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 대상 그 자체 대신에 대상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베르그손이 대상을 보는 한 방식une vue prise sur l'objet, 추상[분리]주1)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여기서 미학적인 것의 최상을 보는 대신에 대상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사진도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다.주2)] 이런 방식으로 우리와 사물 사이에 이미지를 놓는 것은 사물을 세계의 전망으로부터 떼어내는arracher 효과를 가진다.”주3)
레비나스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의 기능ergon에 대해서, 예술의 기능에 대해서 묻는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예술의 탁월한 한 기능은 우선 대상 대신에 그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하이데거에서와 달리 세계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세계의 전망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절의 제목 “l'exotisme (exôtikos=étranger)”을 그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밖에 놓음(exô=le dehors, le mouvement en dehors)”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표상된 이미지 대상들은 ‘밖’에, 즉 세계 밖에 놓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려진 상황, 이야기 된 사건은 우선 그 상황 그 실제의 사실을 재 산출해야 한다. 그런데 타블로, 이야기를 매개로(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들과 간접적으로 관계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에 근본적인 변형을 가져온다. 이 변형은 타블로의 빛과 구성, 또 화자의 경향성과 다듬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것들과 유지하는 간접적인 관계 안에ㅡ그것들의 엑조티즘exotisme 안에, 그런데 그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엑조티즘 안에ㅡ존재한다. 우리가 예술의 ‘무관심성désinteress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행위의 가능성을 정지시키는데neutralisation 있지 않다. 엑조티즘은 응시contemplation 그 자체에 변형을 가져온다.”(EE, 84)
이러한 변형을 통해서 대상들은 이제 어떤 ‘안’과 관계함이 없이, 또 이 주체에 ‘소유’됨이 없이 ‘밖dehors’에 존재하게 된다.
“타블로(그림), 조상, 책은 우리 세계의 대상들이다. 그런데 이 대상들을 통해서 표상된 사물들은 우리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s'arrachent à notre monde.”(EE, 84)
이미지가 세계 안에 들어오자마자, 세계 안의 표상된 대상들은 세계 안에서 대상의 더블double이 되는 대신에, 세계 밖으로 던져진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엑조티즘이라고 부르는 이 외재화는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는가?
표상된 대상이 아무리 실제적이라고 할지라도(예를 들어 사진처럼), 또 그것이 우리의 세계 안에 속한다고 할지라고, 그것이 일단 세계 안에 들어오자마자 외재화 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타자성”때문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더 이상 주체의 지배 아래 속하지 않는 이 타자성은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드러나게 하는 형상의 부재에 의해서 설명된다. 형상의 부재는 “벌거벗음”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니라, “형상이 완수하는 외재성의 내재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것”(84)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구로서의 사물이 지닌 외재성은 그 사용 안에서 소멸된다. 반면 예술에서 타블로의 형태와 색깔은 사물 그 자체, 즉 “사물의 외재성을 내재성으로 덮음recouvrent이 없이, 사물 그 자체로 발견한다découvent”(85)주4).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물의 외재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학에서 형상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순수 질료’(물질), 감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지는, 예술은 지각을 감각으로 대체하는 데에 존재한다고 진술이 나온다.
“지각 안에서 한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소리들, 색깔들, 단어들은 이것들을 덮는 대상들과 관계한다. 소리는 한 대상의 소리이고, 색깔은 한 대상의 단단한 표면에 붙어있으며, 단어는 의미를 드러내고, 대상을 명명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의미작용에 의해서, 지각은 또한 주관적인 의미작용을 가진다. 여기서 외재성은 내재성과 관계하지 사물 그 자체의 외재성이 아니다. [반면에] 예술의 운동은 감각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지각을 떠나는 데에, 대상과 관계하는 성질을 떼어내는 데에 있다.”(EE, 85)
이러한 대체 안에서, “지향intention은 대상에 곧장 이르지 않고 길을 잃어버린다s'égaré”(85). 여기서 미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바로 이 감각 안에서ㅡ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aisthesis 안에서ㅡ이 “길 읽음”이다. 그런데 길 읽음이란 말이 지시하듯이, 이 감각은 대상에 이르는 길도, 그렇다고 주관적인 질서도 아니다.(85) 더 이상 지각을 위한 물질이 아닌 이 감각으로서의 감각[순수감각]은 예술에서 새로운 요소로서, 그 자신의 “본래적인 비인격성”(86)으로 되돌아간다. 레비나스가 “감각의 음악성”(86)이라고 부르는 이 미학적 사건은 존재자가 자기를 정립하면서 빠져나온 ‘일 이 아’의 그림자와의 재회주5)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엑조티즘을 말하면서 구분한 ‘안’과 ‘밖’의 구분이 한 순간 사라지는 역설에 직면한다.
“감각과 미적인 것은 사물 그 자체를 산출한다. 그런데 최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대상들을 떼어내면서 감각은 결국 새로운 요소, 실체적인 것의 카테고리(범주)조차 거부하는 ‘안’과 ‘밖’의 구분에 전적으로 낯선 것에 이른다.”( EE, 87)
프랑스와 아르망고의 표현처럼ㅡ“autrement que dehors”주6)ㅡ 이미 여기서 우리는 존재와 다르게를 예감한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레비나스는 여기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분하는 안과 밖의 구분으로 그 자신이 말하는 엑조티즘/외재화를 이해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사실 레비나스를 읽으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가 말하는 초월, 외재는 단순히 내재에 대립되는 것도 앞면과 그 면이 감추고 있는 뒷면envers/endroit(TI, 210)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내적 이념의 외적 표현도, 하이데거처럼 존재의 은폐와 탈은폐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로댕의 조상은 그가 말하는 '엑조티즘/외재화'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아주 어렵게 들려준다.
“타블로는 이미 우주의 한 조각을 탈취해서arracher 따로 떼어놓는met à part 것이며, 한 내면(89쪽 참조 예술가의 세계 풍경) 안에서 서로 낯설고 서로 침투할 수 없는 세계들을 함께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composition]. 이러한 사실은 미학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타블로가 지니는 한계는 그것을 한정짓는 물질적인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이 한계는 반대로 미학의 긍정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댕의 조상들이 이어지는 저 무차별적인 덩어리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재는 이 지반 위에서 세계 없는 실재의 이국적인 벌거벗음으로 정립되고,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난다.”(EE, 88)
위에서 레비나스는 타블로 혹은 조각, 혹은 영화 모든 예술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탈취arrachement[sortir de l'être]이고 다른 하나는 정립position이다. 어떤 것이 자신 안에 갇혀있을 때, 자신을 내어 주기를 거부할 때, 그것을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것, 그것은 탈취이다. 그리고 탈취한 것을 그 지반 위에 놓는 것이다.[이 기술은 레비나스의 실체화의 과정과 겹친다.] 그런데 로댕의 조상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러한 두 가지를 한 번에 다 보여준다. [이것은 앞서 노력과 노력에 달라붙는 권태와 겹친다] 레비나스의 시선이 집중하는 조상들을 받치고 있는 블록, 그 지반으로부터 그 지반에 '균열'을 만들면서 그 '틈' 사이로 벌거벗음이, 형상 없는 질료, 감각이 솟아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예술이 보여주는 외재화exo-tisme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분하는 안과 밖의 구분에 낯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한 위대함은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예술의 해악 한 가운데에서] 보통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타자성, 지반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예술의 위대함 안에서, 더 이상 객관적인 것도, 우리의 내재성과도 관계하지 않는 외적(이국적인) 실재는 이어서 “어떤 내재성의 포장l'enveloppe d'une intérieur”처럼 나타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예술 작품이 인격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들의 내재성 그 자체이다. 정물화, 풍경, 더 나아가 초상은 이것들의 물질적인 포장이 표현하는 고유한 내적 삶을 가진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예술가의 세계라고 부르는 근대가 발견한 개인 영혼l'état d'âme의 “풍경”이다. “들라쿠라와의 세계가 존재하듯이 빅토 위고의 세계가 존재한다.”(89) 이로부터 아주 쉽게 예술가의 영혼, 혹은 사물들의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작품은 다시 우리의 세계로 통합된다. 같은 방식으로 타자의 타자성은 타아alter ego로 생각된다. 여기에 그 예술의 거짓말이 자리할 수도 있다.[레비나스에게 상호주관성은 공감에도 타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달리 현대예술에서 예술적 실재에서 영혼(주체)과 표현을 제거하고자 하는 순수한 나타남으로, 더 이상 그것이 포장하는 영혼이 필요 없는 예술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표상의 붕괴 이후. 존재의 순수한 감정, 순수한 “물질성”주7), 벌거벗음의 발견은, 그 성질들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성질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온 존재의 형태 없는, 부조리한, 폭력적인, 우리를 짓누르는 물컹거림의 재발견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impassible“(91) 순수한 나타남으로서의 ”현전“의 발견일 뿐이다. 존재자들이 우리의 ‘안’과 이미 관계하고 있는 형상들의 빛 뒤에 물질은 ‘일 이 아’의 사실 그 자체이다.(92) 바로 여기에 예술에 거짓말이 존재한다.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이 순수한 나타남의 경쾌함, 가벼움에,”존재의 무게를 잊어버린“ 그 나타남의 잔치의 무관심성 안에 사물들에 주어진 얼굴의 거짓말이 존재한다.
“예술에 의해 물질에 주어진 생명...표현은 물질 덩어리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 예술이 불신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 완벽한 미는 다른 것을 돌봄이 없이 침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미는 침묵의 수호자이다. 미는 모든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laisser faire. 바로 여기에 미적 문명이 가진 한계가 자리한다.” (Lévinas, De l'oblitération, p. 8.)
주1) 여기서 이미지의 추상은 대상의 본질의 추상이 아니라, 실재의 에포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2)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의 한 구절을 상기할 수 있다: “이미지는 어떤 존재성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표상’보다는 ‘이상의 것 plus’을,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사물’보다는 ‘이하의 것 moins’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사물’과 ‘표상’의 중간에 있다”(Matière et mémoir, in Oeuvres I, Gallimard, p. 161)
주3) EE, 83-84. (EE, De l'existence à l'existant 존재에서 존재자로)
주4) 하이데거는 앞서 우리가 인용한 같은 텍스트에서 도구 안에서 질료는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반면, “예술 안에서 질료는 사라지는 대신에 예술 작품과 더불어 세계를 정착시키면서 그 자신을 현시한다”고 말한다(H,49).
주5) EE의 38쪽을 참조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무기력paresse’를 다루면서 존재자가 끌고 다니는 실존의 무게에 대해서 그림자를 빌어서 말한다. “실존은 지치지 않고 그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던진다.(...) 실존은 (우리가 여행에서 가방을 끌고 다녀야 하는 것처럼) 실존의 여행을 복잡하게 하는 그 자신의 무게를 끌고 다니다. 실존은 고대의 현자의 조용함이 없다. 실존은 단순 명백하게 실존하지 않는다. 실존의 운동은 그 자신 안으로 접히고s'infléchir 그 자신 안에서 빠진다s'embourbe. 이것은 존재 동사의 재귀 동사적 성격을 폭로한다. On n'est pas, on s'est. 우리는 다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된다.”
주6) Françoise Armengaud, "faire ou ne pas faire d'image. Emmanuel Lévinas et l'art d'oblitération, in Noesis 2000/3
주7) 레비나스가 친절하게 설명하듯이 물질성matérialité의 개념은 사유 혹은 정신에 대립하는 물질과 어떤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물질성은 형상 없는 순수한 질료의 개념으로서 일 이 아를 지시한다. 더 나아가 순수한 인상, 순수한 감정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Z3에서 주체hypokeimenon라고 부른 것으로, 형상 없는 순수 질료는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ousia의 후보에서 제외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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