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역사의 형상들, 우리는 역사 안에 나타나는가?

aurorepark 2015. 11. 2. 14:34


 




"역사는 같은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같은 이미지를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모두에게 공통된 빛,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태양이라는 판관의 물질적 실존의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 렌즈의 시선에 대한 조건들의 평등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가 복종하는 이중의 지배, 즉 작동자와 그의 주제의 지배다. 그것은 빛의 어떤 나눔으로, 말라르메가 우리의 이 이미지보다 몇 년 앞서서 갈등이라는 탁월한 텍스트에서 그 항들을 고정하고자 했던 그 나눔이다." (랑시에르, 본문 중에서)



이 책, Figures de l'histoire, 역사의 형상들, 혹은 우리는 역사 안에 나타나는가?(2012)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 시대의 발명인 영화나 사진의 이미지들, 또 오랜 역사를 가진 회화의 이미지들이 가진 "표상의 힘"에 대한 섬세한 반성을 좇는다. "예술은 한 시대를 관통한 사건들을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예술은 그 사건을 만든 주역들에게 혹은 그 희생자들에게 어떤 자리를 부여하는가?" 아주 일반적으로 "어떻게 예술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혹은 보다 랑시에르적인 질문으로 "이미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알렉상드르 메드베드킨에서 크리스 마커까지, 험프리 제닝스에서 클로드 라즈만까지, 또한 고야에서 마네까지, 칸딘스키에서 바넽트 뉴만까지, 쿠르트 슈비터에서 라리 리버스까지 이 질문들은 다만 관객들이 그들이 만난 작품들에 제기하는 질문이 아니라, 예술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다. 예술가들이 감각적인 세계의 요소들을 분리하거나 다시 분배하기 위해 그 세계를 자르는 방식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 그것은 모든 예술적 작업의 중심에서 정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끄 랑시에르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에게, "어떤 장소 혹은 어떤 순간에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어떤 것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말하지 않는 이미지는 없다. 또한 그에게, 공식적인 역사가 한 번에 영원히 고정한 장면들을 다르게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그것들에 대한 논의를 다시 열 수 없는 이미지는 없다. 역사를 표상하는 것은 역사를 가두는 것으로 이끌릴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역사의 의미를 해방할 수도 있다".


새로 나온 책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은 199612월 조르즈 퐁피두 센터에서 기획한 전시회 <Face à l'histoire, 역사에 직면해서>의 카달로그에 실렸던 여러 글들 중에 포함된 랑시에르의 두 개의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 하나는 "Sens et figures de l'histoire, 역사의 의미와 모습들"이고 다른 하나는 "L'inoubliable, 잊을 수 없는 것들"이다.


 

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1814



"고야의 화폭 위에서 두 팔을 십자형으로 벌린 인물...이 인물은 유일하게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그의 행동과 그의 말의 모든 울림을 취소하는 두 집단의 익명적인 신체들 사이에 끼어서 공허하게 소리를 지른다. 그의 발밑에 총살당한 시체들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으며, 그의 정면에 등들로 표상되는 조금의 틈도 없이 늘어선 총살 집행자들의 얼굴은 등짐과 총으로 이어지는 곡선 안에서 지워진다. 여기서 지금까지 소수파의 장르에 속하는 판화가 독점적으로 담당했던 전쟁의 공포의 형상화가 화폭을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화의 전통이 전도된다. 이제 신체들의 배열은 역사를 형성하지 않으면서만, 또 예술의 잠재력에 속하던 모든 종류의 배열의 부정을 시험하면서만 그 의미를 형성한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모범적인 사례들의 모음이 아니다."(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