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다르게 강독

2장 1절, 질문하기와 타인에 대한 충실

aurorepark 2012. 1. 17. 07:41

1° 질문하기와 타인에 대한 존중 le questionnement et l'allégeance à autrui


철학은 진리를 찾고 표현한다. 진리는, 한 진술 혹은 한 판단을 특징짓기 이전에, 존재의 노출exhibition 안에 자리한다. 그런데 존재라는 이름 아래에서, 진리 안에서 무엇이 나타나는가 se montre? 누가 보는가qui regarde?


존재의 이름 하에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이름은 애매성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사가 문제인가 아니면 동사가 문제인가? 존재être라는 단어는 존재하는 실체entité - 그것이 이념적이든 실재적이든 - 실체를 지시하는가? 아니면 이 실체의 존재함의 과정le processus d'être, 즉 본질l'essence1을 지시하는가? 이 존재라는 단어는 지시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지시한다. 그런데 그것은 다만 지시하는가?  심지어 그것이 동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만 지시한다면, 그것은 명사le nom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것은 운동이라고 할지라고, 지시의 충격 아래에서 나타나며, 그 과정은 말해진 것le Dit 안에서 정지하고s'immobilise 고정된다se fixe. 존재와 존재자의 신비 - 그들의 차이 - 는 이미 염려스럽지 않은가? 출발부터,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과 그 구분의 애매성amphibologique은 중요하게 부각되며 존재는 여전히 진리에 대해서 결정적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또한 애매하며 궁극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이 차이가 말해진 것에서 - 즉 단어들에서, 즉 부대-현상épi-phénoménale이 아닌 것에서 - 나타난다면, 그것이 그 자체 드러남monstration 그 자체에서 유지된다면, 그것은 숨바꼭질하는 존재와 같은 열에 속한다. 물론 본질적인essentiel, 그런데 드러남이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양태라면, 말해진 것은 말하기le Dire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않은 것le Non-Dit은 모든 말하기를 흡수하지 않는다. 말하기는 말해진 것 이전에en deçà 머물거나- 혹은 그 너머로au-delà 간다.


그런데 당분간 이 말해진 것의 일반적인 의미의 함축에 머물자. "무엇이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은 이 질문 그 자체에 의해서 '누가qui 보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비록 이 이 누군가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주제적으로 구분하기 전에 말이다. 질문은 무엇?un quoi?, 이것이 무엇인가?un qu'est-ce?를 진술한다. 존재하는 이것이 무엇인가?Un qu'est-ce qu'est ?. 존재하는 것에서de ce qui est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인 바의 ce qu'il est을 아는 것이다. 무엇?은 이미 존재에 의해 덮히며, 존재를 위해서만 눈을 가지며, 이미 무엇은 존재 안에 박힌다. 존재하는 것의 존재에 대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인 바의 것ce qu'il est이다. 이 질문 - 그것은 "존재란 무엇인가?"일 텐데 - 은 따라서 존재와의 관계에 의해서 정확히 문제가 되는 것과의 관계에서 질문한다. 대답은 처음부터 우리가 존재자 혹은 존재자의 존재, 존재자 혹은 본질에 의해 이해하는 존재의 용어들에 의해서 명령된다. 따라서 무엇에 대한 질문은 그 질문이 발견하고자 하는 것과 상관적이며, 이미 그 질문은 그것에 의존한다. 무엇에 대한 탐구는 전적으로 존재 안에서 - 그 탐구가 다만 탐구하는 것 한 가운데에서 전개된다. 탐구는 동시에 존재론적이며, 그 탐구가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 그 자체의 실행l'effectuation 안에 자신의 몫을 가진다. 만일 존재와의 연대 안에서 무엇?에 대한 질문이 모든 사유의 기원에 속한다면 (이것은 사유가 결정된 용어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탐구와 모든 철학은 존재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존재의 존재의 지성l'intellection, 본질의 지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재는 다만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le problématique일 뿐만 아니라 - 그것은 가장 지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지성체intelligibilité가 질문이 된다. 지성체가 질문이 된다는 것 -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 하나의 문제, 즉 누구? 무엇?에 대한 질문에 앞선 것préliminaire이 있다. 왜 노출 안에 질문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탐구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존재의 나타남은 동시에 그것의 가상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상은 존재의 탈은폐 안에서 존재를 감추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의 탐구는 존재를 나타남에서 떼어내야 하기arracher 때문에 질문이 있다. 혹은 - 마찬가지 이기는 한데 - 모든 현시는 부분적이고 그로 인해 모든 현시는 가상이기 때문에, 질문이 있다. 이 때에 진리는 변질됨이 없이는 분별되지 않으며, 결국 진리는 점진적이며, 매번 문제적으로 남으면서 여러 시간적 계기 안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질문의 질문은 더 근본적이다. 왜 탐구는 질문이 되는가? 어떻게 더 많이 열리기 위해 이미 존재 안에 빠진 무엇?이라는 질문은, 주어진 것le donné의 "소통" 안에서, 도움의 요청, 즉 타인에게 전달된 도움의 요청을 끼어넣는 특수한 언어인 요구demande와 기도가 되는가?


- 이 질문 안에는 어떤 질서의 전복이, 지식, 인식, 존재론에 앞선 것, 요구, 혹은 기도, 혹은 정감, 레비나스가 윤리적 질서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전복이 예비된다. 지성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세계의 나타남 이전(Avant)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확실히 존재에 접근하는 변덕스러운 혹은 호기심에 가득찬 혹은 영악한 주체에 의한 악의적인 논쟁에서처럼 촉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제는  문자 그대로 현시되는 존재에 의한 주체의 호출interpellation이라는 은유를 필연적으로 취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현시 - 나타남 l'apparoir - 는 확실히 최초의 사건이다. 그런데 최초의 최우선성은 현재의 현전 안에 존재한다. 모든 현재보다 더 오래된 어떤 과거 - 한 번도 현재했던 적이 없는 과거 그리고 그것의 전-기원적인 고대성은 절대로 감춤과 현시의 "놀이 안에 주어졌던 적"이 없는 - 그런 과거의 다른 autre의미(작용)은 기술해야 할 것으로 남으며 - 의미있는 의미(작용)의 계기로서만 해석하는 존재의 현시 너머에서 의미를 형성한다. 사람들은 가장 고양된 사유로부터 도래하는 통-시성 안에서, 현시의 점진성에서, 동일자와 타자를 분리하는 간격, 현시 안에서 반사되는 간격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열림과 직관의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현시는 - 질문으로부터 대답으로 지속하고, 단절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를 보는 누군가Qui regarde,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아직 규정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통-시적으로 얽힌 이야기intrigue의 매듭으로서 - 동일한 그리고 존재의 열림 안에 위치한다고 자칭하는 주체 - 를 만나는 놀라움으로 이끈다. 질문과 대답의 침묵의 왕래, 플라톤이 사유로서 특징짓는 이 운동은 주체성의 매듭을 엮는 - 타자가 동일자를 명령하는 - 어떤 이야기와 관계한다. 자신의 현시 안에서 존재로 향하는 동일자, 즉 사유가 스스로 자신을 알 때se sait조차 말이다. 자문하고 자기를 질문하는 것, 그것은 주체성 안에서 동일자와 타자의 얽힘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체성으로 보낸다. 동일자 안에서 타자의 이야기는 동일자에서 타자의 열림에 이르지 않는다. 타인, 질문의 요구가 전달되는 타인은 탐구해야할 지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근접성 안에 자리한다. 여기에 탐구를 방향지우고 탐구되는 무엇quoi의 존재론적인 본질성quiddité에서 제외되는 누구qui누구성quis-nité이 있다.  동일자는 타인과 관계한다. 타자가 -그것이 어떤 이름이든지 간에 - 의식에 나타나기 전에, 주체성은 동일자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ême로서 구조지어진다. 그런데 의식의 양태와는 다른 양태를 따라서 구조지어진다. 의식의 양태는 항상 주제thème와 상관적이며, 표상된 현재와 - 즉 내 앞에 위치한 주제와, 현상인 한 존재와 상관적이다. 동일자 안의 타자로서 주체성이 구조지어지는 양태는 의식의 그것과 다르다 - 이 의식은 의식과 - 그것 앞에 "위치한" - 그것의 주제 사이의 관계가 간접적이고 헐겁고 비지속적인 어떤 존재의 의식이다. 이 관계는 "살과 피를 가진"현전의 지각, 이미지의 형성, 상징된 것의 상징화, 투명성과 암시 안에서 달아나고 불안정한 것의 은폐. 객관화가 불가능한 추측, 그런데 객관화를 열망하는 그리고 그로써 의식이, 그리고 그로써 존재의 의식인 그런 의식이다. 


주체성, 그것은 동일자-안의-타자l'Autre-dans-le-Même이다. 대담자들의 현전의 양태와는 다른 양태를 따른다.  다시 말해 하나와 다른 하나의 대화에서 그들은 서로 간의 평화와 동의에 이른다. 주체성의 동일자-안의-타자는 타자의 의해 염려된inquiété 동일자의 염려inquiétude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상호성 안에서 본질을 인증하는 상호관계도 지향성도, 대화도 아니다. 또 존재의 자기 위로의 접힘 혹은 후퇴repliement - 존재의 반사가 존재의 상관적으로 머무는 그런 접힘, 후퇴에 의해 그려지는 자기 - 도 마찬가지로 주체성의 매듭으로까지 가지 않는다. 


주체성 안에 얽힌 매듭 - 이 매듭은, 존재의 의식이 된 주체성 안에서, 질문하기 안에서 여전히 자신을 인증한다 - 은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충실을 의미하며, 타자의 모든 노출 이전에 강요된다. 다시 말해 모든 의식,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동일성으로부터 정당화할 수 없는, 타자로서 무엇으로도 동일화될 수 없는 그런 타자에 의한 모든 촉발에 앞선다. 여기서 충실은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책임으로, 모든 질문에 앞서서 타자의 근접성에 대한 대답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런데 이 충실 안에서 또한 의식 그 자체의 잠재적 탄생 - 지각 혹은 존재에 대한 들음 - 그리고 질문하기로부터 발생하는 대화가 파악된다.


따라서 존재는 관념론의 주장과 반대로 인식하는 한 주체의 구성이 아닐 것이다. 사유와 존재의 진리에 열리는 주체는, 이것들에 대해 주체는 반박의 여지없이 열리는데, 이 주체는 존재의 존재론 혹은 지성으로서 주체를 발견하게 하는 길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열린다. 존재는 인식으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인식으로부터 오지 않음 ce ne-pas-venir-de-la-connaissance은 존재론이 전제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존재와 인식은 둘다 타자의 접근 안에서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 즉 모든 질문에 앞선 대답, 말해진 것에 앞선 말하기의 양태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존재는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l'Un-poir-l'autre로부터, 다시 말해 동일자가 타자를 대체하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존재의 봄과 존재는 존재와 인식에 앞서 일어나는  -  앞선 그리고 이전, 선험적인 것으로 상기가 회복할 수 없는 기억 불가능한 시간 안에서 - 주체로 보내진다. 인식하는 주체가 자리하는 질문하기 안에서 존재의 "탄생"은 질문하기 이전le avant le questionnement으로,  책임의 전-기원l'an-arche으로, 마치 모든 탄생의 이전처럼, 보내진다. 말해진 것 없는 말하기le Dire dans Dit라는 관념 안에서 우리는 이런 주체의 양태, 즉 존재와 다르게를 전개 할 것이다. 다만 조건적인! 진리 안에서 단독적인 사건! <정신 현상학>의 서론의 처음 몇 페이지와 그것의 경고들을 잊게하는 사건과 함께 마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도 우리가 취하는 자유들에 대답해야 한다. 적어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최초의 지표들로서 이 장이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완성되지 않는 학의 상대성을 타고난 주체의 유한성에 부딪치는 대신에, 처음부터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의 근접성의 길로서 이 유한성 자체 안에서 책임의 탁월함 - 지고함과 의미 - 다시 말해 사회의 탁월성, 즉 - 유한한 진리 - 존재와 의식 - 이 복종하는 질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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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 어떻게 철학의 질문, 진리에 대한 질문, 무엇에 대한 질문은 요구 혹은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오랜 서양 철학사 안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을 따르면, 요구나 이해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판단 안에 속하지 않기에 철학적 진술, 즉 말해진 것le dit, 혹은 진술énoné의 질서의 속하지 않는다.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성, 아무도 철학사에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는 데에 있다. 철학의 질문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는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이전에 자리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의 진리에 대한 질문의 질문이 정의로 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레비나스의 다른 표현으로 "지식과 다르게 Autrement que savoir".     

   



  1. 이 책에서 본질은 존재자와 다른 존재를 지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 <예비적 주>를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