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정치적 동물=문학적 동물

aurorepark 2013. 12. 31. 16:59


"예술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이래로, 떨어진 한 세계로서 존재한다."_ 랑시에르



랑시에르 사유를 이끄는 한 믿음, 한 전제, 한 목소리 혹은 한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이 사유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 평등에 대한 철학자의 근본적인 직관은 철학자가가 말하듯 사유의 능력과 그 가능성의 분산의 다원성에 대한 직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플롤레타리아의 밤>). 그리고 이 사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감각적인 나눔인 한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이 직관은 정치학, 그리고 미학(시학)과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관을 지지하는 보다 근본적인 진술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리스털레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진술일 것이다. 다만,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이유는 인간이 문학적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덧붙여서 말이다. 인간이 "문학적 동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말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말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은 역사적인 동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이란, 랑시에르가 'histoire'라는 프랑스어를 가지고 말하듯이ㅡ이야기le récit, la fable, une histoire, 역사l'histoireㅡ, 그 말의 첫 번째 의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시학의 한 범주인 '뮤토스muthos', 즉 '행위들의 배치un arrangement des actions'를 의미하는 한에서 역사는 본래적으로 "허구적" 체계를 가진다. 모든 학이 이 뮤토스에 근거하는 한에서ㅡ말해진 것을 다시 말할 수 있는 한에서(인간이 말하는 동물이라는 이유에서)ㅡ, 특히 그것이 역사를 쓰는 역사가가 문제, 또 역사의 기술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때, 역사가는 그의 학의 '대상'이 살아있는, 다시 말해 다시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서, 학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랑시에르에게 '문학'이란 "언어예술 일반", 혹은 "글쓰는 작업" 이상을 지시한다. '문학'이란, 그것이 역사적인 '발명'인 한에서, 더 정확히 말의 예술의 규정된 역사적인 체계régime인 한에서, "글쓰기 예술을 규정하는 정체성의 체계", 즉 "미학적 체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체계는 반드시 한 시대와 동일화되지 않는다(동시대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미학적 체계는 "새로운 가시성과 새로운 가독성을 산출하면서 이전의 실천들과 작품들에 대한 재평가와 재해석을 통해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표상의 체계 그 자체는 한 시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규범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규범성은 어떤 예술작품이 위대한 예술로 인정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성은 다른 형태의 예술적 형식을 금지하지 않는다(여기에 랑시에르와 푸코의 차이가 자리할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체계란 '배치 혹은 정돈의 가능한 모든 체계(칸트의 감성론을 따라서 감성의 가능한 체계, 다시 말해 물질에 대한 가능한 정감성의 체계, 다만 칸트의 감성의 선험적 체계에서 '선험적'이 역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감성의 체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체계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통해서 일어난다. 배치 혹은 정돈의 한 가능성, 다시 말해 한 담론, 한 진술(le dit)의 가능성은 그 가시성을 가능하게 하는 비가시성과의 근본적인 '갈등', '분쟁'(미학적 체계의 장들scènes)을 회피할 수 없다. 이 갈등의 지속성은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