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육화, 살의 철학>이 출간된 해 잡지 Autre sud 에 실렸던 티에리 갈리버와의 대담이다. 그의 <대담집> 125-143쪽에 해당된다.
Thierry Galibert - 당신의 최초의 저서,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에서부터, 그리고 같은 문제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현시의 본질>에서, 당신은 우리의 모든 악은 신체의 의미의 상실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당신이 "절대적인 추체성" 혹은 나중에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신체의 본질로 우리의 존재의 토대로 간주된다. 그런데 적어도 데카르트이래로 철학은 지성의 일이지 정감의 일로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당신의 철학은 모든 철학에 대립되는가?
Michel Henry - 사실 나의 출발점은 고전철학과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20세게 중엽의 프랑스에서 일고 있던 현상학의 운동에 대립된다. 이 체계들 안에서 인간의 정의는 나를 만족시키지 않았다. 주체성의 개념은 데카르트 이래로 근대철학을 지배했다. 그런데 이 주체성은 추상적이며, 사유였다. 나에게 주체성, 즉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심오한 존재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우리의 신체가 주체적/주관적이라는 것을,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주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성격의 대부분의 증거를 자신 안에 가진다는 것을 큰 충격émotion과 함께 발견했다. 신체는 바로 이 구체적인 주체성의 '장소'이며, 나는 이 주체성을 "삶"이라고 불렀다. <현시의 본질>에서 나는 어떤 점에서 이 주체성, 삶이 고전 철학과 현대 현상학의 추상적인 주체성과 다른가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 차이는 주체성이 자기에 현시/계시되는 양식에 달려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세계로 열린 규정되지 않은(익명적인) 주체성이 아니라, 우선 근본적인 직접성 안에서 정념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주체성이다. 이것은 내가 나중에 "우리의 살"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인상적이고 정감적인 주체성으로, 표상이나 개념을 형성하는 데 한정되는 지적인 주체성보다 우리 안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는 것이다.
- 레비나스에게 주체성은 장소이면서 장소가 아니다. Non-lieu라고 표현되는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그래서 ex-ception, 다시 말해 모든 본질에 낯선,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 주체성, 삶도 non-lieu이다. lieu는 장소라는 의미이지만, 이 말은 또한 법률적 용어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소송이 취하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주체성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흔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의 장소론은 그래서 그의 주체성의 이론과 동일하다. 장소이면서 장소가 아닌, 일어나면서 일어남이 없는, 블랑쇼의 언어로 작품oeuvre이 생성되면서 작품의 부재désoeuvrement가 일어나는 주체, 작품의 운동ㅡ변증아닌 변증ㅡ은 그의 주체성의 이론을 형성한다.
Thierry Galibert - 결국, 이 주체성은 프로타고라스의 말의 그 의미를 변형해서 표현하자면 "모든 것의 척도"가 아닌가? 그것은 당신이 <현시의 본질>에서 말하듯 일종의 우리 안에 "절대적인 주인maître absolu"이 아닌가?
Michel Henry - 비록 그 표현이 나의 믿음conviction에 일치한다고 할지라고, 이 경우 나는 헤겔의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탁월한 생각은 이미 메를로-퐁티에서 나타난다. 그에게 경험의 주체는 지적인 주체가 아니라, 정확히 우리의 신체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이 신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를로-퐁티에게, 후설과 마찬가지로, 신체는 본질적으로 세계로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가 우리를 세계로 연다면, 이것은, 그 신체가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앞서서, 우리는 정감적이고 살적인 신체성으로ㅡ그 안에서 비로소 신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체성ㅡ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의 힘들les pouvoirs de notre corps이 직접성 안에서, 다시 말해 우리의 본래적인 주체성, 즉 삶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정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힘들은 그것이 하고자 하는 것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Thierry Galibert - 당신의 개인적인 철학적 접근을 고려할 때, 절대적인 주체성, 즉 삶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우선적으로 직접적인 직관intuition immédiate으로부터 나오는가?
Michel Henry - 전적으로 그렇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더 확실하게 말하면 내가 맹목적으로 en aveugle 느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에게 진실인 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진리의 부분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이런 확신은 인간의 숙명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미래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답을 찾아야 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안에서en nous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탐구자의 삶을 살면서ㅡ그 삶의 철학사의 위대한 사상들을 모두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가파른 길인데ㅡ나는 감동들émotions을 알았다. 특히 우리의 주체성은 그 가장 깊은 곳에서 정감적이라는 것을, 또 우리의 주체성은 우리의 고통, 기쁨과 같은 질서를 가진 일종의 정념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나는 그 감동들 중에서 근본적인 것을 체험했다. 비록 모든 '이해'가 그에 앞서서 우선 정감적인 정조를 가진다고 할지라고, 또 그것이 이 정조 안에서ㅡ본래적인 증여, 최초의 경험, 다시 말해 내가 "절대적인 주체성"이라고, "삶"이라고 부르는 이 정조 안에서ㅡ그 자체로 주어진다고 할지라고 말이다.
- 맹목적으로 느끼는 것, 별로 옮겨 놓고도 맘에 영 안 드는 번역이다. 절절한 표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앙리의 한 소설, Amour, les yeux fermé, <사랑, 감은 눈>을 생각해야 한다. en aveugle은 말 그대로 '장님의 상태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개념적 계산적 활동을 상징하는 보는 눈에 비해 느끼는 마음을 말하기 위해 앙리가 쓴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삶을 보기 위해서는 장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한다. 앙리가 칸딘스키를 읽으면서 "Voir l'invisible보이지 않는 것을 봐라"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Thierry Galibert -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에서, 당신은 멘느 드 비랑의 근본적인 프랑스 철학을 회복했다. 그것은 멘느 드 비랑이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거부하기 때문인가?
Michel Henry - 정확히 그렇다. 멘느 드 바랑은 위대한 데카르트주의자, 스피노자, 말브랑쉬, 라이프니찌 등이 포기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반성한 유일한 프랑스의-아니, 유럽의-철학자이다. 그들은 코기토의 핵심에 직접성immédiation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멘느 드 비랑은 즉각적으로 코기토는 표상ㅡ나는 '이 탁자가 하얗다'고 생각한다 혹은 '세계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것들ㅡ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반대로 본질적으로 고통의 질서, 우리가 "정념/수난passion"이라고 부르는 것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코기토가 정념의 질서인 이유는, 코기토의 정의에서 우선적으로 오는 것은 "나는 느낀다je sens"라는 감각 그 자체의 자기-느낌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cogitatio(사유)는 (표상적인) 사유 이전에, 인상적이고 정감적인 살 안에서 고통이 자기 자신에 주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은 사유가 아니라 행위이며, 그 행위는 비규정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정감적으로 규정된 행위이다. 노력이 바로 이런 행위의 감정이다. 노력(멘느 드 비랑이 말하는 노력)은 자기 자신에 정감적으로 주어진 행위이며, 그것은 자기인상이며, 살이며, 본래적인 신체성이다. 이제 주체성은 이 구체적인 영역을 획득한다. 나의 작업은 그 위에서 행해졌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이것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너무 빨리 지나갔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과학과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Thierry Galibert -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가 이 문제를 너무 빨리 스쳐갔기 때문에, 즉 과학적인 절차를 선호했기 때문에, 서양철학에서 개체화individuation의 과정은 삶, 주체성의 이성적인 타락perversion rationnelle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Michel Henry - 절대적으로 그렇다. 개체화의 과정은 다른 질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명시화되지 않았으며, 모호한 채 머문다. 서양 철학에서, 근본적인 아포리아는 인간이 동물이면서 로고스를 가진다는, 즉 의미와 이념을 형성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그리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로부터 나온다. 이성만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으며, 동물은 감각적인 것에 빠져있다. 바로 이 전제는 그리스 이래로 인간에게 고유한 개체화를 제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개체화를 근거짓기 위해서는 세계의 사물들과 관계해야 한다. 비록 인간이 이미 시간과 공간에 의해 개체화되어있다고 할지라고 말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순수하지 않은 이론은 한편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보편적 이성에 의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우리가 아닌 물질적 사물들에 의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개체성은 구체적인 주체성의 정념 안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멘느 드 비랑은 그것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으나 그것에 대한 직관을 가진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내가 행동하고, 내가 노력하는 것은 나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는 노력의 감정 안에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자이인데, 나는 다만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즉각적으로 느끼고 견디는 이 노력이기 때문이며, 이 노력과 나는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이미 자장 심오한 주체성의 자기-촉발 안에서, 정념 안에서, 내가 삶 그리고 살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 에고l'ego, 나le moi를 찾았다.
Thierry Galibert - 멘느 드 비랑을 읽지 않은 이유로, 당신의 책 <정신분석의 계보학>에서 나타나는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이성성의 궁극적인 현시로 생각하며, 그것은 삶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프로이트에서 신체의 억압refoulement이 존재하는가? 비록 그가 그 반대로 주장한다고 할지라고 말이다.
Michel Henry - 그 질문은 정신분석을 넘어서서, 전 유럽의 문화의 역사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로 보내지는 질문이다. 그 계기는 정확히 쇼펜하우어와 함께 산출된다. 그 때까지 의식은 추상적인 사유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칸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우주를 구성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우리 경험의 기원이다. 빛은 의식에 속하고 나머지는, 그 중의 신체는 물질과 같은 것으로 버려지며, 신체는 그 자신과 다른 원리에 의해 밝혀진다. 이때, 쇼펜하우어는 인간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지적인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살고자하는 의지"라는 전례없는 직관을 가졌다. 그가 말하는 삶의 의지는 전혀 고전적인 의미에서 지적인 의지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를 가로지는 의지는 욕망으로, 그것의 원형은 성욕일 것이다. 그것은 나를 삼키고, 나를 짓누르고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에 지적인 "나는 생각한다"를 부여하는 것처럼, 라캉이 말하듯 "이것celà"은 무의식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근대적 사유는 지적인 활동에 속하는 의식과 무의식적이고, 층동의 질서를 가진 나머지 사이에서 파악된다. 마치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통이 무의식적인 것처럼 말이다! 만일 고통이 무의식이라면, 어떻게 그것은 우리의 행위의 원천일 수 있는가? 소펜하우어는 그가 해결할 수 없었던 안티노미 앞에 놓인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 마치 사실처럼 주어진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표상, 즉 지적인 "나는 생각한다"에 사용되고, 나중에 프로이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머지는 무의식적인 것으로 넘겨진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철학적 작업은 여기에서(그 나머지의 것에서) 경험의 양태를, 정감성이라는, 전혀 무의식적이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적으로 다른 현상성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Thierry Galibert - 쇼펜하우어가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반면에 프로이트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아포이아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Michel Henry -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여전히 쇼펜하우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렇다. 프로이트가 나를 결정하는 것, 그것을 내가 볼 수 없기에 그것은 무의식적이라고 말하는 한에서 말이다. 이때 충동은 전적으로 어둠 속에 빠져든다. 때때로 사람들은 충동은 심리적 질서에 속하며, 그것은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때로는 그것은 생리학의 질서의 속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서, 충동은 동시에 이 둘이다.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충동의 지위는 따라서 전적으로 불확실하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 본질적인 것에 우리는 심리학의 길을 통해서만 도달하지, 생리학의 길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의 후손으로 자리한다. 나의 아내 Anne Henry가 <쇼펜하우어와 유럽에서 문학적 창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쇼펜하우어는 이미 유럽 문화를 비극 안에서 폭력적인 힘, 즉 무의식의 보편적인 전제와 연결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위대한 창조자들 모두는 1818년(<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간된 해)의 이 철학적 아포리아에 의존한다. 그런데 멘느 드 비랑은 1806년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그 당시 베르제락의 군수로 있으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글을 썼다. 근대 사유가 혼자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렀다는 것을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Thierry Galibert - 당신의 현상학은 결국 다른 기획하에 있는가?
Michel Henry - 나의 삶의 현상학은 세계의 현상학을 대신하는 데에 있지 않다. 세계의 현상학은 그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후설과 하이데거에서 이 세계에 대한 놀라운 기술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현상학은 한면unilatérale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견디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영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작업했다. 여기서 외재성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그런데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할지라고, 비가시적인 현상성을 발견했을 때, 나는 전진할 수 있었다. 비가시적인 현상학은 그리스의 개념 'phainomenon'의 변형을 함축한다. 그 말의 어원은 인도 유럽어의 '빛'을 의미하는 'pha'로 부터 나온다. 이 빛은 세계의 빛이며, 외재성의 빛이며, 우리가 보는 것의 빛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가 자신의 고통을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다만 외적인 현시 혹은 증상으로서만 지각하는 우리의 불안을 누가 보았는가? 우리가 보여질 수 없다고해서, 그것이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탁자나 길 위에 돌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바로 여기에 나의 탐구의 노력이 놓인다. 정감성을 계시의 최초의 형식으로, 실재의 나타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Thierry Galibert - 1996년 당신은 <내가 진리다>라는 책에서 기독교는 삶의 현상학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Michel Henry - 나의 반성을 심화하면서 나는 바울과 요한을 다시 읽었다. 이것은 내게 두 번째의 큰 감동이었다. 나는 내가 삶의 현상학의 현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철학자로서 생각한 것이 바울과 요한의 텍스트 안에서 철학자가 하지 않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들은 나의 실존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진리다>를 썼다. 이 제목은 그리스도의 말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삶의 현상학의 도움으로 다른 진리가, 앞선 어떤 진리가 있는 것처럼 내게 보이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물론 나의 의도는 기독교를 삶의 현상학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존재자들의 삶의 양태와 관계한다. 종교는 그들에게 이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할 것을 강요한다. 1946년 멘느 드 비랑과의 만남이래로 내가 행위/실천을 사유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한에서 나는 내 철학의 근본적인 요소 안에 있었다. 신약에서, 진리는 절대로 이성적 진리의 의미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또 존재는 이 진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 나에게 진리는 그것이 삶인 한에서, 자기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성 안에 자기를 지니지 않은 자기의 경험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본질적인 이유에서, 개인성/개체성과 관계한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의 1장에서, 신은 자기를 낳고, 그 안에서 신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자기에 계시된다. 이 자기는 신의 말씀이다(Dieu génère un Soi dans lequel il s'éprouve soi-même et se révèle à soi, et qui est son Verbe).
Thierry Galibert - 종교에 적용된 이 현상학의 위대한 공헌은 그 안에서 내재성이 초월성을 앞선다는 드러내는 것인가?
Michel Henry - 우리는 철학자들이 '절대'라고 부르는 것을 종교는 '신'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가 절대는 '삶'이라고 말한다면, 요한은 신은 '삶'이라고 말한다. 다른 언어 안에서 그들은 같은 것을 말한다. 삶의 현상학은 따라서 철학을 기독교의 고리적 신체 위에 인위적으로 덧붙이지 않는다. 삶의 현상학은 다만 철학의 대상과 종교의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요한은 우연히 신은 삶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는 신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삶에 정감적인 정의를 주었다.
Thierry Galibert - 그런 주장은 그것이 기독교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볼 때, 좀 낯선 것이다. 기독교의 신학이 중세의 해석의 멍애에 사로 잡혀 있는 한에서 말이다.
Michel Henry - 사실적으로 이런 주장은 좀 충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은 아리스트텔레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두 기원으로부터 나온다. 이 둘은 우리의 문화의 탁월한 특징들을 만든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그리스-라틴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로 결합된다. 두 강물은 섞인다. 비록 하나는 평지에서 다른 하나는 산으로부터 왔다고 할지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 역설적인, 그런데 무한히 소중한 연대로부터 태어난 자식들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싸운다. 나는 상아답에 갇혀있는 자가 아니다.
Thierry Galibert - 당신의 저작 <육화, 살의 철학>은 살로서의 삶의 재확인인가?
Michel Henry - <나는 진리다>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영지주의적이라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체의 측면을 지웠다고 비난했다. 신학자들은 물론 나의 전작업들에 무지하다. 그리고 살에 대한 반성이 나에게서 우선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새 책에서 나는 신체와 살을 구분을 설명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신체를 세계로부터 이해하며, 세계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한 번 우리 인간의 근저에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그리고 우리가 살이 삶에 의해서 설명되지, 전혀 세계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 인상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전적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신체의 개념화의 근본적인 변형이 문제이다. 신체는 더 이상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성이며, 살아있는 살이다. 이것은 정확히 유대-기독교적인 전통 안에 함축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의 이원론은 유대주의 안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속성들에도 불구하고, 하나이며, 유일한 자기를 가진다. 이 단일성은 구약에서, 기독교에서 발견되며, 특히 신약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거기서 말씀은 삶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말씀은 삶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의 로고스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며, 고전적인 현상학은 그리스적 현상학이다. 교부들은, 그들이 그리스적 기원을 가지든 않든, 모두 말씀의 육화를 인정햇다. 그들은 이 비-그리스적인 진리 위에서 그들의 믿음을 시험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적 신체에서, 즉 산파와 의사들의 신체에서, 고통으로,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이뤄진 살로의 이행을 관찰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신체의 개념화에서 삶 안에서 태어난, 살아있는 신체의 개념화로의 생각하지 못한 이행을 발견한다.
Thierry Galibert - 당신은 두 물줄기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기원 안에 자리하는 두 물줄기가 아닌가? 말하자면 살 위에 근거한 기독교는 르네상스의 플라톤주의에 의해서 변형되고, 결국 이원성을 낳지 않는가?
Michel Henry - 여기에 데모트레이코스의 영향 아래서 갈릴레이가 잘못 읽은 플라톤을 첨가해햐 한다. 이원론적인 사상가라는 것은 인간이 한편으로 우주의 물질적인 신체이면서 다른 한편 영혼이라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성찰>의 기획은 기독교적 기획이었다. 다시 말해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증명이 어려운 까닭에 적어도 영혼이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그의 근본적인 테제를 정립하고 그 당시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수용한다. 데카르트를 포함해서 말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밀랍의 이론에서 갈릴레이의 이론을 따른다. 이제 데카르트에게는 한편으로 정신이 다른 한편으로는 기하학에 의해 알려지는, 더이상 감성 혹은 정감성에 의해 알려지지 않는 신체가 있게된다. 이 순간은 근대성에 의해 유대-기독교적인 흐름이 산산조각이 나는 아주 중요한 전향의 시기이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의도함이 없이 그것을 완성한다. 후설은 그의 <위기>의 한 구절에서 말하듯,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두 흐름의 기원에 걸쳐있었다. 인간에 대한 초월론적인 정의ㅡ그런데 밀브랑쉬, 스피노자, 라이프니찌가 몰랐던 코기토ㅡ와 인간의 감성적이고 정감적인 본성을 지우는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접근을 사용하는 객관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과학의 흐름이다. 내 입장에서, 나는 과학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야만>에서 내가 비판한 것은 과학을 유일한 형태의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과학적인 진보에 낯선 진정한 삶을 전적으로 가리고 평가절하 하는 과학의 태도였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종교의 실천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찬에서 시적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다.
Thierry Galibert ㅡ 스피노자가 코기토에 무지하다고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이 그와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
Michel Henry ㅡ 우선 스피노자는 유일하게 내재성의 철학을 주장한 서양의 철학자이다. 그런데 그와 내가 다른 것은, 또 그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그의 내재성의 이론이 사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반면 나의 철학이 그 현상학적인 인식의 토대를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것이 아니면서 우리의 것인 한 삶의 체험으로 받는다는 데에 있다. 이 체험은 유한성 안에서 완수된다. 여기 사는 나는 나를 내 안에 스스로 자져오지 않는 것처럼 산다. 나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삶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며, 나는 자아이다. 나의 토대에는우리가 체험하는 일종의 절대의 흐름이 있다....
Thierry Galibert ㅡ 잘 알려진 철학자들 중에서, 당신은 가장 체계적으로 그 텍스트들을 탐구를 실천한 철학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정신분석, 맑시즘에 대해서 그렇게 했다. 특히 당신의 맑스 읽기는 1976년 그 책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Michel Henry ㅡ 맑스에게 사물들의 토대는 그가 실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맑시즘은 그 실천을 가지고 사회를 만들기 위해 너무 뻘리 "사회적 실천"으로 변형되었다. 그런데 맑스는 푸루동과 논쟁한 그의 책에서 사회에 반해서 논쟁했다. 사회에 대해서 말하면서 맑스는 이 "제 삼자"가 무엇인지를 자문했다. 우리는 참호를 파는 사회를 본적이 있는가? "이것을 위해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용어일 뿐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들을 지시한다. 물론 여기서 구체적 인간들이란 다양한 직업적 활동에 의해서 차별화된다. 농부는 공장의 근로자와 다르며, 사무실의 직원과도 다른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자들일지라도 서로서로 구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맑스는 고전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여기서 "삶"을 맑스는 그가 경제적으로 "노동"이라고 부르는 활동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의 최후의 수고에 이르기까지(자본론 2권과 3권) 노동은 개별적이고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노동은 노력과 수고와 고통으로부터 나온다. 일찍 일어나서 추위를 뚫고 일하러 가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들을 맑스는 그 당시 영국 의회의 조사를 참조했다. 부가 산출되는 것은 개별적인 삶들과 그들의 노력으로부터이다. 경제 전체는 바로 이 개인들의 삶, 노동에 의존한다.
Thiery Galibert ㅡ 맑스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삶의 철학자였다. 그 당시 그는 특히 교환가치일 수 없는 삶을 돈으로 대체하는 경제적 교환에 주의를 하지 않았는가?
Michel Henry ㅡ 맑스는 인간의 실존의 원시적인 공동체에, 교환하지 않는 가족 공동체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가족의 구성원의 노동을 측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밥과 잠자리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사회적 집단이 그들의 생산물들을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이 분화되기 시작했는가를 이해했다. 이 순간부터 측정할 수 없이 각자에 의해 체험되는 노력을 측정해야 했다. 바로 이 때 가장 큰 문제에 부딪쳤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한편으로 실존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실존은 나의 것이고 환원불가능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반면 이 측정할 수도 없고 이름도 없는 노력을, 각자 안에 감춰진 주체성을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Thierry Galibert ㅡ 맑스의 유명한 말,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라는 이 생각, 거의 존중되지 않는 이 생각은 사실 사회보다 개인이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가?
Michel Henry ㅡ 맑스는 그의 후기의 텍스트에서 노력은 그것을 완수하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석탄 자루를 나르는 데 누구는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하거나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경제는 이런 개인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경제는 이런 개인의 삶, 실존을 고려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동을 객관적인 척도에 의해 대체하고자 한다. 여기서 맑스는, 이어서 후설이 한 일이기도 하지만, 시계로 측정하는 객관적인 시간과 체험된 시간을 구분한다.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즐거움, 행복이라면 다른 이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힘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든 경제는 우선 살아있는 노동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 위에 설립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하든 안하든 모두 동일하게 8시간의 일을 한다. 이어서 모든 노력을 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일에 적합한지 안한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의 노동을 요구한다. 이런 방식의 양적이고 질적인 노동은 각자에게 고유한 구체적이고, 주체적이며 살적인 실재적인 삶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정감적인 삶과 작자의 수고와 상관없는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의 초월론적인 발생이다. 왜냐하면 경제는 사회 안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은 가족처럼 경제없는 사회일 것이다.
[...]
Thierry Galibert ㅡ 당신의 책 <야만>은 우리 사회가 기술의 노예가 된 것을 고발한다. 이 책은 맑스에 대한 당신의 반성을 연장하는가?
Michel Henry ㅡ 그렇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불행하게도 여기서 그들의 탐구 영역에 대한 비판만을 본다.나의 출발은 사실 후설의 대작 <유럽과학의 위기>의 주장들을 현실적인 상황에 적용하고 전개한 것일 뿐이다. 과학의 역사에서 거대한 단절이 생성된 것은 17세기 초엽이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세계는 감각적인 세계이고, 실재적인 세계는 색과 냄새와 소리를 가진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갈릴레이는 데모크레이토스의 케제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면서 우주의 (신)체는 색도 냄새도 소리도 없는 물질적이고 연장된 형식만을 가진 것으로 말해진다. 이 형식들을 아는 유일한 학은 기하학이다. 이것은 감각적 인식은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으며, 어떤 실천적인 유용성도 예를 들어 뜨거운 것을 만지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손, 신체는 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Thierry Galiber ㅡ 우리의 근대성과 관계되는 데카르트주의는 갈리레이적인 <야만>에 기여하는가?
Michel Henry ㅡ 데카르트는 신체에 대한 기하학적인 인식은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덧붙였다. 이것은 근대 과학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진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인간은 영혼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시 말해 감성과 정감성성과 삶과 사유의 질서를 가진 영혼을 인정했다. 그는 <성찰>에서 두 명제를 지지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자신이 창출한 아포리아 안에 갇혔다. 그의 이원론, 존재적인 이원론dualisme ontique은 사물들의 이원론이었다. 즉 보이지 않는 영혼들과 물질적인 신체들의 이원론이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이어서 후설과 더불어 다른 종류의 분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지식은 물질적인 신체들에 대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인식 안에 포함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의식과 삶의 초월론적인 지식, 즉 인간을 만드는 모든 정감적인 지식을 괄호 안에 넣는다. 그들은 이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연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가상이 되었다.
Thierry Galibert ㅡ 따라서 당신은 다른 접근(갈릴레이의 야망과 다른 접근)을 제세하는가?
Michel Henry ㅡ 물론 다른 대답이 가능하다. 우리의 주관적인 신체는 멘느 드 비랑이 본 것처럼 내적으로, 주체성으로부터, 그것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알며, 세계는 이 노력에 저항한다. 그런데 주관적으로 완수되는 모든 행위는 외적으로 보여질 수 없다. 따라서 존재적인 이원론dualisle ontique을 나타남의 면la plan de l'apparaître으로 이동해야 한다. 삶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며, 세계 안에서 삶은, 객관적인 신체로서 외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경험적인 개인이며, 초월론적인 질서로부터 파악하기 어려운 본래적인 현상의 외적인 나타남이다. 이때, 나는 내적으로 살며, 이 여기의-삶은 내적으로 나의 비가시적인, 주관적인 신체에 부딪친다. 이것은 내가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성을 진정한 이성인 정감성으로 대체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물들의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가 토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해 명령된다. 만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그들 가운데 있는 삶이 그것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Thierry Galibert ㅡ 당신의 존재론적 이원론dualisme ontologique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가?
Michel Henry ㅡ 이 이원론은 내가 전에는 존재론적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지금은 현상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상학은 개개의 현상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현상을 현상으로 만드는 것을 연구한다. 세계를 고려해 보자. 우리는 그 안에서 모든 종류의 현상들, 물론 물질적인 사물들, 또 논리적이고 수리적인 세계의 지반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2+2=4라는것을, 무엇이 무엇보다 더크다는 것을 본다. 따라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근본적인 봄voir이다. 이 봄은 공간 안에서 전개되며, 이 세계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외재성이다. 다른 한편 당신이 고통과 같은 현상을 고려할 경우, 그것은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파토스 안에서 자기에 몰려있다. 마치 자기가 자기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이 거리를 가질 수 없음 그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계시는 세계의 계시와 전적으로 다른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자기와의 거리를 가지며, 심지어 거울 안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세계 안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삶. 우리의 불안, 우리의 고통은 외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근본적으로 다른 두 양태의 계시를 구분해야 한다. 주관적인 것은 우리가 제거할 수도 피괴할 수도 없는 자기와 붙어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표상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Thierry Galibert ㅡ 이 이원성은 신체와 살에 대한 문제제기, 살의 객관화로서 신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끈 것인가?
Michel Henry ㅡ 신체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른 두 방식으로-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ㅡ주어지는 놀라운 실재이다. 외적으로 나는 신체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애무할 수도 있다. 내적으로 존재하는 신체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타자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장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을 즐기고 그는 우리를 회피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인 접근 안에서 사랑의 기도는 실패한다. 그런데 융합이 가능한 한 장소가 존재한다. 그것은 삶이 자신을 향유하는 주체성이다. 살이 자기와 거리를 가질 수 없는 반면에 신체는 그것이 가능하다. 성적인 관계에서 욕망된 타자의 신체는 보여질 수 있는 신체일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체, 즉 그의 살, 그의 영혼이기도 하다. 당신이고 타자인 욕망이 있다. 이것은 <육화>의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나는 근대 세계의 객관주의의ㅡ그것의 절정은 엿보기voyeurisme에서 드러나는ㅡ에로티즘의 문제를 갱신하고자 했다.
[...]
Thierry Galibert ㅡ 당신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이르는가?
Michel Henry ㅡ 확신하건데 철학은 아주 오래전 부터 윤리가 사는 것을 허락하는 것인 한에서, 이 가장 단순한 이유로 이 영역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삶이 아니면, 누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할 것인가? 이 금지는 긍정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삶은 무한하고, 이 삶은 초월론적인 삶이지 타성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
Thierry Galibert ㅡ 따라서 당신은 윤리로서 종교를 말하는가?
Michel Henry ㅡ 종교라는 말의 어원ㅡre-ligareㅡ은 우리에게 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것은 연계lien이다. 나의 삶과 절대적인 삶의 연결이다. 그런데 이 연계 자체는 윤리를 연다. 왜냐하면 이와 유사한 연계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며, 윤리는 이것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육화>에서 나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런한에서 우리의 삶이 무한한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을 반성했다. 우리의 자기는 자기 안에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다. 나는 삶 안에 도래했다. 그런데 이 도래를 완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따라서 나와 동일한 조건을 가진 부모에게 내가 나의 삶을 빚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이다. 자기 자신 안에 자기의 도래는 나를 이 특권적인 질서 안에 놓는, 즉 하나의 살아있는 자로 만드는 우리가 형이상학적이라고 혹은 절대라고 부르는 실재를 전제한다. 삶이 생성이라면, 그것은 삶이 우리 자신이 이런 결합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살아있는 유한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매순간 우리를 살게하는 이 무한한 삶을 사는 살아있는 자들이다. 우리의 삶의 존재 이유는 우리 안에 이 삶을 환대하는 것이며, 이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노력 안에서, 수도원의 고독 안에서 혹은 헌신의 단순성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 앙리가 <육화>에서 이전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한 마디는 "우리의 자기는 자기 안에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수동성이다.
Thierry Galibert ㅡ 거기에 기독교가 자리하는가?
Michel Henry ㅡ 그렇다. 기독교는 구원을 스피노자처럼 최상의 지적인 이해에 놓는, 일종의 제 3 단계의 인식이라고 불리는, 다만 선택된 몇몇에게만 허락되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것들의 종교이다. 아주 단순한 행위, 누군가를 앞서 지나가도록 하는 아주 단순한 행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자신 이상의 어떤 것을 받는다. 가장 하찮은 윤리는 가장 큰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이 질문은 각자의 삶 안에서 각자에게 열려있다.
- Après vous ! 레비나스 윤리의 한 모토가 여기서 발견된다. 가장 단순한 행위, 열린 문 앞에서 타인을 먼저 지나가도록 하는 이 단순한, 가장 하찮은 실천이, 또 Bonjour 안녕하세요라는 일상의 아주 단순한 인사가, 이 하찮은 실천이 타자에 대한 나의 대답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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