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읽은 글의 마지막 부분의 번역이다. 51쪽 중간에서 57쪽에 이른다. 실천으로서의 삶/생명의 운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 개체성pricipium individuationis의 원리에 대하여.
삶으로부터 원하고, 그것이 산출하는 것을 쉬지 않고 산출하는 이 삶의 이 운동은 무엇인가? 우선, 이런 운동은 원리상 개별적individuel이다. 그것은 개체/개인individu의 고유한 변형이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작업으로서 개체로부터 유래한다. 이것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정념성의 자기-촉발 안에서 발견하는 삶은 그 자체로 모나드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면, 촉발하는 것과 촉발되는 것이 동일하다면, 자기-촉발은 자기성의 본질이다. 삶은 강물이 돌리는 물레바퀴의 본성에 무관심한 강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존재는 특수의 순간이 주어지기 위해 보편성 안에서 부정될 필요가 없다. 반대로 특수는, 우리가 이 언어를 말하고자 한다면, 존재의 본질이고, 존재의 가장 내밀한 가능성이며, 자신의 실증성의 전개이다. 자아le moi, 하나의 나un moi는 어떤 자연적, 심리적 혹은 정신적 성질에 의해, 보다 감각적이고, 보다 지적인 사실에 의해, 그가 어디서, 어느 시대에 태어났는가에 의해, 다른 자아와 차별지워지지 않는다. 개체성의 원리는 전혀 외재성의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아는 그 자체 본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자아와 차별된다. 자아는 자기-촉발 안에서, 그것에 의해서 자아이다. 정감성 안에서, 그것에 의한 자기임은 모든 삶을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놓으며, 그것이 삶을 삶으로 만들며, 자신의 근본적인 개체성의 절대적인 충분성 안에서 동시에 다른 것과 대립된다.
-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한 구절ㅡ"삶의 강은 그것이 돌아가게 하는 바퀴들의 본성에 무관심하다."(PE, I, trad. Hyppolite, 237) 를 불러오는 이 구절은 앙리가 개인/개체의 단독성을 말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것이다. 헤겔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보편성의 본질, 그것이 '정신'이든 혹은 그것의 실현인 '국가'이든, 혹은 위의 구절에서처럼 삶의 강이든, 그것은, 그것이 돌리는 바퀴들의 본성에 무관심하다. 19세기 낭만주의적 범신론의 한 특질인 개체, 개인을 희생해서 절대에 이르는, 절대와의 일치에 이르는 이런 초월성에 대한 비판은 앙리와 레비나스가 공유하는 것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별적인 각각의 삶은 그런데 삶이 전개되는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가? 그 안에서 삶은 삶이 지나오고, 무수한 우연들이 존재하는 상황들 전체로서 전개되지 않는가? 삶은 매순간 세계에 의해 촉발되고, 이 촉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가? 그런데 다양한 감성에 의 한 개체의 촉발은 이 다양성을 느껴지게하고, 이 감성 그 자체를 가정하는 세계에 의한 자신의 촉발을 전제한다. 감성, 즉 초월성 안에 지평의 탈자는 이어서 우리를 세계로 여는 이 행위의 자기-촉발을 전제한다. 우리를 촉발하는 모든 것, 우리를 만지는 모든 것, 우리에게 도래하는 모든 것은, 이 도래가 그 자신 안에서 우선 삶의 도래인 한에서만, 감정 안에서 한계 없는 자신의 경험인 한에서만 우리에게 도래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전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 비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도래하는가의 이유가 있다. 정감성이 촉발의 본질과 그것의 감춰진 삶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감성이 이 삶을 하나의 삶으로 만들기 때문에, 매번 촉발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서 삶의 정감성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고 견디는 것을 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삶이다. 따라서 항간에 떠도는 피상적인 설명들을 비판해야 한다. 우리의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탄생의 트로마티즘도, 아이나 성인의 성적인 불안정도 아니다. 불안과 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정조 일반과 같은 어떤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촉발로서, 자신의 본질을 삶 안에서, 정감성 안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본래적으로 구성된 존재 안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물론 세계 안에 사물들이 우리의 고통과 즐거움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과 기쁨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 그 자체의 가능성들로서, 우리의 고유한 실현의 근본적인 양태들로서, 다시 말해 현상학적인 삶의 실행일 수 있고 그런 형식을 취할 때에만 가능하다.
-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정감성 안에 근본적인 삶의, 정확히 우리의 신체의, 살의,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힘le pouvoir 안에, 프로이트적 언어로는 '충동' 안에 자리한다.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불러내서 앙리가 해석하는 이 불안의 기원은 순결/무죄성l'innocence에서 죄, 잘못으로의 이행의 가능성 안에서 발견된다. <육화>의 3부는 특히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에로티즘을 다룬다. 그에 대한 해석에서 전적인인 수동성으로서 삶의 시간성을 끌어내는 것은 앙리의 몫이다.
▶ 삶의 전적인 수동성에 대하여.
어떻게 삶은 자신 안에 자신의 고유한 양태들로서 근본적인 정조들을 지니는가? 삶이 자신의 자기-촉발의 근본적인 내재성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한에서, 삶은 본질적으로 자기에 대해 수동적이며, 삶은 자기와 연결되며, 이 연결을 잘라낼 수 없으며, 이 삶과의 어떤 거리를 취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삶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 자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 자기 뒤로 물러설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부터, 그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는 일종의 후퇴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의 불가능성이 있다. 삶이 중단할 수 없는 자기 시련의 극복할 수 없는 수동성 안에서 자기에 전적으로 몰려있는 한에서, 삶은 시련, 자기 시련이며, 그 안에서 삶은 되돌릴 수 없이 그것인 바의 것이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보내진다.
▶ 정감성의 본질로서 고통과 즐거움의 선험적인 이행 가능성.
이 "자기 시련 se souffrir soi-même"의 겪음 안에서, 고통 안에서, 삶은 자기를 느끼고 견디며, 자기에 이르며, 자기에 전적으로 못 박힌 존재와의 완벽한 연대 안에서 자기에 주어지며, 삶은 자신의 고유한 내용으로부터 성장하고, 자기를 향유하며, 이런 삶은 향유이며, 즐거움이다. 정감성의 근본적인 이가성dichotomie, 이 자발적인 나눔이 우리의 모든 정감 사이에서 그들의 정조, 우리가 긍정적, 즐거운 혹은 부정적, 불쾌한 정조에 따라서 실행된다는 사실은 단순한 경험적인 호기심도 자연적 소여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 안에 그 뿌리를 가지며, 삶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삶의 과정, 우리의 모든 정감이 이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을 우리는 이해한다. 즐거움이 고통에 이어지는 것은 다만 세계 안에서 즐거운 사건이 불쾌한 사건에 이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즐거움이 고통에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서 즐거움으로의 이 이행의 가능성, 그것들에 공통된 가능성은 그것들이 그 가능성으로부터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본질이다. 이 본질은 키르케고르가 절망의 근저에서 지복의 삶의 본질을, 절망이 이르는 지복béatitude을 나타나게 했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이기도 하다.
- 레비나스가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이유(키르케고르에게는 우리가 알듯이 윤리적 단계에 이어 종교적 단계가 이어진다)는 바로 어는 지점에서 더 이상 이 이행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고통이 더 이상 지복으로 넘어가지 않는 순간, 여기에 다른 길이 열린다. "고통을 견딜만 하냐고" 묻으며 친구의 등을 받쳐주는 누군가의 손, 여기에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의 윤리가 들어온다.
▶ 삶의 시간성에 대하여
고통에서 즐거움으로의 이행은 우리를 시간의 실재 앞에 놓는다. 삶은 시간성이다. 그런데 삶의 시간성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현대 철학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엄청난 진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 철학은 삶의 시간성의 진정한 현상학을 산출할 수 없었으며, 다만 전자와 전적으로 다른 '시간의 의식'의 현상학만을 산출했다. 시간의 의식의 현상학은 시간의 표상의 현상이며, 이 현상학을 시간을 표상으로, 결국 표상의 구조로서, 다시 말해 우리가 본 것처럼 외재성 안에서 존재의 본래적인 파열로 다룬다. 이러한 개념화를 존재론적 결핍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순수한 비실재의 영역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미래, 과거의 순수한 자리, 그것들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비실재적이다. 현재 그 자체도 비실재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현재의 의식으로, 탈자적 지평으로, 즉 외재성 안에서 다루는 한에서 비실재적이다. 실재적 현재, 살아있는 현재는 자기-촉발의 현상학적인 실행, 인상이다. 그런데 가장 내적인 자신의 본질과 가능성에서, 자신의 정감성의 근본적인 내재성 안에서 파악된 인상이다. 과거로 인상의 미끄러짐이 삶의 내재적인 시간성을 시간의 의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 현재의 실체는 자기 밖에서 흐르고, 모든 실행의 외재성으로의 도피는 현대 사유 일반을 지배하고, 후기 후설주의자들의 사유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상학이 사유할 수 없었던 시간성, 실재와 관계하고, 실재 안에서 실행되고,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 시간성, 인상의 시간성 그 자체, 절대로 자기 밖으로, 우리 밖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었던 것 밖으로 나가지 않는, 비실재로의 갑작스런 도약이 아닌, 매순간 죽음이 아닌, 다만 삶 안에서 자신의 내재성 그 자체로서, 자기에게 나타나기를 그치지 않는 것으로 산출되는 삶의 운동인 인상의 자기운동으로서 시간성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러한 현상학적 개념은 모순이 아닌가? 모든 것이 여기에 있고, 자기-촉발의 자기와의 떨어질 수 없음 안에서 여기에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일어나는 것이ce qui se passe 자기와 분리될 수 없다면, 일어나는 것이 자기 자신 안에 머무는 삶이라면, "지나가다/일어나다passer"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손, 테이블을 만지지 않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무 것도 한적이 없는 객관적인 손이 아니라, 파지의 주관적인 힘le pouvoir subjectif de préhension, 근본적인 "나는 할 수 있다Je Peux", 이것의 자기-촉발이 우리의 본래적인 신체성을 구성하는 나의 손을 고려해보자. 탄생 이후로, 이 힘/가능성은 우리가 보통 지나갔다고ils sont passé 말하는 무수한 운동들을 완수했다. 이것들은 어디에 있는가? 후설의 인상들처럼, 지금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더 먼 과거로, 점점 깊어지는 어둠 안으로, 무의식으로 모두 사라졌는가? 그리고 이것들이 되돌아와야 한다면, 그것들은 '기억'의 이름으로, 본래적인 것은 하나도 주지 않는 표상의 산출이라는 비실재적 양태에서 그것을 실행하는가? 아니면 잡는 행위, 우리가 성취한 모든 것, 우리가 성취할 모든 것은 항상 이미 여기에 toujours et déjà là 있지 않는가? 그것들은 파지의 힘의 자기-촉발, 그것의 잠재적인 현실(태)화actualisation potentielle와 다른 것인가? 이 현실화가 정지할 때, 행위l'acte는 우리 밖으로 다시 떨어지지 않으며, 시간의 도망치는 선 위에서 우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 안에 이 힘이 머무는 것처럼, 이 잠재적 긴장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행위는 우리 안에 머문다. 머무는 것ce qui demeure 그리고 더 이상 의식적이지 않은 것은 물질적 흔적, 고전적 사유 혹은 프로이트를 따르는 집단의 신화적인 무의식 안에 모인, 파열된ㅡ포개진ㅡ 죽은 존재가 아니다. 머무는 것, 더 이상 의식적이 아닌, 그리고 한 번도 의식적이었던 적이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감춰진 존재 안에서 삶의 자기 자신 안에 머뭄이다. 자기 안에 이 머뭄 안에서, 삶의 힘들/가능성들pouvoirs은 그 자체로 머물며, 그것들은 실질적인 힘처럼, 자기를 전개할 준비가 된, 자기 자신에 결합되기를 그치지 않는 것들eux이고, 자아moi는 이 힘들에 주어진 이것들의 존재일 뿐이며, 자아는 이 힘들의 삶일 뿐이다. 그래서 존재는 결정적으로 외재성에 의해서 사유될 수 없다. 모든 삶과 행위는 자기 안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머무는 것으로서 완수되며, 반복의 형식 하에서 완수된다. 아무 것도 되돌아오지revient 않고, 모든 것은 살아있는 현재 안에서, 삶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카프카는 문 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그들이 삶이 얼마나 짧은지를 안다면, 그들은 감히 가장 가까운 마을일지라도 가고자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이를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는 우리에게 시간의 '비실재성'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뒤에 우리의 지나간 삶을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보며, 우리가 사는 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본다. 미래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예를 들어 카프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린 시절의 마을로 되돌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아무것도 우리 자신이 아니며, 우리는 신의 빈 무덤 앞에 선 병사들처럼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내재적이고 외재성 안에서는 누구도 삶을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낯선, 외재성에 낯선, 영원한 ㅡ 왜냐하면 영원성은 자기-촉발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영원성은 ㅡ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ㅡ 삶은 그런데 영원성 안에서 고유한 시간성을, 우리가 그 개념을 찾는 실재적 시간성을 전개한다. 이 시간성은 다만 삶을 구성하는 잠재성의 차별화된 현실화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들의 연속적인 이행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행 안에서 어떤 정감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것을 마치 자신의 본질처럼, 자신의 가능성처럼 이어 받으면서 그 안에 머문다. 그래서 이 모든 양태들을 거쳐서, 삶은 자기자신을 느끼고 견디기를 그치지 않으며, 삶은 그치지 않는다. 삶의 가장 본래적인 시간성은 삶의 근본적인 수동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해 수동적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 수동성은 삶의 자신의 토대에 대한 수동성을 의미한다. 삶이 자기를 느끼고 견딘다는 것은 삶이 자신의 정감의 내용을 스스로 정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그것을 삶이 정립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견디면, 삶에 주어진 것으로, 삶이 아닌 것으로부터 그 안에 도래한 것으로 느끼고 견딘다. 그런데 삶은 자신의 본질, 즉 삶이 자기 자신에 도래에서 자기의 향유 안에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사실을 정립하지 않는다. 삶은 이 자기에의 도래, 삶의 자기에의 도래의 그치지 않는 운동의 수동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다. 도래하는 것은 미래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는 것은 삶의 자기에의 도래이다. 도래하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삶의 도래이다.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면서 삶은 그 도래를 느끼고 견디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정감성의 투명성을 거쳐서 삶은 이 삶을 정립하고 정립하기를 그치지 않는 힘/잠재성puissance 안에 잠긴다.
앞서 우리가 전개한 반성은 형이상학적이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보는 과학이 주제화하고 그 객관성이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실재를 보증하는 듯이 보이는 세계에 낯선 형이상학처럼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 삶의 철학은 이 과학을 의심하고, 우리의 문화를 이성화하고자 하는 이 과학의 노력에 등을 돌리지 않는가? 우리는 이 이성성을 너무 가볍게 비판하지 않는가?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성 그 자체가 삶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진다면 무엇이 도래하는가? 이 구체적인 범주들은 선험적으로 순수한 사유로부터 연역될 수 없으며, 삶의 범주들의 표현과 표상이 아닌가? 예를 들어 인과성은 우리가 이 범주를 지속적으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신의 이유/이성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의 본래적인 신체성과 우리 자신인 이 "나는 할 수 있다"와 다른 것인가? 결국 우리가 줄 수 있는 궁극적인 증거, 모든 지식이 전제하는, 모든 진실이 관계하는 "그것은 진실이다"는 삶 안에 자리하는 그리고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본래적인 계시가 아닌가?
객관성이 보증하는 듯이 보이는 객관적인 이 세계가 문제인 경우, 이 세계의 조직을 형성하고 지각에 제공되는 현상들이 스스로 그것들이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을 끌어낼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면, 예를 들어 정치-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경제적인 규정들 전체가 경제적인 인과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힘으로부터 생겨나며 삶 안에서 그것의 진정한 능산성을 발견한다면, 이 세계는 얼마 동안 이 토대 위에서 의존할 있는가? 이런 방식으로 모든 것이 표면에서, 대낮에 일어나는 경제적인 세계는 비실재적이고 추상적이며, 무능한, 그리고 결국 다른 곳에서, 맑스가 말하듯 "산출의 비밀스런 실험실"에서, 살아있는 개인들의 보이지 않는 주체성 안에서 완수되는 것의 환상적인 더블double일 뿐이다. 이것들은 이 주체성의 속성들, 경제의 법칙들을 설명하는 삶의 법칙들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개인들에게 객관적인 등가를 제공하는 경제적인 실재들이 구성되는 것은 이 살아있는 주체성으로부터이다. 이 주체성이 근거짓는 이 등가와 이성성이 환상이기를 그치게 할 수 있음이 없이 말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불안malaise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형식의 도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삶의 철학은 오늘날 목적 없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삶의 철학만이 이 세계에 대한 내적인 이해에서 초월론적인 시선을 인도할 수 있다. 이 세계 한 가운데, 이 시선은 삶으로부터 주어진다. 마치 삶만이 각각을 그 자신에까지 인도하는 길을 열 수 있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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