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 이전에en-deçà, 말하자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떼어냄arrachement은 최소한의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방식façon de sujet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체의 단절의 힘이며,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원리의 거부, 헤겔적인 전체성과 정치의 거부, 예술의 주술적인 리듬의 거부이다. 그것은 말하는 힘이며, 말의 자유, 다시 말해 발설된 말 뒤에 참조체계 안에서 이 말의 자리를 찾고, 그로부터 이 말을 이 말이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환원하는 사회학 혹은 정신분석을 세움이 없는 말의 자유이다." ("Sinature" in Difficile liberté, p.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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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도 두 사람의 화해 불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이편’의 철학 (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과 ‘저편’의 철학 (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 사이의 차이에서 유래할 것이다. 들뢰즈는 견해를 생산해내는 ‘내재성의 구도’ plan d'immanence를 예술이 실현하는 비인격적 익명성을 통해서 파괴하고자 한다. 이러한 파괴에는 어떤 ‘외재적인 것’도 역할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경우 세계 이편에는, 즉 우리의 내재성 속에서는 어떠한 진정한 혁명의 씨앗도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저편’으로부터만, 우리의 내재성을, 그러므로 우리의 이기성을 부수어 줄 자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다.”1
레비나스는 초월의 철학자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은 그에게 이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이로부터 레비나스의 초월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나를 넘어 너에게로, 그것이 친구이든, 적이든, 나와 분리된, 절대적으로 분리된 너에게로, 가깝고 먼 너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는, 그 길을 열어 주는 그 “혁명의 씨앗”이 ‘내’ 안에, 내 심장에 없는 한, 나는 절대로 너에게로 한 발짝도 다가 갈 수 없다.2 그로 인해, 나는 너를 대신 할 수도, 너에 대한 나의 무한 책임을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책임은 그래서 안젤리우스 실레시우스의 장미처럼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물론, 레비나스에게 구원은 “자기로부터, 혼자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EE, Vrin, 159). 구원은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온다. 데리다가 말하듯,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것(le plus qu'un)’이 필요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은 나로부터가 아니면 안된다.4 다시 한 번, 물론, “구원은 모든 것이 여기 주체 안에 있을 때, 다른 곳으로부터만 온다”(EE, 159). ‘모든 것’이 ‘여기’, ‘나’ 안에 있다면, ‘모든 것’ 밖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 전체, 모든 것의 ‘바깥’인 ‘다른 곳’은 논리상 모순이 아닌가! 모든 것이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 ‘세계 밖’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상학적인 초월성을 배운 우리에게 세계 뒤에 숨어 있는 배후 세계 혹은 세계 이후에 오는 ‘사후 세계’의 전제를 가지고 답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이 질문에 레비나스의 ‘이미지의 현상학’이 자리한다. 1948년 Les Temps Modernes에 실렸던 『실재와 그림자』에서 레비나스는 아주 오랜 형이상학적 테제, “존재는 있는 바의 것”이라는 테제에 맞서서, 하나의 다른 테제ㅡ“실재는 다만 있는 바의 것, 진리 안에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자신의 더블, 그림자, 이미지이다”(Les imprévus de l'histoire, Fata Morgana(IH), 133)ㅡ를 증명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존재의 비-진리”(126), 그리고 레비나스 철학 안에서 이 그림자의 역할,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초월성의 의미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 지성, p. 394-395. [본문으로]
- 카프카의 “법 앞에서”라는 단편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왜 시골에서 올라온 그 농부가 법의 문 앞에서 한 발짝도 그 문 안으로 들여 놓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이 글의 끝에 문지기가 문을 닫으면서 하는 말ㅡ“너를 제외한 아무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없다. 이 문은 너에게만 단지 너만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제 갈 시간이고 문을 닫겠다.”ㅡ은 법은 ‘세계 안’에 어디에도 없으며, 법의 보편성은 단지 각자에 대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초월론적인 통각의 자유와 다른 이 도덕의 자유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 데리다, Spectres de Marx, Galilée, 1993, p. 18. [본문으로]
- 데리다, 같은 책, p. 14. “그런데 혼자, 자기로부터 사는 것을 배우는 것, 이 지혜 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윤리 그 자체이다. 삶은 다르게 사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 자기로부터 배우는 것과 다른 것을 하는가? 살아 있는 것을 전제하는 살아 있는 자의 참으로 이상한 이 연루, 이 때에, 사는 것을 혼자, 스스로부터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동시에 필연적이다. "나는 사는 것을 배우고 싶다", 그것은 ‘죽음’과 더불어, 타자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과 더불어 설명될 때에만 정당하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존재할 수 있다. 삶과 죽음 ‘사이’, 이 사이는 명령의 말이 정의로운 것으로 말해지는 장소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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