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쿠자노와의 대담(2002)

aurorepark 2012. 7. 3. 22:00

사브리나 쿠자노와 대담은 이태리 텔레비젼 R.A.I.에서 2002년 1월에 있었던 대담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2002년 7월 3일이니깐 그의 마지막 대담이다. 오늘은 그의 서거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를 생각하면서 이 대담을 여기에 옮긴다.


대담의 덕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화, 특히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문제, 질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철학적 문제의 핵심에 놓인 논쟁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차리는데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 앙리 독서의 좋은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의 책을 직접 읽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어디에 그의 '내기'가 있느지를 알고 그의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 대담은 특히 아주 예민한 문제들의 핵심을 질문자는 앙리에게 묻는다. 물론 그 대답이 대담의 형식이라 길지는 않지만, 짧은 대답 안에 앙리의 진실들이 드러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의 철학과의 만남, 그리고 당신의 철학적 사유의 전개의 형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몇몇 지표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미셸 앙리 - 내가 철학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 학교 수업에서였다. 이 당시 나는 별로 학업에 관심이 없었다 - 프랑스 문학과 영어를 제외하고는 ㅡ 이 때 철학은 나에게 새롭고 놀라운 세계, 이념들의 세계로 나타났다. 아주 빨리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나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우선 신-칸트주의, 그리고 사르트르와 그의 시대, 그리고 그를 거쳐서 발견된 하이데거, 후설, 헤겔 등 위대한 현상학의 발견이었다. 현상학의 현혹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찾고자 했던 것, 다시 말해 나인 것ce que j'étaisㅡ내가 누구인지ㅡ의 반명제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인간 조건의 현상학적인 규정만이 내가 찾고자 하는 것에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아주 일찍 현상성 그 자체에 연구에 전념했으며, 세계의 현상성과 대립된 현상성의 발견으로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렸다. 다시 말해, 내가 '나타남의 이원성 혹은 이중성la dualité ou duplicitié de l'apparaître'이라고 부른 것으로 이끌렸다. 이것은 실재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현상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현상학적인 이원성dualisme phénoménologiqueㅡ물론 존재적ontique이 아닌 ㅡ 없이는 나에게 우리가 누구인지ce que nous sommes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어서 나는 이 이원성을 내가 만난 다양한 질문들에 적용했다. 예를 들어 맑스의 사회적 실재, 무의식, 문화, 예술 작품, 역사적인 현상학 자체, 그리고 기독교 등등에 이 이론을 적용했다. 나의 저작들은 이렇게 구성되었다. 오늘 나는 나의 탐구의 끝terme, 즉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라ㅡ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ㅡ적어도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의 본질적인 것을 말했다는 느낀다. 


- 우선 앙리의 철학의 출발, 그가 내가 찾고자 했던 것,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았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 이 대답을 구했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불어의 반과거로 표현되었듯이 ce que j'étais, 과거로부터, 기억할 수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쭉 나인 바의 것. 우리가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본질에 대한 한 정의 'ce que c'était'ㅡ오방크Aubenque가 ti en einai에 주었던 불어번역, 여기서 반과거는 "...achèvement toujours achevé de ce qui a toujours été ce qu'il est, 있는 바의 것으로 항상 있었던 것의 항상 완성되는 완성"은 '영원한 현재, Parousie'를 표현한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를 말한다: "나타남의 이중성". 이것은 그가 비판하는 "존재론적 일원론"에 반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세계와 삶의 관계의 존재론적 일원론에 의해서 보이는 것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하나가 가시적인 탈-자의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면, 반면 비가시적인 삶의 세계는 자기-촉발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후자는 전자의 초월론적인 조건으로 자리한다. 여기에 토대적 관계가 드러난다. 이 둘은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로 혼동된 철학사의 역사를 다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미 레비나스가 제기한 이 문제는 그가 하이데거에 대해서 "존재론이 근본적fondamentale인가?" 라는 질문에서 울려온다. 그 질문은 그가 "주체성의 보존"을 그의 철학의 목적으로 말했을 때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까이는 하이데거에서 조금 멀리는 헤겔에서 행해진 것이다. 헤겔이 <정신 현상학> 서문에서 "진리는 다만 '실체'로서가 아니라, 또한 '주체'로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절대로 혼동되지 않는(혼동해서도 안되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존재 혹은 실체ousia/substanceㅡ즉 hypokeimenon/sujet주체(아래 놓여 있는 것, 토대, 순수질료)와 ti en einai/quiddité본질ㅡ를 지금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주체로서의 존재는 이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둘을 혼동하면서 주체 즉 토대를 본질 즉 존재에 의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헤겔이 진리는 실체로서뿐 아니라 주체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한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레비나스와 미셸 앙리의 철학은 바로 혼동될 수 없는 이 두 종류의 존재 혹은 실체를 구분하는 데에 있다.   


사브리나 쿠자노 - 『야만』에서 당신이 우리 시대의,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인류의 위기, 즉 갈릴레이가 과학에 준 의미에서, 과학의 지식이 점진적으로 삶의 지식을 점진적으로 제거한다고 진단했을 때, 당신은 현대에 대해 비관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것은 갈릴레이에 대한 소송인가?


미셸 앙리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삶의 '지식', 즉 이 삶의 각각의 양태들, 우리의 욕구에 고유한 지식의 제거가 아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른 자는 그가 배가 고프며, 목이 마르다는 것을 알며, 고통을 견디는 자는 그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안다. 욕망하는 자는 결핍, 불안을 느끼고 견디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반박되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주변에 놓인 사물들의 색깔을 보는 자, 소리, 세계의 소음을 듣는 자. 모든 종류의 감각들ㅡ추위/차가움, 더위.뜨거움 등등 ㅡ을 느끼는 자는 그가 그것을 느끼는 동안은 그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삶의 지식에 반대할 수 없다. 삶은 이런 힘force과 이런 꺽을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지고 말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 안에서, 그가 살아있는 자인 한에서, 그런 동안, 삶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이 지식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항상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그들에게 감각적인 세계인 이 세계ㅡ이 실재를 믿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항상 이 감각적인 세계의 실재를 믿어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것의 현전 안에서 느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들의 감각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항상 감각적 세계에 의해 행동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느끼는 것에 의해, 그들의 배고픔, 그들의 목마름, 그들의 욕구들, 그리고 그들의 욕망들, 그들의 두려움에 의해 항상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릴레이에 의해 행해진 그리고 모든 근대를 결정한 과학적 혁명은 오랫동안 항상 인간의  행위와 지식이 의존했던 감각적 세계가 환영적illusion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사물들은 색도 소리도 냄새도 뜨껍지도 차갑지도 않다. 실재의 세계는 연장된 물질적 (신)체corps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각적 성질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실재 세계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는 것을 허락하는 지식은 감성, 삶의 지식이 아니라, 물질적 사물들의 공간적 형식들의 객관적인 인식, 즉 기하학, 데카르트가 말하듯, 수학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는 인식이다. 삶의 지식은 실질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으로 다뤄진다. 다시 말하면, 환영처럼, 단순한 가상처럼 다뤄진다. 이것은 우리 인간 동물의 우연적인 생물학적인 조직화로부터 유래한다. 삶의 가상들에 부여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은 따라서 신과학의 진정한 지식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제 이 진정한 지식, 객관적 실재의 세계의 기하학적-수학적 지식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의 눈 앞에서 보는 것으로 과학과 기술의 지배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힘pouvoir의 이전pasationㅡ삶에서 컴퓨터로의 이전ㅡ이다.


갈릴레에 대한 소송?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갈릴레이는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추종되었으며, 결국 그가 발명한 과학은 보편적인 믿음이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반박하는 것은 절대로 물질적 우주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고 객관적인 지식의 정당성, 그 결과들의 실증성이 아니다. 내가 반박하는 것은 이런 유형의 지식이 유일하고 진정한 지식이라는 믿음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삶의 지식의 제거와 그것의 은폐이다.


이제 우리가 삶이 우선 가장 기본적인 형태들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 윤리, 종교 정신성spiritualité 일반의 형태 하에서 문화를 산출한다고 가정한다면, 삶의 제거는 모든 모든 거대한 문화에 대한 제거를 의미한다. 갈릴레이 지식의 전제적인 전개는 이 문화의 제거와 짝을 이룬다. 바로 여기에 근대의 결정적이고 비극적인 성격이, 그 "야만성"이 존재한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이 실천적 지식과 동일시한 삶의 지식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철학자로 맑스를 말한다. 당신은 이 철학자의 사유와 우리가 맑시즘이라고 부르는 것과를 구분했다. 이 사유에 대해서ㅡ그의 이름으로 이미 이 세계 안에서 완성되었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면ㅡ우리가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앙리 - 맑스의 사유가 잘못 알려진 것은 두 이유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맑스의 텍스트와 얽힌 놀라운 역사이다. 1842년에서 1846에 써진 그의 주요한 텍스트들, 전통적인 사유의 진정한 전복을 실행한 『헤겔의 국가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독일 이데올로기』는 거의 일세기 후인 1932년에 와서야  비로소 알려진다. 반면 맑시즘은 이미 오래 전에 소비에트 정권 아래에서 공식적인 독트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이것은 레닌으로부터 교리의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같은 이유로 프랑스의 맑시스트, 특히 알튀세 학파는 소위 "젊은 부르주와 독일인"의 텍스트를 공식적인 교리의 이름으로 제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텍스트들에서 우리는 '실천'으로서, 다시 말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신체적 활동으로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으로 새로운 개념화의 용출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이 신체적 활동은 맑스가 그의 경제 분석의 토대로서 놓은, 그리고 그의 최후의 수고들에서 사회적 체계의 모태le naturant로서 나타나는 '노동' 혹은 더 정확히 "노동의 주관적인 힘"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수고들도 마찬가지로 거의 알려지지도 거의 주석되지도 않았다. 그의 초기의 젊었을 때의 글들도 그것들이 맑시즘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같은 이유로 거의 주석되지 않았다. 맑시즘에서 실재는 경제적인 실재이다. 그런데 맑스에게 경제적인 실재는 그 자체 양적으로 질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실재적인 삶을 대체하는 이념들, 추상들, 비실재들의 총합일 뿐이다. 이것들은 계산 "불가능한" 노동을 계산하고자 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전 경제적인 세계를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아직도 맑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맑시즘절대로 맑스의 사유가 아니라이 공산주의의 붕괴의 책임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반대로 살아있는 개인적인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활동을 실재의 토대에 놓은 이 사유는, 왜 금융 자본주의와 물질적인 기술이 서로를 지지하면서 맹위를 떨치는지를,그리고 추상적인 공산주의와 마찬가지 이유로자본주의가 개인들의 실재적인 삶을 이념성으로 대체하기 때문에인류를 인류의 붕괴로 인도할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브리나 쿠자노 - 유럽 과학의 『위기』에서, 후설은 과학의 모든 이념성과 개념화는 감각적인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들은 설명해야 할 과제를 가진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들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인 이념화의 과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 활동을 후설은 체험Erlebnis라고 부른다. 그런데 당신은 후설도 고전적인 사유의 궁지impasse를 피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앙리 - 사실, 후설은 모든 과학적인 전개, 특히 갈릴레이의 근대 과학의 전개를 자연주의를 회피하는 초월론적인 의식의 활동과 관계시킨다. 초월론적 의식의 이런 참조는 후설 현상학에서 지속적이다. 이것은 다만 과학과 과학적인 이념성들과 관계할 뿐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의 객관성, 즉 일반 지각, 상상, 기억, 미적, 문화적 도덕적 등등의 영역의 대상들의 객관성과 관계한다. 그래서 이 초월론적인 의식의 자아, 『위기』에 따르면 "궁극적인 심급으로 기능하는 이 자아"는 인간 경험 일반, "모든 존재의 영역"의 진정한 구성적인 원리이다. 다른 한편,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이 초월론적인 의식은 삶으로서, 즉 체험Erlebnis으로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이 고전적인 사유의 궁지에 물려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모태로서 이해되는 이 의식이 본질적으로 세계로, 세계를 구성하는 객관성들의 종합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 의식의 ""은 사물들의 구성 안에서 고갈된다. 후설은 더 이상 바깥과의 지향적인 관계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의식의 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삶은 후설에게 전적으로 "익명" 안에 빠져있다. 지속적으로 삶을 회피하는 초월론적인 삶의 현상학의 이 역설은 바로 후설의 현상학이 극복하고자, 피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 시도는 다름 아닌 그의 현상학적 방법이다. 즉 끊임없이 다시 취해지고, 끊임없이 실패가 정해진 "현상학적인 환원"이다. 환원이 의도하는 것은 정확히 의식의 초월론적인 삶을 그 자체로, 있는 바의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고유한 삶인 이 삶을 의식은 명증성l'évidence 안에서, 봄le voir 안에서sehen und fassen, 다시 말해 대상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이 환원은 삶에 대한 반성이다. 다른 한편, 후설은 이 삶 그 자체를 지향적인 삶과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의식의 흐름의 자기-계시auto-révélation가 있다, 그런데 이 자기-계시는 여전히 지향성으로부터 나오고, 의식은 지향적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사실 안에 존재한다. 모든 것은 의식이 지향적으로, '간격' 안에서 그것 덕분에 사물들과 관계하는 듯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명백하게, 우리의 존재의 토대le fond와 관계하는 것에서,『현시의 본질』의 1부에서 우리가 고발했던 "존재론적 일원론"의 테제들을 다시 발견한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의 모든 테제들은 하나의 현상성의 개념화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전 서양철학의 전개를 규정했다는 것을 드러내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 그것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 거리 덕분에 나는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 고전 철학에서, 의식은 앞에 놓는 힘이며, 이것에 의해서 보는 것을 허락하는 힘, 독일어 Vor-stellen이 의미하는 것, 즉 앞에 정립하는 것poser devant이다. 서양 철학이 전제하는 이 유일한 전제는 당신이 "존재론적 일원론monisme ontologique"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왜 하이데거, "존재론적 차이"의 사상가로서 알려진, 또 의심의 여지없이 "의식"과 "표상"의 개념을 제거한 하이데거가 이 비판을 피할 수 없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미셸 앙리 - 사실 하이게거는 의식과 표상의 개념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비판을 행했다. 그에 의하면, 이 두 개념은 모두 인간을 경험의 원리로 놓으며, 인간을 모든 사물들이 복종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ㅡ사물들이 이 "주체"에 대한 "대상들"과 다른 것이 아닌 한에서 말이다. 이것은 '나는 표상한다je me représente. 다시 말해,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객관성을 전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객관성은 이 주체와의 관계 안에서만, 그것에 대해서만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이 근대의 인간,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 인간그것은 또한 유대적 인간의 경우이기도 했다을 그리스적 인간에 대립시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적 인간에게 세계는 "대상"이 아니라, "얼굴 안에en face, in das Aussehen"* 존재하며, 결국 자연Nature과,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 의존하는 대신에 이 자연이 인간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속한 자연과 다르지 않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이 대립을 넘어서 우리가 현상학의 전정한 주제, 즉 현상성의 개념화 그 자체를 질문한다면, 우리는 이 현상성은 하이데거에서 진정으로 문제제기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예전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의식과 표상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에서 후설의 지향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후설의 지향성은 사실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자아로부터 전개된다. 그리고 이 자아는 초월론적인 의식을 새로이 모든 경험의 원리로서 놓는다. 그런데 지향성은 본질적으로 현상성, 원초적인 보여주기faire-voir를 설립하는 자이며, 지향성은 자신을 자기 밖으로 던지면서, 하이데거 철학의 중심 동기leitmotiv인 '세계의 열림' 안에서 이 현상성을 도래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그의 존재와 시간2부에서 처음으로 근본적인 정교화를 발견한다. 여기서 현상성의 용출은 명시적으로 시간성과 동일화되고, 시간성은 삼차원적 탈-자의 형식 아래에서 바깥Dehors의 밖에 도래la venue au dehors de Dehors와 동일화된다. 즉 다자인Dasein이 지속적으로 자신을 던지는 미래, 현재, 과거의 삼차원적 탈-자의 형식과 동일화된다. "시간성은 즉자 대자적으로 자기 밖이다Zeitichkeit ist das Ausser sich in sich und für sich."


- 위에서 앙리가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불어로 "en face"라고 쓰고 있는 것은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으면서 희랍어 'eidos'를 독일어'Aussehen'으로 옮긴 것을 불어로 옮긴 것이다. 혹자는 'en face' 대신에 'dans le visage'라고도 옮긴다. 하이데거는 'eidos'를 'Aussehen'으로 옮기면서 "Aussehen은 단지 모습aspect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밖으로 나오는 어떤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의 "어떻게 'physis(자연)'를 규정할 것인가?"를 참조할 수 있다.

 

사브리나 쿠자노 - 무엇이 당신이 비판하는 이 존재론적 일원론에 대립하는가?

 

미셸 앙리 - 삶이다. 다만, 삶이 세계의 나타남에 대립하는 것은, 삶이 순수한 현상성으로, 현상성의 가장 본래적인 현상화로서 이해된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이 현상학적인 삶은 따라서 갈릴레이적인 전통을 가진 현대 생물학의 대상으로서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생물학에 의하면 삶은 물리학이 연구하는 물질적인 과정들과 동질적인 과정의 종합이며, 이 과정들은 초월론적인 삶이 현상성의 현상화의 본래적인 양식으로 지시하는 순수한 현상성에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삶의 현상성은 세계의 현상성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차이Différence로서, 순수한 외재화로서 세계는 그것이 우리에게 외적인 것으로, 타자로, 다른 것으로 드러내는 모든 것을 탈은폐한다. 세계에 의한, 다시 말해 세계에 그것의 현시를 요구하는 모든 촉발은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이다. 반대로 삶이 계시하는 것/현시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삶은 스스로 계시된다se révèle. 삶은 자기-계시, 자기-촉발이다. 다시 말해, 삶은, 절대로 지평의 간격 안에서 다른 것을 현시하면서, 가시적으로 만들면서 초월성으로서, 밖으로의 추월dépassement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대로 삶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밖으로 나감이 없이, 따라서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면서, 다른 것을 드러내면서가 아니라, 자기를 계시한다. 삶의 이런 결정적인 속성은 삶의 각각의 양태들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진다.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인상, 통증, 고통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딘다. 그렇게 각각의 양태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속성은 사실 그것의 특수성 안에서 각각에 인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속성을 쾌락 혹은 즐거움 안에서처럼 고통, 불안 혹은 권태 안에서도 발견한다. 삶이, 고통을 고통에게 주고, 삶의 모든 다른 인상 혹은 양태와 마찬가지로 고통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도록 하는 '자기-증여', '자기-계시'인 한에서, 이것은[이 속성은] 삶, 초월론적인 현상학적인 삶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 구체적인 자기-계시, 즉 모든 인상이 스스로 각인되는 이 자기-인상성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삶의 현상학적인 실체를 구성하는 정감성Affectiivté, 순수하고 본래적인 정감성이다. 이런 이유로 삶의 각각의 양태들의 정감성은 따라서 살아있는 것으로서 정감적인 정조tonalité를 가진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은 내재성을 정감성affectivté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서도 정감성은 사물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되지 않는가?

 

미셸 앙리 - 그렇다 당신이 잘 말한 것처럼 하이데거는 정감성을 사물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구성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그에게 사물들은 우리에세 세계 안에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삼차원적인 시간성의 탈자적으로 열린 가시성의 탈자적 지평 안에서 주어진다. 사물들에 세계 안에서 주어지기 전에, 정감성은 우리에게 세계 그 자체를 탈은폐한다. 하이데거는 이 지평을 "무의 지평"이라고 부른다. 더 정확하게 그것은 평범한 정감성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계의 무를 탈은폐하는 "불안"의 "근본적인 정조"이다. 불안이 불안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미래의 지평 앞으로, 우리의 죽음과 다르지 않은 미래의 지평으로 우리를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평으로부터 우리 자신인 다자인으로 역류한 불안은 우리를 마치 이 세계 안에 죽기 위해 던져진 존재로 발견한다.


불안이라는 근본적인 정조로부터 정감성을 설명하는 하이데거의 분석은 따라서 그 분석의 본질적인 공백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하이데거는 정감성을 시간성의 현상으로 환원한다. 이로써 정감성과 불안에 고유한 본질이 상실된다. 


우리에게 세계를 탈은폐하기 전에, 불안의 현상이 있어야 한다면, 다만 단순하고 순수하게 가정된그 자체 안에서, 그것의 정감성 안에서 체험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삶 안에서 삶에 의해서 자기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불안 안에서 탈은폐된 세계의 현상만이 아니라, 우선 불안은 스스로 계시되어야 한다. 정감성은 이 자기-계시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삶 그 자체의 순순한 현상학적인 물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의 현상으로 환원된 그것의 현상성으로,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자기를 만지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견디지 않는, 고통을 겪지도 자기를 향유하지도 않는 순수한 외재성으로 환원된 정감성은 단순히 사라진다.

 

시브리나 쿠자노 - 하이데거에서 초월성을 말하는 것은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유한성은 존재론적이고 인식적인 영역 위에 정립되기 위해서, 종교적이고 키르케고르적인 영역과 분리된다. 무한한 사유의 가설이 어느 지점에서 부조리한 것이 되는 만큼 사유는 이러한 직관에 접근한다. 유한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셸 앙리 - 모든 근본적인 철학적인 질문은 현상학적인 토대로 보내지며, 이것으로부터 모든 문제는 이해된다. 그 이해는, 그것이 세계의 나타남의 토대 위해서 작동하는지 아니면 삶의 자기-계시에 의해서 작동하는지에 따라서,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유한성은 세계의 지평의 유한성이다. 그리고 이 지평은 빛의 장소이며, 숲 안에 빛이 드는 곳clairière이다. 그것은 유한하다. 나타남이 유한하며, 존재자는, 그가 끝없이 빛의 장소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로부터 나가는 놀이에 따라서, 이차적으로 유한하다. 삶의 현상학 안에서 유한성은 삶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삶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살아있는 것un vivant이다. 우리의 유한성이 이해되는 것은 다만 이 절대적인 삶과 살아있는 것과의 관계 안에서 뿐이다. 한편으로, 나는 자아, 살아있는 초월론적인 자기이다. 그런데 나의 이 자아moi 안에 나를 데려오는 자는 내가 아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유한하며, 나는 절대적으로 유한성이다나는, 영원한 나인 자기이기 위해, 다만 스스로 자기를 가져오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증여 안에서만, 자아 안에 이르고, 나 자신에서 주어진다. 나의 유한성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일수록, 절대적인 삶이 나를 나에게 주는 밀착은 더더욱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 밀착은 삶이 영원히 자기에 밀착하는 밀착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유한성에 대한 앙리의 사유는 정확히 레비나스와 혼동된다.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유한성과 다르게 이해되는 이 유한성은 특히 근본적인 수동성에 대한 두 철학자의 태도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레비나스가 "나는 나의 존재의 이유를 내 안에 가지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앙리에서 "나는 나의 존재에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라고 표현된다. 그 표현의 차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말하는 방식이 무엇이든지간에, 나의 존재의 근본적인 수동성에서 그들은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글에 처음에서 제시한 토대와 본질을 구분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이 생각하는 삶은 신비적인 것들의 절대와 결합한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의 철학을 기독교 안에서 발견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전에 지금 현상학에 의해 알려진 "신학적인 전향"을 예비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셸 앙리 - 만일 존재하는 유일한 삶이 자기 안에 자기를 가져오는 절대적인 삶이라면, 나에에 나 자신을 주는 것이 결국 이 유일한 삶이라면, 이 때, , 삶의 근본적인 현상학이 사유하는 그런 삶은, 삶이 절대와 동일화되는 지점에서 신비적인 것들의 절대와 닮는다. 당신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나의 최근의 저서 안에서 삶의 현상학은 기독교를 발견한다. 나는 기독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에서 출발했다. 아주 늦게 신약성서의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어떤 감동을 가지고 이 텍스트 안에 함축된 테제들이 나의 철학의 내적인 전개를 이끌었던 테제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1°/ /생명으로서 절대()의 정의, 2°/ 자기 안에 도래로서 그리고 자기 시련으로서 삶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삶 안에서 삶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며 자기에서 계시되는 자기성삶의 말씀을 낳는다. 이런 방식으로 말씀은 이 과정에 의해 도래하고, 자신의 완성의 구성요소로서 이 과정에 속하며, 또한 그것과 동시대적이다.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3°/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자신들 각각인 살아있는 초월론적인 자기는, 절대로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이 삶의 내재적인 과정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나에게 현대 현상학의 신학적인 전향은 현상학의 " 이탈déviation" 혹은 변질이 아니라 그것의 완성일 뿐이다.

사브리나 쿠자노 - 당신의 철학은 밤의 철학이다. 그것에 의해 당신은 사유에 대한 삶의 우위성supériorité을 부여한다. 그런데 사유는 삶을 생각할 수 있는가?

 

미셸 앙리 - 후설 현상학의 가장 심오한 기획은 삶을후설이 종종 절대와 혼동했던 자아의 초월론적인 삶을생각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현상학적인 환원은 이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다시 취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나 실패와 아포리에 이른다. 왜냐하면 사유에 의해서, 우리를 세계로 던지는 지향적 시선 안에서sehen und fassen삶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삶은 절대로 자리하지 않는다. 삶만이 우리에게 삶에 접근을 제공한다. 삶은 구체적인 자기-인상성, 우리의 살인 정념적인 직접성을 따라서 계시된다. 사유가 삶 그 자체에 도래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삶을 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사유가 데카르트에 의해서 통각된 그 직접성 안에서 본래적으로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바로 삶이다. 살아있는 사유로서 사유 그 자체를 주는 것은 삶이다. 맑스와 더불어 말한다면 우리가 시작한 곳에서 끝내기 위해 - “사유는 삶의 한 양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