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물들은 전적으로 내 맡겨져 있다donnent prise. 그들은 얼굴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얼굴 없는 존재자들이다. 예술은 어쩌면 사물들에게 얼굴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술의 위대함과 거짓말이 동시에 자리한다.”주1)
1952년 Evidence에 실렸던 이 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레비나스의 한 개념, ‘얼굴’주2)을 만난다. 비록 이 얼굴이 61년의 그 ‘얼굴’과 거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레비나스의 ‘얼굴’의 개념이 막 태어나고 있는 순간을 목격한다. 우선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우리가 신는 신발과 반고호의 타블로의 신발의 차이를 말하는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기원>을 떠올릴 수 있다. 하이데거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글을 읽으면, 전자는 사물이 그 자신을 줌donner에도 불구하고, 그 줌은 인간의 손에, 즉 파악prise에 내 맡겨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disposition/Vorhanden, 더 나아가 ‘도구’의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더 나아가 후설 현상학의 자기를 주는 대상의 대상성의 파악(의미부여)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주3). 반면 후자는 같은 사물이 예술이 되었을 때ㅡ반고호의 신발, 혹은 하이데거가 드는 또 다른 예로, 돌로 지어진 성당(건축)ㅡ, 사물은 더 이상 사용되어질 수 있는 도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 존재, 세계, 역사가 도래하는 ‘설립’의 장소가 된다. 예술의 이런 설립의 가치는 우리의 일반적인 질서, 즉 자연에서 예술로의 질서를 전복한다.
“여기서 모든 것이 전복된다: ”사물들에게 처음으로 얼굴visage/Gesicht주4)을 주는 것은, 성당의 그 거기 있음Dastehen/tenue에서, 성당이다. 이 얼굴 덕분에 사물들은 미래에 비로소 가시적이 될 것이고, 얼마동안 가시적으로 머물 것이다.”주5)
위에서 레비나스가 “예술은 어쩌면 사물들에게 얼굴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레비나스가 참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위에서 하이데거는 사물들에게 얼굴을 주는 것은 예술작품이고, 이 얼굴에 의해 사물들은 ‘가시적’이 된다고 말한다주6). 자연적 사물들이 가시적이 된다는 것은 도구로서가 아니라, 사물들 그 자체로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은 예술 다음에 온다. 이러한 질서의 전복은 다만 건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나 시, 연극과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주7). 이어지는 글에서 하이데거가 설명하듯이 신의 조상은 그의 모습을 따라서 만들어진 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조상 그 자체가 신이고, 그로부터 신은 우리 앞에 현전한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술은 더 이상 재현도 모방도 아니며, 헤겔에서처럼 “이념(비감각적인 것)의 감각적인 제시”도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작품은 다만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position)’로 현전을 설립하고, 공간을 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물들은 비로소 가시적이 된다.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가 예술에 부여한 ‘위대함’이 자리할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즉각적으로 바로 그 위대함의 자리는 동시에 거짓말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왜 이러한 위대함은 거짓말일 수도 있는가? 레비나스가 예술에 던지는 불신은 다만 이 곳에서만이 아니다. 그러한 불신은 다만 예술의 무관심성이 함축하는 무책임성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의 위대함과 거짓말의 ‘이중성’, 진리의 자리이면서 비-진리의 장소일 수 있는 가능성은 앞서 우리가 제시한 레비나스의 테제, 실재와 그림자의 이중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또 이 진리의 장소는 결국 ‘현상학적 진리’의 장소가 아닌가?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결국 하이데거에서 ‘탈자적’ 진리로서 드러나는 하이데거의 얼굴ㅡGesicht/Aussehenㅡ의 현상학적 진리가 아닌가? 진리에 대한 비-진리, 위대함에 대한 거짓말을 말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모든 나타남이, 모든 현전의 질서가 감추고 있는 것, 즉 이미지를 다룬다. 그럼 이미지는 무엇인가?
주1) 레비나스, Difficile liberté,『어려운 자유』, biblio essais, 20-21면. 필자의 강조.
주2) 같은 글에서 레비나스는 ‘얼굴’에 대해서, 비록 아직은 『전체성과 무한』의 얼굴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한 시선을 바라본다. 한 시선을 바라보는 것은 포기되거나 내맡겨지지 않는 것ce qui ne s'abanonne pas, ne se livre pas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선은 당신을 겨냥한다vise. 이것은 얼굴visage을 보는 것이다. 얼굴은 코, 이마, 눈 등의 종합이 아니다. 얼굴은 물론 이 모든 것일 것이다. 그런데 얼굴은 그것이 한 존재의 지각 안에서 열어 보이는 새로운 영역에 의해 의미를 획득한다. 얼굴에 의해서 존재는 다만 자신의 형상 안에 갇혀있거나 누군가의 손에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열리고, 심연 안에 자리하며, 이 열림 안에서 인격적으로 제시된다.”(20)
주3)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는 후설의 ‘지향’을 다루면서 ‘빛’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대상은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를 기다린다. 바로 여기에 형상의 완전한 개념이 자리한다. 형상은 그것에 의해 사물이 드러나는 것이고 전적으로 내 맡겨진다 ...l'objet se donne, mais nous attend. C'est là la notion complète de la forme. Elle est ce par quoi la chose se montre et donne prise."(75) 그래서 "우리의 세계의 채우고 있는 빛은 현상학적으로 현상의 조건, 즉 의미sens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레비나스의 빛, 형상에 대한 탁월한 공식이 나온다: "밖으로 부터ㅡ다시 말해 빛을 받은ㅡ것은 이해된다. 다시 말해 우리로부터 온다.바로 이 빛에 의해서 대상들이 세계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속한다. Ce qui vient du dehors -illuminé- est compris, c'est-à-dire vient de nous. C'est par la lumière que les objets sont un monde, c'est-à-dire à nous."(75)
주4) 레비나스의 ‘얼굴’의 개념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들이 없다. 단 하나는 사르트르의 아주 초기의 짧은 단편 <얼굴>에서 얼굴이라는 개념을 빌려왔다고 말하는 것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문에 의존하면, 레비나스의 ‘얼굴’이란 개념은 하이데거로부터 온 것이다. 여기에 나는 레비나스의 전략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전 저작의 하이데거의 그림자가 아주 무겁게 드리워져 있듯이 그의 많은 개념들은 하이데거의 개념의 변형들이 많다. 나는 이러한 변형이 하이데거의 개념들을 해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취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개념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전혀 다른 기능을 할 때 그 개념은 더 이상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고, 그 개념은 또 다른 기능,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얼굴’의 개념도 그런 예들 중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서 이 개념은 다만 예술작품에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 자체를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 개념의 사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5년 하이데거가 ‘Gesicht’라고 쓴 것은 그가 발명한 개념이 아니라, 한 희랍어의 35년 번역이다. 그 희랍어는 ‘eidos’이다. 몇 년 후에 하이데거는 플라톤(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독트린 1947)과 아리스토텔레스(피지스는 어떻게 규정되나?1958)에 대한 글 안에서 eidos를 ‘Gesicht’대신에 ‘Aussehen’으로 번역한다. 이 두 단어에 대해 불어 번역자들은 ‘얼굴visage’이라는 번역어를 준다. 하이데거의 플라톤을 번역한 Préau는 Martineau나 Fédier와 달리 visage대신에 ‘é-vidence(Aus-sehen/ex-videre)’라는 번역어를 준다. 이쯤까지 오면 여기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은 이 Aussehen을 단순한 모습aspect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Aussehen은 그에게 자기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 ‘탈자적 현상학’의 기초에 놓여 있는 한 단어가 바로 ‘얼굴’이다. 레비나스가 이 단어에 자신의 철학의 내기를 걸었을 때, 그 위험은 크고 크지만 그 효과도 크고 크다. 레비나스의 “실재와 그림자”는 또한 플라톤의 이 얼굴에 대한 설명이기고하다.
주5)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기원』De l'origine de l'oeuvre d'art (conférence de 1935), tr. de franç par Emmanuel Martineau, Autentica, 1987, p. 33. (이 글은 세 개의 version을 가진다. 31, 35, 36): "Tout, ici, est renversé: c'est le temple, dans sa tenue, qui donne premiçre fois aux choses le visage grâ̂ce auquel elles deviendront à l'avenir visibles et, pour un temps le demeuront."
주6) Holzwege(1949)에는 “인간에게 사물들 그 자체에 대한 봄을 준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Chemins qui mènent nulle part, Tel Gallimard, p. 45.
주7) 하이데거는 성당의 종소리에 대해서는 말해도, 어디에서도 음악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실재와 그림자”에서 음악의 ‘리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래서 전적으로 우연이 아니다.
'- 세계 밖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비나스에서 이미지의 현상학, 주체의 방식(4) (0) | 2014.07.30 |
---|---|
레비나스에서 이미지의 현상학, 주체의 방식(3) (0) | 2014.07.30 |
레비나스에서 이미지의 현상학, 주체의 방식(1) (0) | 2013.10.28 |
사르트르 -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던 언어(5) (0) | 2010.06.22 |
사르트르 -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던 언어(4) (0) | 2010.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