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 하찮음이 진지함이 된다면
우리에게는 『안과 밖: 외국인의 조건』으로 처음 소개 되었던 일상의 철학자, 깡귀렘과 푸코의 유산 아래서 일상의 삶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 그 삶들 안에 각인된 상처받을 수 있음을 질문하는 철학자, 기욤 르 블랑은 이번에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철학에서 제외된 일상의 삶들 안에 각인된 ‘하찮음’을 질문한다. 누가 어떤 것은 미리 사유가 될 자격이 있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할까?
1년에 한 번은 마라톤에 참여하는 주자이기도 한 철학자-주자인 르 블랑은 이 책을 통해 오늘날,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 그 세계를 따라잡기 위해 뛰는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쫓아서 달리는가? 매일 아침 직장으로 학교로 일, 욕망, 권력... 무엇인가를 쫓아 달리는 이 일상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철학이란 거대한 철학사나 위대한 철학자들의 텍스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 자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들 각자가 일상 속에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철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의 작은 일상 속에는 자신의 실존을 노래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철학적인 계기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여행일 수도, 운동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일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러 떠나는 여행은 어떤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쩜 어느 주말 나른한 오후, 당신이 신발장에서 꺼낸 먼지 덮인 운동화를 신고 한강 고수분지를 달리면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의 한 활동인 달리기로부터 일상의 작은 철학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달리기의 철학이 아니라, 달리기 안에서 달리면서 하는 철학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지시하듯이ㅡ형이하학적 성찰ㅡ. 데카르트에 반해서, 우리 자신의 신체로부터 출발해서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실험실”로 해서, 시속 12킬로미터의 성찰의 방식으로ㅡ각자 자신의 리듬으로ㅡ, 핸드폰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철학, 노마드의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에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42개의 이정표와 백여 개의 단어들은 마라톤의 공식적인 거리인 42,195km를 상징적으로 지시한다. 킬로미터를 거듭할수록 텍스트는 어려워진다. 작가가 30장에 가장 어려운 텍스트ㅡ형이하학적 성찰ㅡ를 놓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라톤에서 가장 힘들다는 30킬로미터에서 보통 주자들은 바닥에 주저 않거나 거의 빈사 상태로 계속 달리기를 선택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주자처럼 여기서 멈출 수도 계속 읽기를ㅡ달리기를ㅡ결심할 수도 있다. “달리기는 결심에 속하는 인간적 행위다.” 주자는 반복되는 선택ㅡ계속 달릴 것인가 말 것인가?ㅡ아래서 자유를 시험하는 “형이상학의 실험자”다. 선택은 아무도 당신 대신에 달려줄 수 없듯이 당신 자신에게 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이 달리면서 구성된 것이듯이, 이 책 속에 도입된 모든 사유들은 이동성의 테스트를 거친 것들이다. 이렇게 저자가 제안하는 달리면서 하는 철학은 신체의 상태만큼 철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적으로 마라톤맨은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놀이를 증명하는 칸트주의자로 시작해서, (...) 신체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다시 기운을 불어넣을 의지를 불러낼 때 그는 여전히 데카르트주의자로 머물다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그는 결국 스피노자주의자로 끝이 난다.” 달리면서 하는 철학은 이 변형들을 영구히 수용할 진리를 불러내는 대신에, 이 변형들을 주자의 신체 상태들과 더불어 변화는 철학적 가설들과 연동시킨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도 홀로 마라톤맨이 겪는 이 모든 신체적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자는ㅡ달리는 당신은ㅡ자신의 살아있는 경험의 흐름을 따라서, 매 킬로미터에서 자신의 정신이, 자신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 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철학사 안에서 형이상학적 선택들ㅡ신체, 정신, 그 둘의 관계, 자유, 의지, 공간, 시간 등등ㅡ을 불러내면서 몸소 자신의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실험을 하는 자다. 실험실에서 자동차의 강도를 테스트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실험일 뿐이다. 마라톤과 같은 달리기에 독자들을 초대하면서, 저자 스스로 마라톤 주자가 되어서, 달리기의 극장을 전개하는 것은 책과 저자의 근엄한 참조의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달리기를 성찰의 주제로 다룬 적이 없다. (이 책에서 우리가 즐겁게 발견하는 몇몇 예외ㅡ베르그손, 들뢰즈, 가타리ㅡ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 거북이는 찬양하고, 용감하고 미친 듯이 달리는 아킬레스는 실격시켰듯이, 플라톤 이래로, 본질에 대한 사랑은 하찮음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필연적이고, 빛나고 명상할만한 가치가 있는 부동의 이념만을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지나가는 “달리기의 하찮음은 사유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없는, 딱 한 번 사용된 낱말(hapax)”과 같았다. 그러나 일상의 하찮음이 진지함이 된다면,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고, 우리가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가 바쁜 일과 중에도 절대적으로 달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집착이거나 그것과 유사한 것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달리기의 하찮음은 절신한 것이 된다. 하찮음의 반복보다 더 탁월한 실존의 증거가 있을까? 삶은 사실 이유 없는 제스처의 긍정 속에서만 유지되지 않는가? “달리기와 같은 하찮은 행동의 반복은 순수한 우연을 반짝이게 하고, 우리가 전적으로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제스처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우연성은 그 권리를 획득하고, 우리의 일상은 수수께끼가 된다.
왜 매일 이른 아침 혹은 정오 혹은 퇴근 후 사람들은 달리는가? 어찌 보면 달리기는 더 동적이고 더 유동적이고 더 빠른 리듬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증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달리기는 증상 속에서 파악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달리기의 환원 불가능한 모습들을 발명하면서 증상을 넘어서기를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선택이 고갈되고, 달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발견과 세계의 발견을 위해, 보다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처럼 주자를 마치 시대의 병처럼, 다시 말해, 가장 강압적인 규범에 복종하는 주체로만 분석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만일 그가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관중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한 번이라도 달려봤다면, 달리기가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인간의 모든 모습과의 관계에서 옆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혼자 혹은 여럿이 달리면서, 우리는 결국 달리기는 역설적으로 자기 발견과 세계와의 연대를 확인하면서 이동성 안에서 균형을 탐구하는ㅡ자신에게 적절한 리듬을 발견하는ㅡ느림을 배우는 정신적 수행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라톤은 고독하지만 연대적이기도 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동원, 축제다.
결국 달리기에 당신을 초대하면서, 달리기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는 우리의 발아래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있어야 하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으며, 끝없이 달아나며, 찾아야 하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식의 대 악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또한 내가 그 안에 머문다면 지식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권력 안에서 이동하지 않는다면, 권력도 없을 것이다. 이제 달리기는 내일 알 수 있는 것을 미리 알 수 없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자는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영속적으로 자기 밖으로 미끄러진다. 풍경도 그를 잡을 수 없다. 달리기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다. 우리가 어떤 풍경, 장소에 자신을 기입하기 위해 달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달리기는 “영토 바깥에서(hors sol), 호의적인 무인지대(no man’s land)에서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을 모든 사물의 주인, 소유자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대조적으로 “달리기의 기술은 비-데카르트적인 기술로서 사물들을 버리고, 가난함 속에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세계를 방문하는 누군가”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