속성'도 아니다. 그것은 그치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일어나는 과정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가능성이다. 이 영원한 과정 안에서 이 삶은 자기를 영원히 느끼고 견디며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영원히 이 삶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며 자기를 사랑한다. 이 최초의-가능성은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Archi-passibilité'이다. 이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의 현상학적인 실행은 다름 아닌 절대적인 삶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이다. 이 본래적인 정감성 안에 모든 자기-촉발과 모든 가능한 삶이 자리하며, 결국 그 안에 살이 존재한다. 다만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우리의 삶은 스스로 이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정념적인 현상학적 실행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져올 수 없는 무능impuissance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수동적으로 이 절대적인 삶의 이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 안에서 자기에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살은 살일 수 있다. 우리의 살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 안에서이다. 그 안에서만 우리의 살의 고통은 가능하다. 우리의 살은 이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유한한 우리의 삶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은 그것의 가능성을 무한한 삶의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으로부터 끌어낸다.
우리의 살이 삶으로부터 유지하는 현상학적인 속성은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적 속성들 혹은 집단적 속성들이ㅡ비록 이것들이 본질적이라고 할지라도ㅡ아니다. 살이 삶으로부터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살의 조건 그 자체,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살의 순수한 현상학적 실체를 구성하는 고통을 견디고 향유하는 자기-인상성이다. 그런데 자신의 살의 조건을 삶으로부터 취하는 이 살은 절대로 인상들 혹은 특수한 감각들의 다수성에 제한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힘들pouvoirs의 합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미 이 후자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기획의 변경을 요구했다. 우리 살의 어떤 힘도 자기 안에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 한에서, 그 자신의 힘과 독립적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에 이르는 한에서, 이 힘들 각각은 자신 안에서 그가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는 것에, 절대적인 힘이-아님un non-pouvoir에 부딪친다. 왜냐하면 각각의 힘이 살과 같은 자격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은 다만 절대적인 삶의 잠재력puissance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피라트가 그리스도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석방할 수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대답을 안다. “그 힘이 저 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떤 힘도 자지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9: 10-11).
이 '위로부터의 증여', 삶의 최초의-증여는 그 자신 안에 모든 삶의 자기-증여가 자신의 최후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최초의-가능성을 지닌다. 이 최초의-증여 안에서 모든 힘에 주어진 것. 이 '힘의 힘le pouvoir pouvoir은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모든 힘을 진정하고 자유로운 힘으로 만드는 이 자기-증여가 유지되는 최초의-증여가 그 자체 자신의 현상학적 실행을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가능성 안에서 끌어내는지를 알 수 있는가? 모든 힘의 힘을 구성하는 이 자기-증여는 그 자체 자신의 현상학적인 물질을 정감성 안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현대철학에서 탁월한 두 분석은 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는 멘느 드 비랑의 코기토에 대한 "나는 할 수 있다"에 대한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키르케고르의 "절망"에 대한 분석이다. 전자에서 모든 정감적인 행위가 노력이고, 모든 노력이 "노력의 감정"인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할 수 있다'의 현상학적인 가능성은 정념pathos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현상학적인 조건으로서 정감성에 대한 근본적인 직관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에로티즘과 죄의 이론은 힘의 실행이 아니라, 힘의 가능성으로서 파악된 궁극적인 현상학적인 조건으로서 불안의 개념ㅡ"힘의 불안한 가능성"ㅡ에 의존한다.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가능성은 우리가 필요할 때 불러내는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유지되는 곳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절대적인 삶의 과정 안에서 삶은 자기에 이르고, 이런 과정의 현상학적인 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자신의 정감적인 자기-인상성 안에서 우리의 살은 그 자체 이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의 가능성을 수여받는다. 이것이 모든 살의 현상학을 근본적인 의미에서 육화의 현상학으로 이끈다. 육화는 인간과 관계된 모든 문제, 예를 들어 신체의 문제, 살과의 관계, 이 살이 개입하는 모든 행동들, 정감적인 동기를 가진 행위 일반 등과 더불어 단순히 인간의 살적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화는 더 이상 단순한 사실성facticit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 안에 도래, 다시 말해 살이 도래하는 과정을 지시한다. 그 '과정'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유한성의 수동성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육화는 필연적으로 이 과정으로, 최초의-고통을 견딜 수 있음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증여로 보내진다.
따라서 “살 이전”, 육화 이전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살은 살아있는 자의 본질적인 다른 규정들과 이상한 친근감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삶의 최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음과의 관계에서 살의 이 이차적인 상황은 정확히 살아있는 자의 자기(자아ego, 나moi)의 상황과 유사하다. 모든 경우에,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지성ㅡ살아있는 자, 그의 자기성, 그의 살 ㅡ은 그들에 앞선 기원에 영역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절대적인 삶 안에 삶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절대적인 삶이 자기에 도래하는 자기성 안에 자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정념적인 삶으로서, 삶이 자기에 대한 본래적인 향유 안에서, 사랑의 삶une Vie d'amour인 것처럼, 절대적인 자기의 삶의 도래가 완수되는 최초의-고통받을 수 있음 안에 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원의 영역은 정확히 우리가 고려하는 모든 실재들 각각에 동일하다.
“자기 이전”과 “살 이전”은 “삶의 최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지시하면서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이 후자 안에서 삶은 자기의, 모든 생각가능한 자기의 자기성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모든 살은 자기에 결합하고, 어느 날 인간의 조건 위로 던져진다. 만일 이 같은 정념적인 시련이 자기를 자기로, 살을 살로 만든다면, 전자의 자기성(자기)과 후자의 자기-인상성(살)ㅡ 자기와 살은 함께이며, 인간은 이 살아있는 살적인 자기이며, 우리는 전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신체 주체와 객체 등의 결합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다.
삶의 최초의-고통을 느낄 수 있음 안에서 밝혀지는 인간의 조건은 세계로부터는 절대로 설명되지 않는 우리의 조건으로, 이것은 놀라운 요한의 서언에서 발견된다. '말씀'이 있다는 사실은 두 번,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 한 번은 삶/생명la Vie과의 관계에서, 두 번째는 살과의 관계에서 말해진다. 이 이중적인 관계는 그리스적 사유를 전복한다. 삶과 로고스의 관계는 그리스적 사유 안에서는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된다. 인간은 로고스에 의해 동물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이성, 말하는 능력, 즉 이념과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시한다. 로고스는 세계 혹은 자연의 나타남에 의존하고 그것과 동일시된다. 우리, 인간은 사물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에 다양한 술어들을 부야한다. 서양의 사유는 로고스와 살아있는 것 사이의 특수한 차별화를 발견하고 극복할 수 없이 그 안에 갇힌다.
이러한 어려움은 기독교와의 충돌 안에서도 나타난다. 기독교는 이러한 아포리아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로고스가 더 이상 세계의 로고스가 아니고 삶의 로고스인 한에서, 또 그들의 신체의 개념화가 더 이상 세계적 신체가 아니라 삶 안에 도래하는 살인 한에서, 또 궁극적인 신의 말씀인 삶의 이 로고스 안에서 도래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살이 되었다". 말씀 안에서 신의 자기-계시의 과정(요한에 의해 '삶/생명'이라고 정의되는 것)은 그 완성terme으로서 말씀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난다. 마치 그 안에ㅡ"처음에"ㅡ과정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진술, 살과 같은 어떤 것이 말씀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최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음 안에서 각인된다. 만일 살이 자신의 가능성의 궁극적인 조건을 삶의 말씀 안에서 끌어낸다면 말씀의 육화는 사물들의 근저에 뿌리를 내린다. 반대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살의 능력이 근거지어진다. 이레네오는 “신은 살을 살게하며, 살은 신에 의해서 살며, 살은 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포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의 육화는 필요한가? 그것은 죄 없이 일어날 수 있는가? 모든 유한성은 무한을 전제한다. 무한은 반대로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도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의 무상의 행위이다. 그런데 말씀의 육화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도래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이 되는 말씀은 신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창조되었고, 다만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낯선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살, 우리의 자기의 자기성, 우리의 삶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이 진흙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었을 때, 그 진흙을 우리들 각각 인간의 살아있는 살적인 초월론적인 자기로 만들었을 때, 인간 안에서 그의 신체는 다만 물질, 먼지였다. 그런데 그의 살 전체는 삶이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의 살적인 자기성 안의 도래는 삶의 내적인 생성에 속한다. 이 생성으로부터 이해된 육화는 우리가 창조를 이해하는 것을 허락한다. 창조 안에서 삶의 정념적인 밀착과 세계 안에서 외재화의 과정의 분리는 창세기가 요한복음 1장의 탁월한 빛 안에서 밝혀지면서 가능해진다.
어떻게, 육화ㅡ그리스도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을 따라서, 또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이어서 교부들과 기독교에 의해 반복된 이 주제ㅡ는 신의 계시가 되는가? 그것은 예측하지 못했던 최초의-지성체로부터 일어난다. 만일 육화가 더 이상 순진한 방식으로 불투명한 신체 안에 도래로서 이해되지 않고, 현상학적인 살 안에 도래로 이해되는 한에서, 또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유한성의 고통받을 수 있음 안에서, 이 살이 항상 변화하는, 결국 동일한 인상들의 놀이를 따라서만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이 자기 안에 자기-인상성 안에 삶이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에 영원히 밀착하는 최초의 고통받을 수 있음 안에 도래하는 한에서, 이때 모든 살은 살의 밤 한 가운데에서 우리를 보는 신의 눈이다. 그리고 모든 살은 판단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부들은 살은 상실의 장소이면서 구원의 장소를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살의 상실은 살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살을 쾌락의 원리로 삼으면서,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며, 말씀 안에서 살의 생성 안에서 자기에 주어진 살의 구원은 살 안에서 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최초의-지성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작동하는 계시의 힘은 우리의 봄, 명증성의 형식에ㅡ그것이 감각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ㅡ전적으로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봄은 정합적으로 감각적인 봄을 파악하는 그리스의 눈을 가능하게 한다. 이 지식의 정도들은 다양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유들genres로 정리할 수 있으며, 그것들의 정합성을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이 철학자의 지식이다. 그런데 계시의 힘이 살에 맡겨진다는 것, 그리고 이 계시의 살적인 힘이 절대의 힘이라는 것, 또 누구도 그를 더 즐겁게 할 수 없는 특권처럼 모든 살아있는 자들에 부여된 삶의 정념은 그가 선택된 자라는 징후이며, 삶의 실재의 징후라는 것, 이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 꺽을 수 없는 계시는 그 안에서, 위로부터 온 증여 안에서 주어진 우리의 살의 비가시성 안에, 우리의 인상들 하나하나에, 그 힘들 각각에 불의 문자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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