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할 수 없는inavouable, 말할 수 없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 왜? 수치스러워서, 모호해서, 비밀이라서, 감춰져 있어서? 항상 말하기le dire는 말해진 것le dit을 위반하기에? 말하기가 말해진 것에 앞서기에?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완성된 것으로서의 의미에서(항상 이 말이 함축하는 그 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작품oeuvr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끝냈다고 잠시 생각하는 작가의 펜 아래서 어둡게 깔려 있는 그 '고독' 때문에? 독자의 손에 넘어간 작품은 더 이상 작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작품'은 항상 '작품의 부재désoeuvrement'이기 때문에? 이 '부재'가, 이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고백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밝힐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그럼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따라서 고백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밝힐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에 측량사 K의, 오르페우스의 '조바심'이, 블랑쇼가 카프카에 이어서 "본질적인 결함"이라고 부르는 조바심이, 그치지 않는 실수, 실패, 상실에 이르는 '죄'가, 조바심이 있지 않은가? 이 조바심이 문학, 철학, 공동체의 가능성의 조건이 아닌가? 여기에 블랑쇼가 inavouable이라고 형용사를 붙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블랑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난의 글쓰기(19) (0) | 2020.11.10 |
---|---|
저 너머로의 발걸음-역자해제 (0) | 2019.08.19 |
안셈 키퍼, 폴 슬랑에게, 잿꽃 (0) | 2016.02.23 |
le pas au-delà, 넘어감이 없이 넘어가는 걸음 (0) | 2016.01.06 |
글쓰기, 단편적인 것, (0) | 2015.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