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서둘러서 무덤에 묻지 않기 위해
1. 블랑쇼의 『저 너머로의 발걸음』Le pas au-delà(1973)은 소설도, 이야기도, 문학적 혹은 철학적 에세이도 아닌ㅡ이 모두인ㅡ이어짐이 없이 이어지는 단편적인 것들의 모음이다. 그의 최초의 진정한 "단편적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거의 읽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단편적인 것들, 부서진 것들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블랑쇼의 글쓰기의 리듬을 배반하게 된다. 단편적인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미궁'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블랑쇼 읽기의 가장 정직한 순간이다. '넘어감이 없이 넘어가는 이 발걸음le pas au-delà'은 "미궁과 같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궁처럼 처신하고, 그 자체 미궁의 구조를 가진다"(Derrida, 『해역』Parages, 37)고 데리다는 말한다. 가까이 가면서 멀어지는, 멀어지면서 가까이 가는 그 같은 발걸음으로 인해, 그 발걸음은 자신이 가진 거리/한계를 줄이면서/넘어서면서 동시에 새로운 거리/한계를 연다. 이렇게 '저 너머로의 발걸음 le pas au-delà'의 '발걸음le pas'은 이중적 기입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즉 부정의 부사로서 'pas'(not)는 명사로서 'le pas'(step) 즉 '발걸음'이 넘어서야 할 그 경계를 넘어섬이 없이 넘어가는 도약의 그 운동 한 가운데 존재한다. '저 너머로의 발걸음(le) pas au-delà', 그것은 글쓰기이고, 죽음이다. 다시 말해 가까이 오면서 멀어지는, 넘어가면서 넘어가지 못하는, 쓰면서 지워지는, 'le pas/발걸음/위반' 안에 기입된 'pas/부정/금지'이다. 그러나 'pas의 pas', 이것은 이중의 부정도, 변증도 아니다. 그것은 도달함이 없이 다만 끊임없이 접근하는, 넘어감이 없이 무한히 다가가는 발걸음/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이entre-temps"에 대한 기술이다. 그러나 금지는 위반을 앞서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적이다. 넘어가는 발걸음은 넘어가지 못하고 다만 또 다른 경계를 부를 뿐이다. 그것은 "죽어감을 위한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2. 책을 열면 저자는 "이 관계 안으로 들어가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유일하게 문장 앞에 마름모가 없는 문장. 예외. 관계 밖에 존재하는 것. 그런데 어떤 관계로 들어가자고 저자는 독자인 우리를 초대하는가? 이 책을 열고 이 문장을 읽은 당신은 "이미" 그 관계 속에, 적어도 저자와 독자인 당신이 만들 관계 속에ㅡ질문 속에ㅡ연루된다. 위태로운 마름모들을 따라가면서 당신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이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유의 무능과 만날 것이다. 이 죽음과 사유의 관계는 "시간,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저 너머로, 죽음으로 가는 이 발걸음은 시간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 발걸음은 우리를 시간의 바깥으로 이끈다. 그런데 그 바깥은 비시간적이라고 말해져서는 안된다. 그 시간의 밖은 다만 저 너머로 가는 발걸음이, 시간이 추락하는 곳일 뿐이다. 그 "추락은 허약하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그것은 "시간 안의 시간 밖hors du temps dans le temps"을 따라서 일어난다. 이 바깥ㅡ그, 중성적인 것ㅡ은 글쓰기가 우리를 유혹하는, 유인하는, 이끄는 곳이다. 결국 글쓰기가 우리를 부르는 곳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은 과거의 발걸음들, 과거의 글쓰기들, 과거의 그 두려움의 비밀을 간직하고, 그 아래에서 쓰는 것이 "우리"에게, 그런데 이미 사라진, 이미 우리 밖에 우리에게 허락되는 한에서 가능할 것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시간의ㅡ블랑쇼가 니체를 불러 영원회귀의 시간이라 부르는 시간의ㅡ공간내기/거리내기espacement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공간에 틈이 있는 것처럼 시간에 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에도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틈 안에서 우리는 글쓰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틈, 거리, 차이는 둘 간의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그 자체, 공간 그 자체에 속한 틈, 거리, 차이도 아니다. 속함이 한 실체의 속성을 보증한다면, 글쓰기는 처음부터 이 보증을 배제하는 글쓰기의 요구 안에 기입되기 때문이다. 모든 글쓰기의 행위는 이 간격, 이 단절을 함축한다. 글쓰기에 본질에 속하는 이 불연속이 사물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실재의 구조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세계는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부서진, 조각난 것일 것이다. 이때, 글쓰기는 이 조각난 것들에, 실재의 불연속에 대답일 것이며, 언어와의의 불연속적 관계일 것이다. "글쓰기가 이미 항상 언어와의ㅡ그것이 써진 것이든 말해진 것이든지 간에ㅡ단절"인 경우에 말이다.
3. "모든 것이 이미 모두 말해졌을 때, 글쓰기는 단편적인 것에 속한다." 이 진술은 블랑쇼의 글쓰기의 한 전제에 속한다. 블랑쇼가 '단편le fragment'과 구분해서 '단편적인 것le fragmentaire'이라고 쓰는 것은 조각난, 파편의, 불완전한 어떤 것을 말한다. 단편이 하나의 글쓰기의 스타일로서 짧고 축약적인 단상, 혹은 금언과 같은 단장斷章을 의미할 수 있다면, 단편적인 것은 그것이 길던 짧던 '완성'으로서 작품의 개념을 처음부터 지운다. 그런데 쓰기 전에 모든 것이 이미 다 말해졌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우선 글쓰기의 행위를 반복ㅡ영원회귀ㅡ으로 만드는 것, '말하기'를 '다시 말하기'로, 모든 글쓰기를 해석으로, 모든 글쓰기를 표절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창작자로서 작가의 무로부터 창조의 개념을 지우면서 글쓰기에서 순수한 창조의 개념을 처음부터 지운다. 이 진술이 가져오는 것들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다는 것은 예술가가 꿈꾸는 유사 신의 개념을 지운다. 그리고 "처음에 말이 있었다"라는 진술이 함축하는 시간의 연속성, 역사, 질서, 로고스, 전체성의 개념을 지운다. 글쓰기가 이미 말해진 것의 반복이라면, 시간, 역사의 반복은 동일한 것의 회귀와 만난다. 이러한 상태는 재시도로서 시작, 고유성으로서 탈소유, 차이로서 반복과 같은 논리를 가지고 글쓰기를 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조차도 처음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이 반복과 회귀로서의 글쓰기의 개념으로부터 글쓰기의 무한한 요구가 출현한다. "모든 것은 지워져야 하고, 모든 것은 지워질 것이다."
4. 이 책 안에 두 종류의 글쓰기 존재한다. 하나는 고딕체로(원문에는 이태릭체로), 하나는 정체로 되어있는 것이다. 고딕체로 되어 있는 부분은 우리가 보통 이야기의 장르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는 보통 문학적, 철학적 글쓰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블랑쇼가 죽어가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절대적인 분리로서의 죽음을 넘어서려는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반해서, 블랑쇼가 나눌 수 없는, 항상 나의 것인 근본적인 분리로서의 죽음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죽어가는 자와의 근접성, 죽어가는 자와의 공동체ㅡ블랑쇼가 나중에 고백할 수 없는/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부른 것ㅡ안에서다. 이 책에서 블랑쇼가 서로의 죽음에 노출되어 사는 "우애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ㅡ혹은 "우정"이라 부른 것ㅡ안에서다. "죽어가면서 너는 죽지 않는다"라는 진술이 가능해지는 것도 이 익명적인 우리(On/Nous)의 죽음 안에서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네가 아니고, 우리가, 익명적인 우리가, "너와 함께 너 없이" 죽기 때문이다. 이 익명적인, 공통의, 고독 속에서 블랑쇼는 파스칼에 반해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5. 책을 옮기면서, 잘려진, 조각난, 부서진 조각들을 붙이지 않았다. 마치 조각난, 흩어진 퍼즐을 붙이듯이 그것들을 다시 모으고 붙이는 것은 없는 전체를 가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 문장은 그 문장을 완성하는 동사의 결핍으로 끝나지도 완성되지도 않는다. 말과 말을 연결하는 접사의 부재는 말들을 무한히 다르게 연다. 블랑쇼의 이 말들은, "말들이 아니라, 말에서 말로, 끝없이, 말들을 가로지르는 고통을 들으면서" 일어나는 시간의 부재에 대한, 사건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현재의 결핍에 대한, 시간이 위로의 약속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열지 못하는 고통 속에 기다림의 시간에 대한 블랑쇼의,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닌 그의, 그들의, 모두 단편들이다ㅡ세계의 질서에 반해, "죽음을 서둘러서 무덤에 묻"지 않기 위해, "다 말해지지 않은 말들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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