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언어
앞의 (a) 끝 문단에서 레비나스는 시간의 흐름에서 이 '흐름'이 다만 강의 흐름 같은 시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시간의 시간성 그 자체와 의식(con-science*모음(종합))으로 이뤄진 "학(science)"을 표현할 때, 흐름에 의해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시간적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그런데 이것은 후설이 그의 <내적 시간 의식> 안에서 한 순간 깨달았듯이(<시간의 내적 의식>, Conscience intime du temps, Paris, puf, p. 99), 시간을 연속적인 흐름에 의해서 말할 때, 비록 우리가 '억제/과거지향'에 의해 현재 안에서 구성된 것을 따라서 이 흐름을 '명명'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흐름 그 자체는 시간적으로 전혀 "객관적"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 이 흐름은 "'명사들/이름들'을 결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지 물은 것이기도 하다. 결국 주제화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통시적 시간ㅡ이 책에서 레비나스가 찾는 "말해진 것(le Dit)으로 환원되지 않는 말하기(le Dire)"로서의 시간ㅡ은 말해진 것(le Dit)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의 환원을 통해서만 발견될 것이다.
[* 의식(con-science/phénomène)으로 이뤄진 학(science/logie)은 말 그대로 의식의 학으로서 현상학을 지시한다. 의식이라는 단어를 나눠 쓴 데에는, "동일성 안에 다양, 차이 안의 동일성"이 "직관 안에 통각의 종합"과 "상상 안에 재인"이라는 칸트의 현상학적인 공식 안에서 아주 놀랍게 다시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 레비나스는 앞서 기술한 감각적인 것으로서 시간적 흐름, 즉 지속과, 이 지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저항해서 이것을 잡으려고 하는 동일화(명명화)의 시도 사이의 애매성ㅡ동사와 명사 사이의 애매성ㅡ 안에서, '감각적인 것'을 분석하면서 동일화 안에서 이것으로 혹은 저것으로 즉 '의미'로 '말해진 것'ㅡ단어ㅡ이 '이미 말해진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말해진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말하기를 발견하기 위한 환원의 첫 단계이다.
*
모든 사건이 이미 시간, 즉 변화 없는 변형을 전제할 때, 사건에 시간의 시간성을 적용해서 '동사'를 사건을 지시하는 '명사'로 이해할 때, 이런 동사는 시간성을 사건으로 울리게 한다. 그런데 동사가 더 이상 행위나 사건을 명명하기를 그칠 때ㅡ다시 말해 우리가 동사의 동사성을 그것의 순수성으로 환원할 때ㅡ, 동사는 자신의 순수한 동사성에 이른다. 여기는 동사로서의 존재는 더 이상 상징적 방식이 아닌 진정으로 그 장르에서 "유일한 자신의 방식들"을 가지는 곳이라고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즉 동사 존재는 마치 언어가 더 이상 명명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시간화ㅡ본질ㅡ는 존재의 동사이고, 이 동사성으로부터 나온 언어는 이 존재의 본질을 들리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울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언어는 존재자들 혹은 관계들을 지시하는 기호의 체계로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다. 언어는 다름 아닌 이 동사의 성장일 것이다. 그리고 언어가 감각적 삶ㅡ시간화, 시간의 본질ㅡ을 가지는 것도 이 언어가 동사인 한에서 일 것이다. 이때 체험된 감각은 이미 동사 안에서 들리고, 이해되고, 해석된다. 이때 감성 안에서 진술된 동사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감각적인 성질들은 그 동사의 어떻게가 아닌가? 즉 감각적 성질들이 체험되는 감각들은 부사적으로, 더 정확히 존재의 동사의 부사 안에서 울리지 않는가? 이때, 우리는 "지각된 사물들의 성질들이 시간으로 의식으로 사라지는 감성은 이미 말해진 것"(61)이 아닌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감각들이 '말해진 것' 이전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의미작용을 드러내지 않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의 종합으로서의 지향성을 그 이전으로 이끌 수 있다면, '의미부여'로서의 지향성의 의미작용과 다른 의미작용을 이 다양, 이 감각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의식 안에는 두 계기, 지속과 동일화의 두 계기가 있는 한에서, 언어는 다만 동사가 아니라 명사의 체계이기도 하다. 감각의 동사적 혹은 시간적 흐름 안에서, 명명(매듭)은 동일성들을 지시하거나 구성한다. 즉 이 인상(감각적인 것)의 자기 열림 안에서 시간화는 억제와 기억에 의해서 감각적인 것을 모은다. 이 모음, 혹은 이 종합은 칸트에서 상상력에 의한 다양의 종합으로 말해진 것이기도 하다. 단어는 "이것을 이것으로서ceci en tant que ceci" 동일화한다. 이 동일화는 '의미의 부여'이다. 후설이 <경험과 판단>에서(puf, p. 88)에서 "시간의 의식은 개체(unité d'identité동일적 단일체) 일반의 구성의 본래적인 장소"라고 말했을 때, 후설에서 이 개체들은 의미를 받기 위해 우선 주어지고 주제화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 의미에 의해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이것으로서 저것"이라고 말할 때, "저것은 체험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말해진 것"(62)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화는 이렇게 '이미 말해진 것', 보편과 개체의 모든 관계가 전제하는 예비적인 독사의 토대 위에서 들리고 이해된다(s'entend). 따라서 한 개체의 개체화, 동일화는 다른 것에 의존해서, 즉 보편의 숨은 전제에 의해서만 말해진다.
후설이 지향성의 개념을 <첫 번째 논리연구>에서 언어적 의미작용의 영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의미의 언어적 개념을 모든 존재자들에 적용했듯이, 의식에 의한 대상의 파악은 의미작용에 대한 이해이다. 이때 후설에게 한 대상을 지향하는
것(Meinen)은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vouloir dire)이다. 의미는 지향이 채워질 때 대상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지향(혹은 의도)는 언제나 '주어진
것 이상'을 지향하는 것이며, 어떤 것을 이것으로서 '전-이해'하는 것이며, 이념적인 의미와의 관계에 의해서 개별적인
존재자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시는 항상 이미 마련된 개념화의 전망, 혹은 지평-존재의 지평 혹은 세계의 지평ㅡ안에서 일어난다: "한 존재자가 존재자로 현시되는 것은 바로 이 의미로부터이다."(EDE, 305) 소여는 처음부터 이것 혹은 저것으로서, 의미로 제시된다.
이렇게 지향성은 그 자신 안에 "이것을 이것으로서" 동일화하는 "으로서(en tant que)"의 해석학의 구조ㅡ레비나스가 선언적(kerygmatique)이라고 부르는 구조ㅡ를 함축한다. '말해진 것'은 다만 의미의 기호 혹은 그 표현이 아니라, "이것을 이것으로 혹은 그것으로서" 대외적으로 선언하고 축성하는 것이다. 사유의 자발적인 초월론적인 의식의 이 '잉여(surplus)'ㅡ주어진 것 이상ㅡ로서, '말해진 것'은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서 발견된다. 결국 시간의 축적은 후설이 <경험과 판단 § 12>에서 전-술어적인 판단과 관계해서 "원-독사(Ur-doxa)"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지 않는가? "단어는, 그것이 '이것으로서 이것' 혹은 '저것으로서 이것'에 대한 호칭과 축성인 한에서, 명명이다." 그래서 단어를 명명하는 의식의 "말하기 역시 말해진 것에 흡수된 이해와 들음이다: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 한 가운데에 복종(obéissance au sein du vouloir)이며, 소망 근저에서 선언(kerygme au fond d'un fiat*)"(63)이다. 따라서 모든 수용성에 앞선 것이 있다. 언어들이 그 경험을 드러내기 전에, 즉 그것을 제안하고 명령하기 전에, 한 마디로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이미 말해진 것(un déjà dit)이 있다.
분산된, 잃어버린, 변형된 시간의 회복, 재발견, 재회는 이것으로 이것으로 혹은 저것으로 동일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하기는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기는 다만 '말해진 것'에 자신을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너머로, 혹은 그것 이전으로 나아갈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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