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철학과 위반의 사유
익명적인 존재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을 가졌던 두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라는 같은 철학적 기원을 가졌던 두 철학자는 그들 각자의 철학의 전개 안에서 같은 지점으로 향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두 철학자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가 존재의 충만을 다른 하나가 존재의 결핍을 말한다는 데에서라기보다는 레비나스의 초기의 존재론에서부터 - 특히 『존재로부터 존재자로』, 『시간과 타자』- 그리고 그 이후의 그의 철학의 전개를 특징짓는 무의 거부1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후자의 차이가 전자의 차이를 낳는다. 이러한 무의 거부는 그들 각각의 현상학을 부정성의 철학과 위반의 사유로 특징짓는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에서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었다. 사르트르에서 자기와의 어떤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 즉자존재의 잉여성, 그것의 우연성으로부터 탈출을 촉발하기 위해 존재는 마치 자신의 존재 안에 무를 도입함으로써, “무에 의해 존재의 압축을 완화시키는 방식”(EN, 32)으로 “있는 바의 것이 아닌” 자유로서의 대자존재가 된다. 레비나스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 쉬운 이 방법을 처음부터 금지한다. 그의 『탈출』(1935)에서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존재로부터의 탈출은 그 욕구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어디에도 존재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없다. 마치 제자리에서 도는 회전문처럼 날의 광기가 그 광기 안에 다시 갇히듯이 “공허는 자기 자신으로 다시 채워지고.(...) 더 이상 점진적인 변증법은 없으며, (...) 예전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무의 구멍은 풀림 없는 매듭 안에 엮인 존재에 의해 막혔다.”2 존재는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 레비나스 사유의 어려움은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이 전적인 지배로부터 부정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 “바깥의 불가능성 안에서 바깥에 대한 사유, 불가능한 바깥의 욕망을 산출하는 사유.” 레비나스가 블랑쇼에 대해서 말하듯 "최상의 의식은 출구 없음에 대한 의식"3일 것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충만 안으로의 후퇴”(『존재에서 존재자로』, EE, 118), 혹은 “순간의 충만 안으로의, 하나(l'un)의 비연장 안으로의 이 믿어지지 않는 후퇴”(『존재와 다르게』, AE, 173)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 후퇴(recul), 이 자기로의 접힘은 무엇을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가까이는 후설에게서, 더 멀리는 칸트에서, 데카르트에게서 배운 “내재성 안의 초월성”이 아니면 무엇인가?4
자기에서 자기를 떼어내는 것, 그것의 불가능성, 자기로부터 도망치는 것의 그 불가능성 안에서 “족쇄 채워진 부정성”(AE, 173)이라고 레비나스가 부르는 것은 모순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나는 [날의 광기를] 쳐다볼 수도 안 쳐다볼 수도 없었다”5라고 말한다. “이 불가능성은, 레비나스가 말하듯, 모순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 불가능한 삶이라고 말할 때의 그 불가능성이다.”6. 이로부터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알 수 없는 천상의 현재가 존재한다”고 비판한다. “실존의 무게는 과거로 단숨에 던져지고, 현재의 자유는 이미 질료 너머에 자리를 잡는다.”(TA, 44) 사르트르가 “자기성의 회로”라고 부르는 자기와의 거리는 ‘무’에 의해서, 순간에서의 자유에 의해서, 다시 말해 대자에 의한 즉자의 무화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것(인간 실재)의 있었던 바의 것은 있는 바의 것과 올 것의 무에 의해서 분리된다.”(EN, 495) 여기서 대자는 영원히 있는 바의 것이 아님으로 그 존재의 무게로부터 즉각적으로 분리된다. 이 분리는 다른 한편 대자를 영원히 “결핍된(충분하지 않은)” 자기(에의) 존재(la conscience (de) soi)로 선고한다. 그것인 바의 것이고자 하면서 그것일 수 없는 대자의 이중구속적 상황은 그의 자유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나의 존재에 덧붙여진 속성도 본질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 즉 초월 자체이다. 하이데거의 말하는 방식을 빌어 사르트르는 “인간 실재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그의 자유가 문제되는 그런 존재”(EN, 515)이며, 그것은 “인간실재가 충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EN, 516)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대자의 존재론적인 구조인 결핍(충분하지 않음)은 마치 거울의 반사처럼 그의 존재의 정당화되지 않는 존재의 잉여에 대한 구역질의 경험을 반사한다. 나의 존재의 근거지울 수 없는 그것의 잉여성, 우연성은 영원히 충분하지 않음으로서의 자유를 선고한다. 즉자와 대자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이 거리는 대자의 비극적 존재론적 상황으로 “자기를 근거짓고자 하는 무용한 수난”(EN, 708)으로 선고된다. 이 수난은 사르트르에게 자유의 대가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리에 존재의 숙명에서 벗어나고자 한 대자는 자신의 숙명에, 자유의 사실성에 사로잡힌다.
하나가 이 익명성을 사실성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숙명 - “더 이상 아무 것도 해볼 것이 없다” - 으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하나는 이 숙명을 다르게 돌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의 다르게(autrement)라는 부사는 존재의 부정이 아닌 존재의 과장(hyperbole, l'emphase), 존재의 위반(l'excès)을 지시한다. 속도의 위반이 속도라는 유를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존재와 다르게'는 이 존재라는 유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존재 본질을 넘어선다.7 이렇게 과장의 방법은 한 새로운 이념을 어떤 다른 개념으로부터 연역함이 없이, 그 이전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산출한다: "존재가 자신을 최상의 방식으로 정립하고(se pose), 자신을 긍정하는(s'affirme) 하나의 방식은, 나타남에서, 언어에서 자기를 노출하는 것(s'expose)이다." 여기서 존재는 결국 자신을 내려 놓기에 이른다(se dépose).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그의 전 철학 안에서 분리와 회귀라는 자기의 자기와의 관계로 드러난다. 물론 사르트르의 최초의 자유로서의 의식은 존재에 대한 이러한 숙명론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자유는 이어서 하나의 숙명이된다. 자유는 자유가 아닐 수 없는 사실성이 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되었다"(EN, 174, 515)고 말하듯이 이 무상성, 이 “환원불가능하고 부조리한”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에게는 어찌해 볼 수 없는 하나의 사실성으로 남는다. 그것은 존재의 무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이 사실성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의 멀미 혹은 불안, 그것은 나의 자유는 그 자신 이외에 다른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신 이외에 다른 한계를 가지지 않음 - 오랜 서양 존재론의 '존재'에 대한 정의 - 은 레비나스의 용어에 의하면 ‘고독’이다. 자신 이외에 다른 한계를 가지지 않음은 '자기와 다르게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에게 “자기에도 불구하고(malgré soi)”라는 의식의 양태는 불가능한 의식의 양태들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이 ‘자기에도 불구하고’는 레비나스에게 감성적 혹은 향유의 주체로서의 주체의 주체성의 구조를 결정한다.
사실, 사르트르는 이 전에 우리가 만나본 적이 없는 타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 철학자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사르트르에게 “타인은 세계 내의 구멍”(『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실존을 발견하면서』, p. 298)으로 나의 자유와 나의 세계를 그 검은 구멍으로 흡수하면서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이 힘은 우리가 대상이나 존재에 대해서 가지는 타자성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르트르는 너무 일찍 서둘러서 자신의 분석을 마감한다”(위의 책 같은 곳)고 말한다.
“사르트르에서 타인과의 만남은 나의 자유를 위협하며, 나의 자유의 파괴와 동일시된다. 바로 이 지점은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존재와 진정으로 외적인 것과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곳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여기는 자유의 정당화의 문제가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타인의 실존은 반성되지 않은 순진한 자유의 합법성을 질문하지 않는가? 자유는 자기에 대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리고 자유는 마치 타인의 자유의 탈취로서 자기로 환원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가?”(『전체성과 무한』, p. 280. 나의 강조.)
이러한 자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은 칸트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될 수 있다. 칸트적 이성은 실천에서 전적인 자율성(l'autonomie)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도덕의 주체는 “타인과 독립적으로”(“계몽이란 무엇인가?” § 1)8 이성 그 자체의 명령으로서의 명령에만 복종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레비나스에게는 의지의 자율성 이상인 어떤 외재성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조건 지어지지 않은 도덕적 의무는 이성적인 자율적인 의지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얼굴’의 허약성이 나에게 드러내는 ‘저항’으로부터 유래한다. 레비나스에게 윤리의 가능성은 절대로 자발적인 의지의 이성의 법에 복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얼굴로부터 나오는 말의 사실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법은 따라서 타인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성으로부터, 타율성으로부터, 전적인 우연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사르트르가 이 타인과의 만남이 가져오는 전적인 세계의 전복을 증언하면서도 자신의 반성을 대자의 자유의 정당성, 대자 존재의 권리에 대해서 물을 수 없었던 순진함은 그가 사로잡혀 있었던 이성의 투명성과 자율적 의지의 초월론적 의식의 요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 사유의 거대한 힘, 그의 사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은 너무 자연적이라서, 매일 보는 것이라서, 너무 살 같아서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이 가장 문제적이 되는 순간에 있다.
“죽지 않기 위해 먹어야 할 때, 마셔야 할 때, 몸을
덥혀야 할 때, 어떤 힘든 노동에서 양식이 에너지로 변할 때, 세계는 새로워진 존재 앞에서 종말에 이른 듯이, 뒤집힌 듯이,
부조리한 듯이 보인다. 시간은 자신의 돌쩌귀에서 빠져 나온다.”(EE, 68)
“일상을 비-진정성(고유성)으로 선고하는 것, 그것은 배고픔과 목마름의 진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들과 연루된 인간의 위엄을 구한다는 핑계 하에서 자본주의적 관념론의 거짓말에, 그리고 그것이 제안하는 마약과
말의 우아함 안으로의 도피에 눈을 감는 것이다. 경제적인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맑스 철학의 가장 큰 힘은 도덕적 설교의 위선을
극단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그 철학의 가능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도의 진지성 안에, 배고픔과 목마름의 선의지 안에 자신을
놓으면서, 그 철학이 제시하는 투쟁과 희생, 그것이 초대하는 문화는 이 진지한 의도들의 연장일 뿐이다.”(EE, 69)
만일 내가 타자의 초월성에 사르트르처럼 주체인 나의 초월성으로 대답한다면, 나는 타인의 “배고픔과 굶주림의 진지성”을 무시하면서 “도덕적 설교의 위선”(EE, 69)안으로 떨어질 것이다. 나, 나는 이 초월성에 즉각적인 물질적인 내재성으로 대답한다. 누군가 나를 찾아오면, 그에게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마실 것을, 먹을 것을, 혹은 최소한 하늘을 가릴 지붕을 제공해야 한다. 나는 빈 손으로 말을 할 수 없다. 여기에 레비나스의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 자리한다. 타인의 초월성 앞에서 나의 초월성으로 되돌려 주는 대신에 나는 나의 가장 내밀한 구조로 물러선다.
레비나스의 주체의 주체성은 렝보의 시구처럼 "타자는 나"라고 말하지 못하는 의식이며, "나는 모든 이들과 같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의식이다. 전자는 공동체주의가 가지는 차별주의이며, 후자는 보편주의가 가지는 편안함과 무관심성이다. 레비나스에서 타자는 자신의 차이 안에서 지연되고 차별지워지며, '나'는 무관심성이 아님(non-in-différence) 안에서 자기를 유지한다. 타자는 나를 부르고 나는 대답한다. 나는 어떤 상태에서도 이 부름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집의 모든 창문과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다고 해도 나는 이 부름을 듣지 않을 수 없다. 타자는 얼굴을 가지며, 얼굴이다. 타자는 모든 감각적 성질을 초월하는 얼굴의 초월성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나는 이 초월성에 내재성 -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직접적인 물질성- 으로 대답한다.
‘얼굴’에 대해서 사실 ‘나’는 헤겔적인 의미의 <경험>을 할 수 없다. 인식의 경험의 학인 『정신 현상학』의 주체는 타자에서, 그 안에서 소외되며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경험된다. 그리고 이어서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 주체는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성으로 긍정하기에 이른다. 사르트르의 시선의 분석이 헤겔과 달리 나와 너 사이의 매개인 제 3의 시선의 금지, 즉 내가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자일 수 없음을 통해 전체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의식는 자신이 받은 수치심을 타인에게 같은 방식으로 그대로 돌려줄 수 있다. 레비나스의 '얼굴'은 이 상호성을 처음부터 금지한다. 레비나스에게 절대적인 타자, ‘다른 인간’인 타인은 어떤 방식으로도 같은 종류에 속한 사례들이 아니며, 대칭적으로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무관심적으로 놓여있는 평등한 두 개인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 내 앞에 타인은 레비나스의 표현, “다른 인간(l'autre homme)”이 말해주듯이 내가 인간인 것처럼, 그가 그녀가 그들이 인간인 것처럼 ‘인간’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레비나스의 사유는 그의 윤리가 도덕이 아닌 것처럼 그의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는 철학적으로 "인간주의"가 아니다.
타인은 비교되어질 수도, 교환되어질 수도 없다. 그는 나의 환원불가능하고 유일한 단독성에서만,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한에서만, 내가 나인 한에서만 나에게 주어질 수 있다. 나와 타인의 비대칭적인 윤리적인 대면의 관계 안에서 나는 절대로 타자일 수 없으며, 나와 너는 자리를 바꿀 수 없으며,
돌아가면서 타자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정치적 시민성에서 말해지는 교환가능한 나와 너의 관계는 - 나도 너에게 타자일 수 있고 나도 얼굴을 가질 수 있으며, 따라서 내가 너에게 책임이 있듯이 너도 나에게 책임이 있다 등등 -
레비나스의 정면의 관계에서는 부재한다. 나의 자리는 항상 다만 대답하는 자리이며, 이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나는 얼굴을 가질 수
없다. 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유일성 안에, 너에 대한 나의 책임 안에 나의 동일성, 나의 주체성이 자리한다.
이 대답해야 함, 레비나스가 주체의 주체성이라고 말하는 이 기억불가능한, 기원 이전의 모든 것에 앞서있는 이 대답은 질문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나의 연루에 의해서 시작될 수 없다. 나의 타인에 대한 한정 없는 책임은 나의 자유 이전으로부터, 모든 기억 이전으로부터, 모든 완성에 앞서서, 비-현재, 탁월한 비-기원, 비-원리로부터, 본질의 너머 혹은 이전으로부터 온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주체성의 비-장소가 놓이는 장소이다."(AE, 24)
사르트르의 ‘시선’이 그가 전쟁 전에 쓴 “얼굴들”에서 이 시선의 전신인
‘얼굴’을 “보이는 초월성”9이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보이지 않는 초월성이라고 말 할지라고, 이 초월성에 대해 의식은 여전히 초월성으로
대답한다. 다시 말해 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지만 내 얼굴을 들어 올려 타인에게 나의 시선을 던진다. 레비나스가 자유의
순진성이라고 부르는 이 의식은 깨어있으면서도 아직 취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의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의 얼굴을 들어 올려
타인에게 시선을 던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초월성에 대해 초월성으로 대답하지 못하게 하는 그 망설임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부정을 부정으로 대답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 장밋빛 얼굴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밤들의 마르지 않는 심연에 잡혀있는 듯하다. 물론 나는 그녀를 내 무릎 위에서 발견할 수도, 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칠 수도,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오랫동안 만질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저 대양들의 기억할 수조차 없는 소금기를 자신 안에 가둔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별의 빛을 감춘 돌멩이를 만지듯이, 그 자신 안에서 무한으로 열린 한 존재의 껍데기만을 만지는 듯하다.”(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Pléiade, III, 386)
어떤 종류의 내면성, 내재성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전적인 초월, 전적인 부정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의식이 증오했던 것은 이 내면의 "끈적임", "비밀"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르트르의 철학이 잘 보여주듯이 부정은 아무 것도 잘라내지 못한다. 그의 철학이 끝없는 부정을 요구하는 것은 사르트르가 믿었던 것처럼 의식의 정의 그 자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비워진 자리는 존재에 의해 재빨리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랑쇼는 "공허가 나를 속였다"10라고 말한다.
세계의 광기 안에서,
"벽 앞에 세워졌지만" 시간은 곧 다시 균형을
되찾는다. 죽음도 부정도 시간의 돌쩌귀를 분리하지 못하고 반대로 결합한다. 이 안에서 죽음은 순수한 존재의 일반성 안에서 삶의 사건으로 존재를 긍정한다. 존재 안에서 체험된 무는
존재의 "성숙"으로 체험된다. 여기에 움직이지 않는 바닥의 안정성, 정합성, 행복, 세계의
실증성이 자리한다. 부정된 것은 존재의 운동 안에서 다시 긍정된다. 불행에 의해 점령된 행복은 그것으로부터의 내일의 탈출을 약속한다. 오늘의 불행, 오늘의 누군가의 죽음은 내일의 행복을 약속한다. 이것이 블랑쇼를 레비나스를 피곤하게 한다. "최악의 불행 안에서 조차도, 나는 행복했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공허는 재빨리 채워지고, 휴식은 조용하지 않다." 동일한 것의 제자리로 돌아옴은 그 자리에서 도는 회전문이다. 이 날의 광기, 존재의 실증성의 광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최상의 의식은 출구 없음에 대한 의식"11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지옥에 대한 의식,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과 다르지 않다.
변증법의 고갈은 "마치
우리가 허무주의의 극단에 있는 것처럼, 의미의 상실, 언술의 분산을 알려온다. 여기서 무는 더 이상 조용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을 듣는 귀를 위해 애매성이 된다. 언어와 연결된 의미는 ...우리를 무의미한 채질로 이끈다. ...여기서 우리는 중성적인
것의 비인간성, 그것의 끔찍함에 던져진다."12
레비나스의 철학은
여기서, 이 막다른 골목에서 - 후기모더니즘의 허무주의, 냉소주의에서 -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레비나스는 어떻게 다른 열림이 가능한가를
질문한다. 그가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말할 때, 이미 모든 출구가, 이전의 유일한 출구였던 무마저도 전혀 탈출의 도구가 아니라면,
부정성은 이미 그 힘을 고갈했다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넘어가야 한다. 존재는 내가 발 딛고 있는 토대라면, 이 토대 없이 위로
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뛰었다 떨어지는 몸을 받쳐줄 토대를 우리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보다 낫다"고 말한다. 부정이 아니면, 부정과 더불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탈출하는 적과의
동침만이 존재한다. 그것에 레비나스는 '과장'이라는 말을 준다. 마치 경매에서 가격에 올라가듯이 불어나는 가치의 상승의 논리(surenchère)만이 벗어날 수
없는 존재를, 이 날의 광기를 다르게 돌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된다.
레비나스에서 존재의
본질 너머로의 열림은 윤리를 통해서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열림은 존재의 탈존적 열림이 아닌 타인에의 노출(l'exposition à autrui)에서 가능하다.
노출은 말 그대로 탈-정립(ex-position), 정립의 과장, 위반, 잉여가치이다. 위반은 한계를 벗어나지만 그 한계의
지반을 부정하지 않는다. 속도의 위반이 속도를 부정하지 않듯이, 가격의 상승은 그 가격의 지반, 경매물을 부정하지
않듯이, 존재의 위반은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존재를 그 극단까지 그 존재가 가진 가능성을 그 한계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거기로부터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 생겨난다. 정립의 과장인 노출은 그 정립에는 전혀 속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윤리적인 의미를 산출한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초월론적인 방법과 다른 탁월한 길인 과장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관계는 나에게 "최후의 출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타인, "존재의 갇힘으로부터, 밖이 없는 존재의 낮의 질서로부터 밖이
열리는 유일한 점인, 이 타인은 출구가 없다"13고 말한다. 여기에는 짖누름의 견딤만이
자리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에 대한 나의 짊어짐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파울 첼란의 시구가 조응한다: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짊어져야 한다." 레비나스는 ""나"는 말(馬)의 본질 안에서 숨이 막힌다"14라고 대답한다.
-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l'il y a”의 개념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무 없는 존재의 개념, 어떤 열림도 허락하지 않는,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한 존재의 개념을 촉진하기”위해서 라고 말하다 (TA, 28). [본문으로]
- 레비나스,『블랑쇼에 대하여』, Sur Maurice Blanchot, Fata Morgana, p. 63 [본문으로]
- 위의 책,, p. 63. [본문으로]
- 프랑스 현상학의 흐름에서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와 앙리의 중간에 놓인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는 자기와의 절대적인 일치로서 자기와의 어떤 종류의 분리도 불가능한 앙리와 조금의 내재성도 없는 전적인 초월성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지향성 사이에 존재한다. [본문으로]
- 모리스 블랑쇼,『날의 광기』, La folie du jour, Gallimqrd, p. 18 [본문으로]
- 레비나스, Sur Maurice Balnchot, p. 67 [본문으로]
- 이런 과장, 과잉, 위반의 사유는 레비나스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것도 부정의 방식도 아닌 숭고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를 우리는 칸트의 제 3 비판의 Ungeheuer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에 붙은 접두사 un이 단순히 부정이 아닌 것은 Unheimliche(내밀한 낯섬)가 heim(자기집)의 부정이 아닌 것과 같다. 여기서 접두사 'Un'은 독일어에서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과잉으로 인한 자신의 척도(정도)의 넘어섬을 지시한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자기의 과잉, 혹은 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독일어에 kraut는 땅에서 솟아나는 어린 싹이나 풀이다. 그런데 이 말에 Un이 붙으면 Unkraut '잡초'가 된다. 싹이 정도를 넘어서면 잡초가 되듯이 동물이 동물의 정도를 넘어서면 괴물이 된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ein Untier'도 이런 경우이다. 'Tier'는 '동물'이다. 여기에 접두사 Un이 붙으면서 동물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동물이면서 이 동물이 아닌 그 동물의 과잉으로서 괴물이 된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인 그 곤충, 괴물은 '잠자 이면서 잠자가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서 휠더린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곤에서 \"polla ta deina\"를 \"Ungeheuer ist viel\"이라고 옮긴다: Ungeheuer ist viel Doch nicht/Ungeheuerer, als der Mensch. (Hölderlin, Antigone de Sophocle, Acte II, 349-350행) 많은 괴물스러움이 있다, 그런데 인간보다 더 괴물스러운 것은 없다.\". [본문으로]
- 칸트의 이성의 자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 의존하는> 레비나스의 윤리는 미성숙의 단계에 머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묻는다. 비판의 이성 안에서 이성은 아직도 어떤 술 기운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정으로 깨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후설의 그 철저한 깨어있음 안에 잠들어 있는 이성, 칸트의 비판 안에 아직도 잠들어 있는 독단은 무엇인가? [본문으로]
- M. Contat et M. Rybalka, Les écrits de Sartre, 1970, p. 564. [본문으로]
- 블랑쇼, 『날의 광기』La folie du jour, Gallimard, p. 13. [본문으로]
- 레비나스, 『블랑쇼에 대하여』, p. 63. [본문으로]
- 위의 책, p. 51. [본문으로]
- 위의 책, p. 7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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