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재난의 글쓰기(19)

aurorepark 2020. 11. 10. 21:55

오랬동안 놓았던 글쓰기를 다시, 

 

◆ 내가 나를 기진맥진 하게 하는 타자의 독촉, 혹은 명령 안에서 타자를 환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설프게 유일한 허약함(불행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찮고 미친 부분)에 의해 나는  부패하고 부식한, 전적으로 소외된 나의 자아와 더불어 (세기 초에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발견한 곳은 로마 성벽 아래 나병환자들과 거지들 가운데에서다)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라고 불려졌기 때문이다. (42)

 

 

 

◆ 타자가 먼 자le lointain(절대적으로 먼 자로부터 오는, 그리고 그의 흔적ㅡ영원의 흔적,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ㅡ을 지니는 얼굴)인 한에서, 부재의 흔적 안에서 얼굴의 타자가 나에게 명령하는 유일한 관계는 존재 너머au-delà de l'être, 즉 자기 자신 혹은 자기성ipséité이 (레비나스는 "존재 너머는 자기-자신으로 정의될 수 없는 3인칭이라고 말한다)  아닌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더 이상 먼 자가 아니고, 극단의 수동성으로 나를 열 정도로 나를 짖누르는 이웃le prochain일 때, 상처받고, 고발되고, 박해받는 노출로서, 차이에 버려진 감성으로서 주체성은 타자에 이어서 존재 밖으로hors de l'être 떨어지고, 타인에게 바쳐진 잴 수 없는 희생과 같은 줌don 그 자체ㅡ기호의 증여donation de signeㅡ안에서, 존재 너머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주체성은 타인과, 얼굴과 같은 이름으로 질서를 방해하고 존재와 뚜렷이 구분되는 수수께끼이다. 현상과 경험 바깥에 놓인 범상치 않은 놀라운 경험이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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