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르네 샤르, 아침결의 붉음

aurorepark 2010. 11. 26. 15:28
비오는 아침에 시집이 도착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보통 주문해서 오는 시간보다 조금 많이 걸렸다. 아마도 가게 창고에 없었나보다. 출판사 창고를 뒤져서, 출판사에서  매장으로, 매장에서 우체국으로, 우체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렸나보다.


르네 샤르 René Char의 Les Matinaux, 『아침결』, "아침결"이란 "아침 동안"이라는 우리말이다. 이 시집 안에는 Rougeur des Matinaux 『아침결의 붉음』이 같이 실려있다. 이 시는 각 단락마다 번호가 붙어있다. 27개의 단락이다. 



I


L'état d'esprit du soleil levant est allégresse maglé

le joue cruel et le souvenir de la nuit.  La teint du

caillot devient la rougeur de l'aurore.


일어나는 태양의 정신의 상태는 잔인한 날에도 불구하고

밤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아주 천천히 온다. 자갈은

새벽 빛의 붉음을 입는다.



III


Impose ta chance, serre ton bonheur et va vers

ton risque. A te regarder, ils s'habitueront.


기회를 잡고 행복을 꽉 끌어안고 위험으로

향하라. 그러면 너를 바라보는 것에, 그것들은 익숙해질 것이다.



VII


L'intensité est silencieuse. Son image ne l'est pas.

(j'aime qui m'éblouit puis accentue l'obscur à l'intérieur de moi.)


힘은 말이 없다. 그것의 이미지는 힘이 아니다.

(나를 눈멀게 하고 내 안에서 어둠을 강화하는 그 힘을 나는 좋아한다.)

 


XV


Quand nous disons : le coeur (et le disons à regret),

il s'agit du coeur attisant que recouvre la chair miraculeuse

et commune, et qui peut à chaque instant

cesser de battre et d'accorder


우리가 마음 ( 그리고 후회스런 마음으로)라고 말할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적같은 그리고 공통의 살이 감추는 생생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매 순간

뛰기를 그칠수 있으며, 일치하기를 그칠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XVI


Entre ton plus grand bien et leur moindre mal

rougeoie la poésie.


너의 가장 큰 선과 그들의 가장 적은 악 사이에서

시는 붉어진다.



- 시인이 VII에서 말하는, 그가 좋아하는, 그를 눈멀게 하는, 그의 어둠을 강화하는 intensité, 힘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의 이미지는 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말하는 침묵은 ""듣는 눈"을 위해 귀가 먹은 자 주변에서 울리는"(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67), 마치 붉음이 불어지는 것처럼, 동사 안에서 울리고 밝히는 침묵이 아니다. 이러한 침묵은 "존재의 파종하는 침묵으로, 그것에 의해 존재자들은 그들의 동일성 안에서 밝혀지고 드러난다." 이 침묵은 귀를 멀게하는 웅웅대는 아무 것도 없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가 있는, 그로인해 귀를 멀게하는 그런 부재, 침묵, 일 이 아 l'Il y a 의 침묵이 아니다. 이 울리는, 스스로 울리는 침묵은 바로 존재의 양태이고 존재의 본질이다. 이 침묵은 밤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빛으로 진리 안에서 울린다. 그럼 시인이 말하는 이 침묵, 하이데거의 침묵과 다른 이 침묵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 이미지는 그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 이미지는 하양 위의 검정을 자신의 드러남의 조건으로 가지는 것이다. 마치 시인이 흰종이 위에 검은 글자를 적듯이 말이다.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그가 좋아하는, 그를 눈멀게하는 그 힘이 이미지가 아니라면, 그 힘은 빛의 조건 위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면, 시인의 시, 이미지는 어떻게 이 힘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말레비치가 흰바탕 위에 흰것을, 하양 위에 하양을 그린 것처럼, 흰종이 위에 흰글씨를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작품의 침묵을 어떻게 가능한가? 그 부재는, 침묵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는가? 이미지 없는 그림이 어떻게 가능한가? 표상의 부재 하에서 어떻게 문학이 가능하고 그림이 가능하고 나아가 철학이 가능한가? "듣는 눈"이라고 레비나스가 부르는, "존재의 현상성" 없이 어떻게 드러남이 가능한가? 말레비치의 "Le carré blanc, 흰 네모"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음에도 그것은 그림이다. 이 그림 아닌 그림이 지향하는 공간성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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