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vie est hésitation devant la naissance."
"나의 삶은 탄생 앞에서 머뭇거린다."
프란츠 카프카. 『일기』, 1922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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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vie 나의 삶, hésitation 주저, naissance 탄생, 그리고 여기에 한 단어, 선, la ligne을 더하면, 삶, 나의 삶, 탄생, 주저, 머뭇거림, 머뭄, 선 위에, 뛰어오를 수도 그렇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는 그 선 위에, 열린자와 열림 사이에, 존재자와 존재 사이에, 삶과 죽음 사이에, 성이, 선 위에서의 투쟁이 있다.
<성>의 첫 문장은,
"K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있었다. 성의 능선은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큰 성의 현전을 알려주는 조금의 빛의 흔적도 없었다. K는 마을로 그 길이 이어지는 나무 다리 위에 오래 멈춰섰다. 그리고 그의 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오랫동안 향해있었다."
여기에 기술된 성Schlosse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공허, 보이지 않는 것, 부재이다. 성은 하이데거의 열린자인 존재자 Erschlossene도 열림 자체인 존재 Erschlossenheit도 아니다. 하이데거가 "해결", 즉 닫힌 것을 여는, 가려진 것을 들어올리는, 자기 결단으로서의 해결(불어로 하이데거의
Entschlossenheit는 résolusion, 닫힌 것, 성을 여는 것, ent-schlossen이다)은 무한히 열린 가시적인 진리, Erschrossenheit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열림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이미 열려있는 자이어야 하며, 열려있는 자는 닫힌 것으로 들어갈 수 없다. 플라톤이 아카데미의 입구에 적었듯이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의 진리를 상징한다. K, 헛되이 성에 이르고자 하는 측량사 Landvermesser, arpenteur, géomètre 기하학자는 이 진리의 불가능성을 몸소 겪는다. 블랑쇼의 카프카, 종종 블랑쇼가 자신과 혼동하는 카프카, 그의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에서 그리고 그의 "상상적인 것의 두 해석"에서 "시체의 이미지"에서 말하듯,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죽음처럼 아무 것도 남김없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체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 남김없이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세계의 아무 것도 아닌 것, 세계가 제공하는 것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하면 존재자도 존재도 아닌 것, 블랑쇼의 용어로 중성적인 것을 지시한다. 중성적인 것은, 블랑쇼에 의하면, 그것은 세계로의 열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존재자의 제거도 아니다. 그것은 이 제거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것, 남아있는 것이다. 블랑쇼는 "죽음의 불가능성"이라고 부른다. 그가 카프카의 문학의 개념에서 끌어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블랑쇼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지배한다, 이것은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은 탄생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의 부재라는 것을 말한다("끊임없이 너는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만일 밤이, 갑자기 의심에 놓인다면, 더 이상 낮도 밤도 없을 것이다. 다만 모호한, 어슴프레한 빛만이 남는다. 그것은 대낮의 기억이거나 한 밤의 후회일 수 있으며, 그것은 태양의 종말이거나, 종말의 태양일 수 있다. 실존은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재되어 있는지 (이 경우 우리는 여기서 헛되이 그것을 파악하고자 한다), 혹은 그것에 갖혀 있는지(이 경우 우리는 절망적으로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알 수 없는 규정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실존은 가장 강한 의미에서 유배이다: 우리는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72)
성은 카프카에게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투쟁의 대상, 그가 도달하고자 한 것이었던 그의 아버지일 수도, 그의 여자들의 세계일 수도, 그리고 그에게 성은 그가 항상 도달하고자 한 문학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잃어버린 땅 가나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는 그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는다"(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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