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까지 키르케고르를 직접,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 읽어 본 적은 없다.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의 글이 던지는 분위기가 나를 그로 이끌지 않않기 때문이다. 검은 담즙을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은 그의 글을 읽기에는 나의 감성이 너무 마르고 차가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를 통해서, 또 레니나스를 통해서, 그리고 이 번에는 앙리를 통해서 그를 읽었다. 이 번의 읽기는 이 전과 같지 않다. 이 전에 나의 읽기가 그를 안 읽어도 되는 ‘핑계’를 제공했다면. 앙리는 그 반대로 그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했다. 이유와 핑계는 서로 아주 가깝지만, 아주 멀다.
앙리의 키르케고르 읽기는 키르케고르를 한 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쪽으로 그를 비판하는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와 달리, 전적으로 키르케고르에 자신을 기입한다. 아니 더 정확히 키르케고르를 자기화한다. 이로부터 앙리의 키르케고르 읽기의 편협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나의 글쓰기의 주제가 아니다. 나는 정확히 앙리가 사유화하는 키르케고르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 본적이 없는 한 읽기, 한 철학자의 정열적인 철학자 읽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앙리를 읽으면 많은 감동émotion을 받는다. 말 그대로 안에서 무엇이 흔들리고 뒤집히면서 감정이 솟아난다. 그리고...‘침묵’만이 남는다. 이 침묵으로 인해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무언가 말이 이어져 와야 하는데 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 사방을 채울 때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하는 것은 당분간 가능하지 않다. 그 침묵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치 새가 노래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플로베르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앙리는 파스칼이 공포를 느낀 무한한 우주 앞에서, 익명적인 우주 앞에서 느낀 침묵이 들리지 않는 것과 달리, 이런 침묵은 “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파토스, 정념은 말로 전달 될 수 있는가? 느낌은 느낌으로 전달되는데, 그런 느낌이 설명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 느낌 그 자체인가? 기다려도 오는 것은 침묵의 울림일 뿐일지도 모른다. 분명 들을 수 있는 무엇이지만, 그것은 말이 아닌 다른 형태의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켄슈타인에 반해서, 말을 해야 한다. 블랑쇼처럼. “고백할 수 없는 것inavouable”을 말을 해야 한다.
앙리가 키르케고르를 특히 ‘불안’의 개념을 길게, 본격적으로 다루는 곳은 그의 후기 저서 『육화, 살의 철학』 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2000, 앞으로 ‘I’로 표시한다.)에서 ‘에로티즘’을 다루면서이다. 그런데 이미 63년 『현시의 본질』(EM) 마지막 절에서 자신의 철학의 결론으로 모든 행위의 토대로서 ‘정감성affectivité’의 본질을 다루면서 앙리는 키르케고르의 ‘절망’의 개념을 불러온다. 그리고 66년 코펜하겐에서 키르케고르 100년 탄생을 기리는 국제 콜로키움에서 K.-E. Løgstrup의 발표의 답변으로써 “하이데거와 키르케고르”(HK)를 발표하면서, 그리고 77년 캐나다 쾨벡 대학에서 있었던 철학회에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in Phénoménologie de la vie Tome 1, PV1)라는 논문에서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절망’의 개념을 다룬 적이 있다.
키르케고르의 글의 발표의 순서에서 『불안의 개념』이 『절망에 대한 논고』(『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더 잘 알려진 것)보다 앞선다고 할지라도 이 두 저작은 그에게 동시적이며, 두 개념은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다. 절망이라고 부르든, 불안이라고 부르든, 이 두 정감은, 아주 오래된 한 책에서 우리가 “나는 길이고 진리고 삶이다”라는 말을 발견할 때, 또 키르케고르가 “진리,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말했을 때, 또 맑스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라고 선언했을 때, 세대를 거쳐서, 시간을 횡단해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서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전적으로 뒤 흔드는” 어떤 감동, 뭔가 속에서 전적으로 뒤집히고, 전복되는 그 감정과 다른 것이 아니다. 앙리는 이러한 감정ㅡ불안, 절망ㅡ의 정조들tonalités affectives은 삶의 망각에서 우리를 깨우는 “삶의 정념적인 상기”라고 부른다. 키르케고르의 불안, 혹은 절망의 정조는 앙리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초월론적인 정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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