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말해진 것과 말하기
2장 2절 마지막 단락을 다시 읽어보자. 여기서 레비나스는 이 글의 근본적인 문제ㅡ시간성이 본질 너머로 갈 수 있는지?ㅡ를 제기한다.
"시간성은 본질 너머로 가는가? 만일 존재가 자신을 현시하기 위해 시간에 의해 밤 혹은 잠을 '떠난다면', 이 밤 혹은 이 잠은 빛과 깨어남의 단순한 부정으로서 여전히 본질인가? 아니면 반대로 이것들은 '다르게' 혹은 '이전'인가? 다시 말해 이것들은 상기 너머의 시간성을 따라서, 통시성 안에서, 본질 너머에서ㅡ물론 말해진 것 안에서 드러나는, 그런데 곧 환원되기 위해서만 드러나는 이전 혹은 너머, 존재와 다르게인가? 주체는 마지막까지 존재론으로부터 이해되는가?"(54)
이 장의 제목, 말해진 것과 말하기는 위의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더 정확히 "인간 안에 말하기의 힘ㅡ말해진 것과의 엄격한 상호관계가 무엇이든지 간에ㅡ은 존재에 봉사하는가?"(66)
"존재자들의 동일성은 목적론적으로 말해진 것의 선언적 구조로 향한 말하기로 보내진다. 여기서 말하기는 말해진 것 안에서 잊혀질 정도로 그 안에 흡수된다: 존재자들의 동일성은 말해진 것에 상관적인 말하기, 혹은 존재자의 동일성을 이념화하는, 구성하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을 회복하는, 시간의 흐름을 '어떤 것'으로 응고시키는, 주제화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현재로 고정된 '어떤 것'의 자리를 정해주는, 표상하고 시간의 불안정성에서 존재자를 떼어내는 말하기로 보내진다."(65)
이런 종류의 말하기, 'Meinen'이 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mehr(이상)' 혹은 'surplus(잉여)'을 잊어버린 이런 말하기, 존재자를 동일화하는 이런 말하기는 "현상을 나타나도록 내버려 두는 체험된 시간의 빛 혹은 울림 안에서 존재자를 명명한다". 그런데 앞서서 우리가 봤듯이 이 빛 혹은 울림은 이어서 "또 다른 말해진 것" 안에서, 즉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 동일화 된다. 따라서 지시와 명명은 밖에서, 말하자면 기호의 체계인 약속의 한 결과로서 현상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단어들, 말들이 기호와 그 사용의 기능을 발견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의 빛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는 존재는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 그 자신의 본질이다. 현상 그 자체는 현상학이다."(65) 만일 인간이 다만 로고스에 상관적인 말하기일 뿐이라면, 주체성은 존재의 진리, 존재의 서사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기능으로서만 이해되는가? 그런데 인간 안에 말하기의 힘은 말해진 것을 넘어서 가지 않는가? 말하기 안에 모인 본질을 너머 가는 그런 말하기의 의미는 존재론이 말하는 주체를 촉발하는 그런 말하기는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부동의 동성", "동일한 것의 다수화", "점의 분산", 이 "시간의 길이, 지속", 이 "변질 없는 변형"으로서 존재의 작(업), 존재의 본질 안에서 의식이 말하는 그런 말하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지속, 기억은 그것이 짧든 길든, 그것은 회복 불가능한, 표상 불가능한, 기억 불가능한, 전-역사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통각과 재인의 종합 이전에 완성되는 늙어감의 절대적인 수동성의 "종합""이 그런 것일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지나간다se passe".(66) 이런 시간의 연속성을 방해하는 통시성 혹은 비 연속성은 파도가 만드는 물거품이 생기기가 무섭게 사라지듯이 오름의 긴장과 꺼짐의 완화 사이에, 이전과 이후 사이에, "시간 사이l'entre temps"에 그 "동안"에, 그 "시간의 길이 혹은 짧고 혹은 긴 시간의 지속le laps du temps" 안에 머문다. 이 "동안"에서 "기다린 사건은 어떤 현재 안에서도 체험됨이 없이 지나간다". 황혼과 새벽 사이에서ㅡ가장 탈자적인 지향성이 자신을 잃어버리는(혹은 자신을 회복하는), 그런데 어떤 사건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황혼과 의식이 자신으로 돌아오는, 그런데 이미 멀어지는 그 사건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늦은 새벽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우리 삶의 많은 "경험들"이 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전혀 체험된 적이 없다"(EDE, 211)고 말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경험은 축적을 위해 지식이 되기 위해서 있는 그런 경험도, 반박을 기다리는 그런 경험도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가 지나가는se passer 경험이라고 부르는, 한 번도 현재 본 적이 없는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 안에서 주체를 부르는 이 경험, 주체를 타자로 보내는 이 경험을 어찌할 것인가? 이 말할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경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경우에, 그것은 우리 삶에서 느껴질 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눈물'은 철학의 체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어떤 이념의 체계 안에 어떤 자리도 없다고 한다. 눈가에 감추듯이 흐르는 눈물, 보이듯이 감추듯이 지나가는 이 눈물이 어쩌면, 이 경험, 이 초월의 흔적을 우리에게 알려줄지도 모른다.
"초월ㅡ순수한 지나감ㅡ이것은 지나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흔적이다."(EDE,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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