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다르게 강독

2장 2절,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 - 시간과 상기

aurorepark 2012. 3. 29. 13:48

<존재와 다르게>의 48-54쪽에 해당하는 절이다.


만일 우리가 질문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질문하는 사유의 명백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울려오는 그 요구la demande를 듣지 못한다면, 질문 안의 모든 것은 곧바로 진리로 향할 것이고, 모든 것은 존재의 본질로부터 도래할 것이다. 이제, 진리는 존재론의 그림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의 함축들 안에서 잊혀진 목소리의 굴절inflexions들이 울려온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존재론에 - 존재와 존재자의 애매성 안에서 존재의 노출에 - 시간과 언어가 속한다. 언어는 언어로서 지속의 분산을 이름들로 명제들로 모으고, 존재와 존재가가 들리도록/이해되도록entendre 한다. 이 말해진 것le dit 안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모을 수 없는asemblable[말해진 것le dit, 즉 단어나 명제로 환원할 수 없는] 말하기le Dire의 울림의 방문을 받을 것이다surprendrons.


- 레비나스의 글쓰기의 형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선 그는 요약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밝힌다. 이어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푼다, 반복적으로 다시 말하고, 자신을 말한 것을 또 다시 말한다. 다시 말함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글쓰기의 강도가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는 순간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면 파열한다. 그 지점에서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글쓰기는 그의 방법론의 실행으로서의 과장법이다. 위에 '굴절'이라고 한 것은 뒤에서 '울림'으로 '이라고 다시 말해진다. 존재와 존재자의 애매성은 뒤에서 따로 한 장에서 다시 말해진다. 말해진 것이 없는 말하기의 전제, 일단 전제라고 하자! 레비나스는 그것이 우리를 놀래킨다고 말한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체험된 경험으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앞 절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그의 글쓰기의 문체는 거의 "조건법"으로 쓰여있다.


우리는 앞에서 "진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 존재의 용어들 그 자체 안에서en termes mêmes 노출되는 존재를 질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누가 보는가?"라는 질문도 존재론적이다. 이 누구qui는 누구인가? 이런 형식 아래에서 질문은 "보는 자"를 이미 알려진 존재들의 하나와 동일시할 것을 요구한다. 비록 이 질문의 대답이 단절음 "나(Moi)"로 진술된다고 해도 말한다. 어떤 내용도 없는, 처음부터 "내가..."라고 말해지는, 그런데 사실 "당신에게 알려진 내가", "당신의 기억 안에서 그 목소리를 발견하는 나", 혹은 "당신의 역사의 체계 안에 나를 놓을 수 있는 나"와 같은 전적인 기호들의 발산인 "나"로 진술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만일 "누가"라는 질문이 주체의 상황/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 다시 말해 결합 안에서 누군가의 자리 - 존재들과 사물들의 결합 안에서 - 혹은 이 질문은 플라톤이 페드르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술을 듣는 대신에, 진술을 진술하는 자를 묻는, 이미 어원론자인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그는 누구냐?", "그는 어디에서 왔느냐?"로 물어지기도 한다 - 누구?에 대한 질문은 그 존재에 대해서 물어진다. 이러한 누구?는 결국 "그것이 무엇 안에서 존재하는가?"qu'en est-il de...?에서 결국 "무엇?quoi?"으로 돌아온다. 누구?에 대한 질문은 무엇?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되고 그 안에서 상실된다. 어휘와 문법에서 반영되는 누구?무엇?의 차이는 그 본성에 의해 혹은 문제가 되는 존재자의 존재의 양태에 의해 동기지어진 본질적인éidétique ou essentielle 차이일 것이다. 말해진 것 안에서 무엇?의 논리의 우선성은 - 이 차이를 지운다. 말해진 것으로서 로고스 -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안에서 존재의 계시 - 는 누구?를 보존하는가? 무엇? 안에서 사라지는가? 로고스는 우리의 질문, "누가 보는가?"에서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누구?를 무엇? 안에서 사라지게한다. 이 물음은  이런 저런 누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누구"의, 그것의 일반성에서, 본질을 질문한다. 그것은 "이 누가? 누구인가?qui est ce qui?"에서 존재에 대한 시선이 주어지는 "이 누가? 무엇 안에 존재하는가?qu'en est-il ce qui?를 묻는다. 따라서 모든 면에서 질문 무엇?에 대한 특권 혹은 문제Ploblème의 존재론적 성격이 확인된다. 


- 앞 절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 존재에 대한 시선, 즉 지향성 안에서 누가 어떠한지? 즉 그것의 나타남의 어떻게를 질문하는 지향성은 하이데거에서 존재자의 존재, 그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결국 무엇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면, 누구에 대한 질문 - 주체성, 영혼에 대한 질문 - 은 결국 무엇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고 말한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질문 "Qui est le Dasein?" 누가 다자인인가? 에서, 그는 누구는 이런 저런 지시할 수 있는 존재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의 본질을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했을 때, 이 질문의 존재론적 특징을 드러낸다. 결국 그 "누구", 주체는 그 질문에서 익명으로 사라지고 존재만이 남게된다. 


- 레비나스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다만 하이데거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읽으면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듯이 그의 언어 안에서 헤겔의 언어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에게 헤겔과 하이데거는 거의 같은 논리안에 머무는 철학자로 같은 비판에 같이 떨어진다.  


이 특권은 결국 진리에 대해서, "진리 안에서 현시되는 이 존재를 보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서, 존재의 현시의 수용은 현시되는 존재 밖에 자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누가 보는가? 라는 질문은 본질의 전시exposition만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보는 주체는 주체와 대상의 단일성에 속한 그의 대상과의 엄격한 상호관계 안에서 사유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어떻게 - 진리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서 -  존재의 현시의 수용accueil을 현시되는 존재 밖에서 놓을 수 있는가? 이 때 보는 자는 절대 밖에 놓이는가? 그리고 시선은 지식이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축적하고 자기를 전개하는 안으로 후퇴한 내밀성le repli de l'intimité을 파면서 존재의 사건을 회피하는가? 이 때, 존재 밖에서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이며, 여전히 존재 밖에서 존재로부터 실행될 것이다 hors de l'être se passeraient des choses, il s'y ferait encore de l'être. 이 용어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아직 이 처럼 보이는 것ce semblant을 밝힐 정확한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환원할 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존재의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repliement가 - 혹은 주체성이 - 일어나는 자리 안에서 이러한 반성과 다른 것을 추측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누군가가 여전히 존재에 속해야 하고 보는 것은 존재로 환원되어야 한다.


존재의 전시 혹은 과시ostension는 그런데 왜곡된다. 관객과 사변은 "한 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드러나는 것에서 서로를 배제할 것이며, "이전l'en deçà"으로 숨을 것이다. "이전"은 물론 노출에 의해 촉발된 "누가qui" 자신을 상실하는 그런 영역일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존재의 양태로, 즉 자기를 감추는 한 방식, 자기를 제외하는 한 방식, 사라짐이 없이 물러나는 한 방식으로 남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밤으로 물러서는 방식. 누구 - 관객, 주체성, 영혼 - 은 이 내재화의 과정에서 자신을 고갈하는가? 혹은 내재성은 "드러나지 않음"의 부정성 안에서 자신을 고갈하는가? 확실히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누구qui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내재성이 절대적인 예외exception absolue라면, 진리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는 자신의 내면성으로부터 잘려질 것이고, 존재는 진리 안에서 부분적으로 감춰질 것이고, 명백하지만 진리가 아닐 것이다. 


- 위의 단락에서 우리는 한 단어에 주목한다. "절대적인 예외". 레비나스의 주체의 주체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외, ex-ception 말 그대로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것이다. 특히 존재가 자신을 전개하는 개념 안에서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 내재성의 예-외는 회복되어져야 한다 - 예-외는 규칙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 그리고 전시된 존재 안에서 지식의 주체가 다시 회복되어야 하고, 영혼의 맥박과 호흡은 존재에 속하고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리는 존재의 자기 자신에의 전시에서만, 자기의식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주체성, 영혼, 누구의 노출은 존재와 상관적으로 머문다. 다시 말해 존재와 동시적이고 그것과 함께한다. 지식 안에서 노출의 변동mutation은 이 전시의 일단의 굴절inflexion로 해석되어야 한다. 영혼은 영혼을 촉발하는suscite 혹은 그것을 자극하는 존재의 탈은폐에 대해서만 살 것이다. 영혼은 정신의 삶의 한 계기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밖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동일자가 동일자를 회복하는 존재-전체성의 계기일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에의 현시는 존재 안에서 분리를 함축할 것이다. 현시는 존재의 전체성이 존재의 전체성에서 드러나는 섬광과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에게 드러남se montre à"은 정확히 시간인 국면의 차이déphasage[위상차]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의한 놀라운 거리écart !


"전체tout"가 "전체tout"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이 순간에서 국면들의 차이 - 시간의 시간성 - 는 그런데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존재의 벗겨짐découverte - 그것의 동일성으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밝혀진 것(우리가 위상차라고 부르는 것)과 드러나는 것ce sui se montre과 그것이 채우는 의도la visée 사이에서 진리의 재회retrouvailes - 즉 탈은폐, 즉 드러남monstration. 이 의도로서 동일자와 벗겨진 것으로서의 동일자, 그리고 동일자에서 발견되고 돌아오는 것 - 진리. 새로운 긴장이 세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존재 안에서 지향성 혹은 사유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시간 - 부동의 영원성의 사면rémission,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속한 내재성immanence의 사면 - 이 필요하다. 시간의 사면과 되잡음ressaisisement의 긴장, 단절 없는 완화와 긴장, 연속성의 해답없음. 현재로부터의 순수한 멀어짐이 아니라, 재-현re-présentation, 다시 말해 진리의 현재가 이미 거기에 존재하거나 혹은 여전히 존재하는 멀어짐, 재-현, 다시 말해 현재의 재기[반복]recommencement du présent, "처음으로"가 두번 째인 -  망각과 기다림, 기억과 기투 사이에서 과거지향(파지)과 미래지향(예지). 시간은 상기이고 상기는 시간이다 - 의식과 본질의 단일성.


-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존재자의 이해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존재의 진리의 본질은 다자인의 존재에의 열림(Erschlossenheit)이라는 양태에 의해 드러난다. 이 다자인 존재에의 열림은 다자인 시간성 안에서 존재의 진리는 벗겨지고dé-couverte,(Unverborgenheit), 잠시 잃어버렸던, 잊혀졌던 것을 다시 만난다 retrouvaille ( Entdecktheit). 이러한 구조는 표현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재-현의 구조의 반복이고, 헤겔의 역사의 운동의 반복으로, 플라톤의 움직이지 않는 영원성의 이미지의 사면, 해방으로 말해진다. 처음으로가 다시 시작하는 현재에서 두번 째와 혼동되고, 망각과 기다림 사이에서, 기억과 기투 사이에서 시간은 잊혀진 것의 불러냄이고 불러냄은 시간과 혼동된다. 모든 차이와 간격, 분리는 원환의 운동 안으로 다시 돌아간다.


존재의 전체성의 시간의 위상차 안에서 - 진리를 보증하기에 충분한 유일한 것 - 전체성은 자기 자신과 거리를 취하면서 전체성은 전체성 너머로 가는가? 그런데 전체성은 밖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주*) 이제 진리 안에서 주제화된 전체성의 초월성은 전체성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처럼 산출된다. 어떻게 이 부분들은 전체와, 진리로서 과시(Ostension)가 함축하는 것인 전체와 동일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전체를 반사하면서. 부분에서 반사되는 전체는 이미지이다. 진리는 따라서 존재의 이미지들 안에서 산출된다. 시간과 상기, 놀라운 동일성의  분산diastase과 본질의 "끝인" 재회[재발견]가 본질과 진리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전시하면서 우리가 그것들은 본질 너머에 존재한다sont고 말할 때조차도 - 다시 말해 본질 너머에 그것들이 존재한다ils sont고 말할 때조차도 말이다. 본질 너머, 의미, 존재와 비 존재 너머의 제 삼의 것은 의미를 가진다. 


*주) 존재의 자기 자신의 발견découverte, 즉 진리는 존재에서 아무 것도 잘라내지 않으며, 그것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발견의 사건에 의해 자기를 변질시키기 위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이 때 진리는,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쩨 가설에서처럼, 진리를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벗김dé-couverte은 - 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순간에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지식을 첨가하는 순간에 혹은 새로운 지식을 이전의 지식에 첨가하는 순간에 - 존재에 첨가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이어야 한다. 존재의 과시 혹은 진리는 시간으로서의 존재의 완성된 본질이며, 동시에 존재의 자기 자신에의 노출이며 자신의 본질이다.


- ostension, 이 단어는 exposition전시와 동의어이다. 특히 종교적인 용어로 종교적인 대상들의 전시를 의미한다. 십자가, 성체등의 전시를 의미한다. 


- 위에 주에서 레비나스는 완성과 첨가를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본질의 실현과 관계한다. 첨가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모든 차이와 간격, 방황, 절망이 완성을 위한 과정일 경우 여기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해볼 것이 없다"는 탈출의 명령을 부르는 고통이 자리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이 믿음, 우리가 운명이라고, 그것이 역사라고 말하는 그 믿음을 잘라낸다.


- 동일성의 분산과 재결합, 재회가 존재와 진리너머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라는 위의 진술은 이어지는 이미지의 논의와 그리고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의 논지와 연결된다.


이미지는 과시의 끝terme이면서 - 드러나는 형상, 직접성, 감각적인 것 - 동시에 진리가 그 끝에 이르지 못하는 끝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모든 것은 그 자체 안에서 드러나지 않고 다만 반사되기 때문이다.(주**) 이미지에서 감각적인 것, 직접성은 지향적으로 보다 완전한 현전의 탐구로 향한다. 그런데 과시는 존재의 전체성의 분할을 함축한다면, 과시는 꺼짐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진리는 약속된다. 항상 약속된다. 항상 미래이고 항상 사랑받는 것인 진리는 약속과 지식의 사랑(주***) 안에 존재한다. 비록 탈은폐의 시간 안에서 역사의 구조화된 작품oruvre과 비-철학의 경계에까지 전진을 통각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주**) 이미지가 진리의 끝이면서 미완성인 한에서, 감각sensibilité - 직접성 그 자체이며 이미지를 만드는 것인 감각 - 은 지식으로부터 해석된다. 그런데 감각 - 이것은 우리의 주장인데 - 은 그것의 직접성immédiatenté에서 다른 의미작용을 가진다(3장). 그것은 진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기능을 가진다.


주***) 우리는 (4장)에서 어떻게 철학 - 항상 미래인 철학의 사랑 - 이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의 지식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를 볼 것이다. 


- 이미지와 진리의 연결의 단절은 이미 "실재와 그림자"에서 그 윤곽이 말해진 것이기도 하다. 위의 진술에서 이미지, 감각, 직접성, 이 세 단어는 초월성이 존재로부터 번쩍이는cignote 순간들을 지시한다. 그것은 지속적이 아니라 단속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레비나스에게 초월성은 존재와 떨어져서 말해질 수 없다.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être가 지시하듯이 그것은 존재와 다른 것l'autre chose을 지시하지 않는다. 레비나스 읽기에서 "순진하게" 다른 것과의 대립 안에서 그의 길을 찾다가는 우리는 다른 곳으로 빠진다. 


철학은 존재의 발견[découverte벗김]이며, 존재의 본질essence은 진리이고 철학이다. 존재의 본질은 시간의 시간화이다 - 동일자의 분산diastase과 그것의 되잡음ressaisissement 혹은 상기réminiscence, 통각적 단일성. 본질은 우선적으로 단단한 가시도, 빛이 반짝이는scittille 현실태의 움직이는 선도 아니다; 그것은 변질(altération)도 전이(transition)도 없는, 모든 질적인 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침묵의 밤에 가구들의 삐끄덕거림에 의해, 이미 물질에 의해 무거워진, 사물들의 생성devenir을 드러내고/배반하는trahissant 사물들의 마모를 모르는 생성보다 더 형식적인 "변형"(modification)을 지시한다. 변형에 의해 동일자는 자기 자신과 떨어지고, 자기 자신과 분리되며, 이것으로 혹은 저것으로 해체되고, 더 이상 가리지 않고ne se recouvre plus, 그래서 발견되고 se découvre (마치 색깔들이 윤곽으로부터 나오는 혹은 윤곽을 건드리지 않는 듀피(Dufy)의 그림처럼), 현상이 된다 - 모든 존재esse의 본질. 존재의 본질은 명명할 수 있는 것의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 사물 혹은 사건 혹은 행위 - 본질은 이 부동의 동성cette mobilité de l'immobile, 동일한 것의 증식, 점들의 분산, 이 길이(laps)를 명명한다. 이 변질 없는, 이동 없는 변형은 - 존재의 본질 혹은 시간 - 특히 "의식의 파악"(prise de conscience)을 허락하는 빛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 변형은 정확히 동일자에서 동일자의 가시성, 우리가 종종 열림(ouver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의 작업(l'oeuvre de l'être) - 본질 - 시간 - 시간의 길이는 현시(ostension), 진리, 철학이다. 존재의 본질은 불투명성opocité의 분산이다. 진리가 사물들 위에서, 존재하는 사건들과 행위들 위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앞서서 이 존재의 "기지개étirment"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이 기지개는 어둠의 본래적인 분산dispersion originelle이다. 어둠 안에 형식들이 밝혀지고, 지식이 깨어난다. 그 안에서 존재는 밤으로부터 나오고 적어도 잠을 떠난다 - 밤의 밤 - 의식의 불면을 위하여. 따라서 모든 특수한 지식, 모든 오성의 활동 - 이데올로기, 믿음, 과학 - 모든 지각, 모든 행위 - 그들의 빛을 존재에 철학에 의존할 것이다. 최초의 빛의 새벽의 여명과 황혼인 철학에 의존할 것이다. 시간성은 자기 자신과의 간격에 의해 본질이 되고 본래적인 빛이 된다. 플라톤은 이 빛을 가시적인 것의 가시성과 눈의 밝음과 구분한다. 빛, 본질의 시간은 지식의 세 계기를 통합한다. 보게하는 본질의 빛은 보이는가? 그 빛은 물론 주제가 될 수 있으며, 본질은 드러날 수 있고 말해지고 기술된다. 그런데 빛은 빛 안에서 현전된다. 이 빛은 주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 중에서 유일한 울림을, 즉 침묵의 울림을 "듣는 귀"를 위해 울린다.  침묵의 울림을 듣는 그런 눈이라는 표현은 괴물스럽지 않다. 그것은 진리의 시간성에 접근하는 것이 문제이고 시간성 안에서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 레비나스 다른 곳, "수수께끼와 현상"에서 "시간 사이entretemps에서 어떤 것, 기다린 사건이 환혼과 새벽 사이로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 새벽과 황혼은 위에서 철학의 시간으로 말해진 것이다. 이 황혼은 헤겔의 부엉이가 우는 역사의 황혼을 말할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황혼에서 탈자적 지향성이 자신을 모으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식이 자신으로 되돌아 오는 새벽에는 이미 그 사건을 잡기에는 - 그것은 이미 너무 멀리 갔기에 -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다린 사건은 체험됨이 없이 과거로 지나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삶의 많은 "경험들"은 진정으로 말하면 체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EDE, 211)


시간성은 본질 너머로 갈 수 있는가? 존재가 나타나기se manifester[자기를 현시하기] 위해 시간에 의해 "떠나는" 이 밤 혹은 이 잠은 여전히 본질로부터 존재하는가?  이것들은 빛과 깨어있음veille의 단순한 부정들인가? 이것들은 반대로 "다르게" 혹은 "이전" "인"가? 상기 너머의 시간성을 따라서, 이것들은 통시성 안에서, 본질 너머에서 - 이전 혹은 이후, 존재와 다르게, 말해진 것le dit 안에서 [본질로] 환원되기 위해서만 드러나는가? 주체는 끝까지 존재론으로부터 이해되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여기서 찾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혹은 이 탐구가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 이 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레비나스는 이 책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 그런데 가장 중요한 - 이로부터 다른 것들이 발생하기에 -, 그의 철학을 추동했던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의 본질이 "어둠의 본래적인 분산"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서 "지식이 깨어난다면" 또 그 안에서 "존재가 - 꺼지지 않는 의식의 불면을 위하여 - 밤으로부터 나오고, 잠을 떠난다면", 다시 말해 시간에 의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넘어가는 시간의 위상차에 의해, 즉 초월성이 완성되는 이 시간성에 의해 존재의 본질이 이 밤, 이 잠을 떠난다면, 이 시간성, 우리가 보통 의식의 초월성(hors de soi)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존재의 너머인가? 또 이 밤, 이 잠은 본질로부터 존재하며, 본질이 시간에 의해 끌어내는 빛과 깨어있음의 단순한 부정들인가? 밤에서 낮으로의 이행 - 헤겔의  본질의 변증법에서, 또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시간의 시간성에서 드러나는 - 이 주체의 운동, 혹은 주체의 주체성은 존재, 혹은 이 존재의 본질의 양태, 혹은 그것의 기능으로 환원되는가? 다시 말해 주체는 존재론으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어야 하는가? 존재론은 근본적인가? 레비나스가 주체에 부여하는 한 용어, "ex-ception 예-외"는 바로 이 존재론으로,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 밤에서 낮으로 이어지지 않는, 밤에서 밤으로 이러지는 블랑쇼의 밤의 밤을 생각하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로부터 이해되는 혹은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주체의 주체성의 한 양태로 제시될 것이다.  


- "자유로운 동일성으로서 즉자 대자적으로 정립된, 구성된 주체"의 주체성은 여기서 존재의 본질의 "변형"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존재가 자기를 전개하고 자기를 현시하는 이 운동은 헤겔을 따라서, 또 그 변형인 하이데거를 따라서 "변형"이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변형은 "모든 질적 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인", "변질도 전이도 없는", 마모도 삐꺽거림도 없는 "모든 존재의 본질l'esse de tout être"을 지시한다. 이것은 또 "부동자의 동성", "동일한 것의 증식", "점의 혹은 동일한 것의 분산diastase"을 명명한다. 동일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시적이 되는 이 변형의 운동의 양태인 "분리décollement, 박탈desaisissement, 파괴défection"에 의해 자기 자신에게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을 겪는 주체의 체험된 경험은 시간의 흐름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바로 뒤에 절에서 레비나스가 다루듯이 이러한 경험은 바로 후설이 <내적 시간 의식> 안에서 그가 원초적 인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끊임없는 변형을 견향한다. 레비나스사 사용하는 "변형"의 모티브는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라,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원인상의 끊임없는 변형에 대한 이 후설의 이념은 변질 없는, 이동도 없는 변형으로, 더 나아가 변화 없는 변형으로 기술된다. 결국 끊임 없는 변화는 - 파지와 예지 - 동일성, 자기에의 재동일화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말해진다. 여기까지 읽고나면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이 변형 없는 변형, 부동자의 동성을 레비나스에 대립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이 순간 우리는 레비나스의 글쓰기, 특히 이 책 Autrement qu'être autrement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닌 경우 우리는 위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없이sans"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레비나스에게 존재와 다르게, 즉 존재가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다르게는 그 말이 의미하듯이 존재로부터, 그 안에서, 그 본질 안에서 그것과 다르게를 말하는 긍정이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햐 한다. 그가 호젠쯔바이크에서 배운 이 다르게의 용업은 부정의 논리를 따르는 것도, 그렇다고 데리다의 하나가 그것의 감춰진 것을 드러내게 하는 그런 "없이"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후설의 본래적 인상으로부터 끌어내는 변형 없는 변형이 어떤 것인지는 이어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