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다르게 강독

2장 3절 시간과 담론 (a) 감각적 체험

aurorepark 2014. 1. 27. 22:11

2장 3절 <시간과 담론>(pp. 55-77)은  5 개의 절ㅡa) 감각적 체험, b) 언어,  c) 말해진 것과 말하기, d) 존재와 존재자의 혼동, e) 환원ㅡ을 포함한다. 이 절에서 레비나스는 후설의 '감각적 체험'의 애매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시간으로서의 의식, 의식으로서의 시간, 결국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동사 존재로서의 시간 안에서 공시적인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는 회복되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통시성"ㅡ"되돌아 옴이 없는 읽어버린 시간"(88)ㅡ으로서의 시간, "말하기"로서의 시간,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성, 후설이 "내재성 안에 초월" 안에서 얼핏 본, 그 가능성ㅡ주체의 주체성, 말하기의 주체성ㅡ을 밝히고자 한다.


(a) 감각적 체험(pp. 55-60)


"모든 사물들의 발견은 이 본질의 시간의 빛ㅡ혹은 그 울림ㅡ안에 자신을 기입하는 것에 의존한다. 사물들은 그들의 성질들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성질들은 시간인 체험 안에서 발견된다."(55)


앞절을 요약하고, 이어서 다른 하나를 첨가한다. 이 절을 이끄는 미끼이다. 우선 이 진술은 현시(ostension*), 즉 현상의 현상성, 존재의 현상성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이어서 사물들의 감각적 성질들이 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한에서 "느끼는 것과 느껴진 것에 공통된 작용인 감각"의 애매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감각은 다름 아닌 "체험의 시간적 흐름과 말들이 지시하는 존재자들, 사건들의 동일성 사이의 애매성"을 지시한다. 


[ostension*: 앞서서 레비나스는 앞서서 이말을 'exposi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절의 마지막에서 레비나스는 이 말을 monstration이라고 다시 설명한다. 어쨌든 이 말은 "드러내는 행위로, 삼가도 감춤도 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를 지시한다. 물론 우리는 이 말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7절의 현상의 현상성, "sich zeigen"에 대한 한 옮긴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절은 다만 후설의 <내적 시간>에 대한 읽기일 뿐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7장에 대한 읽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 다음 장의 '언어'는 현상학의 '학logos'ㅡ의미작용ㅡ에 대한 재읽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의식의 애매성, 후설이 학의 토대를 시간의 내적 의식의 구성으로부터 세우고자 했을 때, 그 안에서 후설이 부딪친 의식의 수동성과 능동성의 애매성, 더 자세히 말하면, 수동적인 감각적 의식 안에서 솟아나는 지향성(특수한 지향성), 주체의 능동성은, 레비나스에게 그것이 주체의 주체성의 기원과 관계하는 한에서, 또 그것이 주체성의 신체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한에서, 이 애매성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의식에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자기 안에 간격", 더 정확히 원인상 안에서 드러나는 특수한 지향성ㅡ내재성 안에 초월성ㅡ은 레비나스가 밝히고자 하는 통시적 시간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지향성의 "정향"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이 지향성을 타자로 열리도록 이끄는 것이다. 사실, 레비나스 읽기의 어려움은 하나의 부정이 즉각적으로 다른 것을 위한 긍정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그의 'sans(...없이)'이라는 부정어는 반드시 부정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진술의 많은 것들은 항상 '이중적'으로 읽힌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가 선언하듯이 이 책의 한 목적인 "주체의 주체성을 구해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또 <존재와 다르게>의 개요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타자로 정향하는 주체의 주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 애매성은 레비나스가 지적하듯이 지향성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체험, 즉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 즉 사물의 감각적 성질들이, 후설이 그의 <내적 시간>을 기술하면서 알아차렸듯이 "의미의 벌어진 심연"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후설 자신 안에서 한편으로 사유는 순수한 지향으로 그 대상으로 향하는 것만이 아니며, 다른 한편, 대상은 타성적인 물질로 사유에 주어져서 구성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이 그 혼동 안에서도 내적 시간의 구성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억제(rétention*)"ㅡ후설에 특수한 지향성이라고 부르는 것ㅡ의 개념을 통해서이다. 


[rétention* 보통 '과거지향'이라 옮겨지는 것이다. 이 옮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기서 이 말이 가진 좀더 생생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억제'라고 옮겨본다. 'retenir' et 'pro-trenir'라는 동사는 가려고 하는 것ㅡ뒤로 그리고 앞으로ㅡ을 잡아서 '여기', '지금'에 유지하는 것이다. 과거지향이란 말이 쉽게 과거의 기억을 마치 한 대상처럼 지향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면, 후설이 말하는 '억제'는 앞으로 뒤로 미끄러지는 혹은 사라지는 시간ㅡ즉 '자기 자신'ㅡ을 현재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감각적인 것은 순수한 환대로서 노에시스의 섬광 같은 순간의 현시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노에시스 그 자체는 이미 시간적 연장이고 시간 안의 구성이다. 노에시스는 지향(intention) 안에서 질료(hylé)의 물질성과 관계한다. 감각적 성질들, 소리, 색, 단단함과 물컹함과 같은 사물의 속성들 역시 심리적 삶에 의해 시간 안에서 체험될 것이다."(55-56)


마치 우리는 후설이 그가 극복하고자 한 심리주의적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듯이 보인다. 감각적인 성질들은 다만 느껴진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다시 말해 버클리가 항상 주장한 것처럼, "정감적 상태들"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느끼는 것, 체험은 순수히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성된 것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아무리 느끼는 것에 객관적인 색들과 소리들의 정체를 규정하는 지향성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느끼는 것은 이미 이 색들과 이 소리들의 개요(raccourci*)이다."(56)


[레비나스가 "raccourci*"라고 쓰는 것은 후설의 'Abschattung', 말 그대로 '음영을 만드는 것', 리쾨르가 'esquisse(초벌그림, 개요)'라고 옮기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후설이 Darstellung(figur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에는 어떤 "닮음ressemblance*"이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체험 사이에는 '공통된 어떤 것'이 있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의 주체성이 솟아나는 이 자리, 이 "감각적인 것은 [후설에서] 마치 (...) 그 자신 안에 본래적으로 동일성들이 사라지고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요소인 것처럼, 그런데 그 동일성들 아래 놓여 있는 것(실체substance)의 어둠은 '지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나타난다. 반면, 이때 체험의 흐름은 항상 이념적인 동일성들로 응고될 준비가 된 것처럼 나타난다*"(56).  


레비나스는 위의 인용문에 한 주를 달고 있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감각적인 것이 익명적인 있음(il y a)으로,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ㅡ본질ㅡ의 이해의 지평으로, 또는 지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 밖에, 혹은 체계 밖에 '한 존재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떤 모델 아래서인지를 묻는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그가 후설보다 더 대담하다고 부르는 칸트의 "초월론적인 대상", "어떤 것"의 형식적인 구조가 이미 전제하는 "누군가"를 불러낸다. 뒤에서 '개체화의 원리'를 다루면서 다시 볼 것이다.


후설에서 감각의 시간성 안에서 기술되는 시간의 내적 의식, 특히 그의 '원인상'은 레비나스에게 주체의 주체성이 산출되는 고유한 장소이다.[이 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의 "현상학적 기술 Technique phénoménologie"(in EDE)를 같이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후설에서 시간의 흐름이 전적인 내재성으로, 즉 모든 대상화의 의혹을 제거한 가장 원초적인 체험의 단계에서도, 의식은 자기촉발의 순수한 정감성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향적인 것'ㅡ특수한 지향성ㅡ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이 특수한 지향성은 시간 그 자체이다. 의식은, 감각적 인상이 지연됨이 없이 자기 자신에 제 때에 도달하지 못하는(l'impression sensible diffère d'elle même sans différer*) 한에서 존재한다: 인상은 지연됨이 없이 지연된다. 동일자 안에 타자. 인상은 마치 촛불이 스스로 자신의 숨을 막듯이, 스스로 숨을 '막으면서' 빛을 내는 듯이 나타난다. 동일자는 촛불을 끄는 도구처럼 자기 자신 아래에서 숨이 막히듯이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해체한다. 인상은 자기 자신과 같은 국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막 지나간, 혹은 막 도래하는 지점에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동일성 안에 늦음, 변하는 순간을 유지하는 것, 이것은 앞으로, 뒤로 사라지는 것을 이 순간에 억제 하는 것(pro-tenir ou re-tenir)이다."(57)


후설의 억제(rétention)는 "동일성 안에서 '지연'되고 '차이'를 만드는 것(différer*), 변함이 없이 변형되는 것으로 의식은 인상이 자기 자신과 벌어지는 한에서 인상 안에서 빛난다."(57) 이것은 이미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가 순간의 역설을 말하면서, 항상 자기에의 늦음, 제 때 도달하지 못함, 자기에 자기에 대한 간격 혹은 틈으로 말해진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회복하는 것, 이 '아직'과 '이미'는 바로 '부재의 현전', 억제로서의 시간을 지시한다.


그래서 후설에서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간을, 회복가능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 역도 사실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환원의 환원을 거쳐서 후설이 이른 '원인상'에서도 그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마치 "어제도 그 다음날도 없는 오늘"같은 원인상은 "지각된 것과 지각의 완벽한 일치에도 불구하고(더 이상 그 사이로 빛이 끼어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현전으로 그 둘의 완벽한 동시성에도 불구하고, "변형되지 않은 이 절대, 모든 존재와 모든 의식의 원초적인  근원*"의 이 비-변형에도 불구하고, 원인상은 의식 없이 자신을 각인하지 않는다."(57-58) [*따옴표 안에 따옴표는 레비나스가 인용하는 후설의 글(<내적 의식>)에서 따온 것들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내가 강조한 "불구하고"는 후설의, 더 나아가 레비나스의 주체의 주체성, 개체의 개체성이 탄생하는 한 순간을 지시한다ㄱㄱ(레비나스에서 "자기에도 불구하고"를 상기하자). 레비나스가 다른 곳에서 강조하듯이 이 순간은 철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후설이 스피노자, 헤겔과 달리 전체성, 보편성에 주체를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 밖에 보편성 밖에 놓인 주체를 놓는 순간이다. 이것은 후설에서 "내재성 안에 초월성"을 지시한다.


레비나스가 다른 곳에서 "감각들은 방향(의미)을 가진다Les sens ont un sens"(EDE, 118)라고 말하듯, 주체는 감각들(les sens) 안에서 길(방향un sens)을 읽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일찌기 칸트가 그 유명한 <사유는 어떻게 정향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구분을 '감정(Gefühl)'에 부여했을 때 예감된 것이다.


"변형되지 않은", 자기와 동일한, 억제도 없는, 원초적인 인상은 모든 앞선 잡음(pro-tention미래지향), 즉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앞서지 않는가? 후설에게 원인상은 시간으로 산출되는 모든 변형의 원초적인 근원, "절대적인 시초(창조)"로서, 레비나스가 이 발생은 "종자 없이 일어난다"고 말하듯 "산출된 것도", 어떤 무엇으로부터 "전개된 것도 아니다". "가능적인 것을 앞서고 가능적인 것을 붙잡는 이 실재"(58)는 레비나스가 말하듯 현재의 정의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이 현재는 비록 그것이 미래지향과 무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금 의식의 질서 안으로, 다시 말해 지향적이 되지 않는가? 


"기원, 창조, 능동성과 수동성이 전적으로 혼동되는 자발성의 개념을 이해가능하게  살아있는 현재 안에서 본래적으로 비대상적이고 비대상화된 이 의식이 개체화를 부여하는 시간적인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림이 없이 '억제' 안에서 주제화될 수 있고 주제화된다는 것은 원-인상의 비-지향성이 동일자 이전 혹은 기원 이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즉 지향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것도 이 시간의 흐름을 잘라내기 위해 은밀하게 동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59)


살아있는 현재의 자기와의 동일성의 위상차déphasage, 국면들 간의 위상차, 억제와 미래지향의 지향성을 따라서, 흐름은 다양한 변형들을 모으고, 살아있는 현재로부터 분산된다. 후설에서 결국 감성의 시간은 회복가능한 것의 시간이다. 원인상의 비지향성이 의식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것도 은밀하게 존재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 것도 의식의 선을 자를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에서 현재의 우리의 탐구가 그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환원 불가능한 통시성, 존재의 드러남 뒤에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다.(59)


문제는 어떻게 이 현재(원인상)로부터, 이 자기에의 간격으로부터 이 배제된 통시성의 시간을 끌어내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