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는 의식의 거주자이다
사르트르가 『자아의 초월성』에서 “자아는 의식의
주인이 아니다”(77)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의식은 자아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아가 의식의 “거주자”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사르트르는 너무 서둘러서 주인이 아닌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일 수 없기에 그는 자아를 의식 밖으로 서둘러서 쫓아낸다. 의식으로부터 추방된 자아는 의식 안의 거주자이기를
그치고, 저 세계 안에 나무처럼, 책상처럼 하나의 존재자로, 세계 안의 타인처럼 대상이라고 말한다. 자아를 추방하면서 사르트르가
저지른 실수는 무엇인가?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면 그가 몰랐던 것은 무엇인가? 몰랐던 것도 아니라면, 그가 붙잡혀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아를 의식 밖으로 서둘러서 추방하게 만들었는가? 의식 안에 자아가 거주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아가
의식의 주인, 소유자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주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무한이 내 안에 거주하는 아주 불편한 거주 방식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이 불편한 동거 안에서 자아는 더 이상 자기의 주인이 아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듯이,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니다. 자아는 존재의 주름 안에, 존재의 구멍에 절대적인 소여로서, 구성된 것이 아닌, 소여라는 말이 지시하듯이 선물처럼 주어진
것으로 존재 안에 거주할 수도 있다. 자아는 현상학적 환원에서
살아남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현상학적인 잔여로, 그 유일한 결과이다. ‘살아남은’ 이라는 말이 알려오듯이 자아는
저항의 산물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자아는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특권이
주인의 특권이 아니라, 다만 거기로부터 비로소 다른 존재가 도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특권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기와 나는 마치
자기의 자기에의 내밀성처럼 자기 안에 심층, 주름을 형성할 수도 있다. 레비나스가 “자기 안으로의 후퇴(repli dans un
plein)”1)(EE, 118)인 자리잡기,
혹은 실체화는 바로 자기 안에 은신처, 주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는 자기에 대해서 투명하기 보다는 불투명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사르트르가 혐오했던 것은 - 반대로 그를 사로잡았던 의식의
투명성, 명석성 - 이런 종류의 이중성, 이런 종류의 불투명성, 그림자일 것이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초월성 안에서 다 길어지는가? 다시 물으면, 인간의 의미는 세계 안에서, 세계의 진리 안에서 모두 고갈되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자아의 초월성이 아닌, 자아의 내재성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왜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 존재자이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거주의 방식이 주체의 주체성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믿는 것과 달리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라면,
자아는 어떤 방식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주체는 의식의 기원도 아니며, 의식의 토대도
아니다. 그것은 의식 안에서 순수한 나타남의 양태로 존재할 뿐이다.
의식의 거주자, 이것은 누군가가 무엇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존재와 다른 한 존재가 그것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거주자는 다른 존재 안에서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며, 의식 안에 존재하면서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안에 타자라는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가 혐오했던 것은 이런 종류의 불투명성, 이중성, 겹침, 애매성이다. 사르트르에게는 의식이란 지향성으로 무엇에 대한 존재, 초월성 그 자체이다.
거주자, 그것은 이 의식과 ‘다른 것’이라면, 초월성의 질서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즉 내재적인 질서를 가진다. 이 거주자는
내재적이다. 사르트르에게 자아와 의식은 너무 쉽게 분리되어 되돌아 올 수 없이 분리된다.
의식 내에 모든 체험, 질료성, 무게를 제거한
사르트르의 의식은 더 이상 엄격한 의미에서의 현상학적인 의식이 아니다. 사실 관념론에 대한 그의 혐오는 그를 너무 멀리, 아니
차라리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의 순수주의는 제거할 수 없는, 순수화할 수 없는 존재의 잔여, 존재의 무게,
존재의 가상, 존재의 허약함이 없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향유라고 부르는 것,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할 수 없는 이
자아의 무게를 그는 단번에 내친다. 이 존재의 애매성, 사르트르의 의식의 투명성은 애매성, 허약성, 기만적 의식을 감당하기에
너무 영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의 애매성 안에 주체의 비밀이, 레비나스의 자기정립(hypostase)의 비밀이, 근본적인 자기에의 불투명성이, 제거할 수 없는 가상이, 그런데 무죄한 가상이 자리한다. 주체는 하나의 본성, 사르트르가 자아의 이름으로 단번에 제거하고자 한 것을 지닌다. 자아는 사르트르가 생각하듯이 세계 내의 한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체험 안에, 주체성 안에 무엇이라고 동일화할 수 없는 성질지울 수 없는 것으로 의식 안에 거주한다. 이 거주자는 사르트르가 생각하듯이 성의 영주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존재의 나타남의 한 부분으로, 존재자의 현시 안에서 고갈되지 않는 그런 나타남의 한 부분으로, 존재의 운동 그 자체 안에 도래하는 것이다. 마치 그 운동의 증인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하나의 단단한 씨앗처럼 감쳐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거주자로서 ‘나’인 바의 것이 아니다. 나는 지향되거나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소여이다. 레비나스가 “자기 집(chez soi)”이라고 부르듯이, 모든 의식은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제한되어 있다. 이 한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 양태와 다른 것을 의식 안에서 발견한다. 사르트르가 몰랐던 것, 아닌 저항했던 것은 이 자기에서 하나의 ‘내용’으로서, 질료로서 자기에의 도래, 다시 말해 의식 안에 ‘무엇인가’가, 소유가 아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자기 집’의 존재는 사르트르의 투명한, 텅 빈 대자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몰랐던 것은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고 했을 때, 이 의식 존재가 단지 존재(être)가 아닌 소유(avoir)라는 사실이다. 이 소유는 즉자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원한다면, 유사 즉자존재로 의식의 대상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의식이 자신 안에 한 거주자를 가진다면, 그것은 의식이 이 거주자를 의식의 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의식을 가지는 운동 안에서 짊어지는 그런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의식 안에서 의식에 대해서 의식의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가짐’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의식한다고 했을 때, 의식된 것, 그것의 ‘가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공포를 느낀 것, 그것은 바로 이 ‘가짐’ 앞에서, 무의식에 대한, 수동성에 대한, 자유를 상처 내는 것에 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우리는 마치 여행자가 자신의 짐을 챙겨야 하는 것처럼, 그 짐에 의해서 버거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의해서 무거워지고 버거워지는 그런 존재”라고 말한다(EE, 38). 사르트르가 처음부터 거부한 것은 후설의 현상학의 열어놓은 지금까지의 서양의 의식의 자유의 철학사와 다른 길, 수동성의 길이다.
사르트르가 항상 사로잡혀 있었던 것, 마치 유령에 사로잡히듯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가 “신이 되고자
하는 쓸데없는 수난”이라고 말하는 이 욕망 - 푸코가 사르트르를 고전적인 의미의 철학함의 스타일에 아직도 붙잡혀 있었던 “최후의
철학자”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은 무인 의식이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욕망은 무인 의식 존재의 사실성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존재해야 하는 것과 구분된다. 그의 욕망에는 어떤 책임도 없다. 창조의 중심에 놓인 무인 의식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는 것과 자기의 존재에의 책임은 같은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대답해야 하는 것과 대상에 대답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의식의 자유 자체에 대답해야하는 것은 의식의 자유가 행한 결과에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후자는 절대로
자신의 자유, 자신의 존재의 권리를 문제 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의 윤리의 부재가 자리한다.
의식의 거주자, 익명적인 의식이 아닌 나의 의식은 초월성으로 정의되는 의식과 다른 것이다. 이 나의 의식은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내용을 가진 사물처럼 존재하는 나의 의식은 의식의 같음의 잔여이며, 이 같음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이면서 둘인 이 의식 내의 주체의 균열은 나의 의식의 나와 자기의 균열과 다르지 않다. 이 균열과 더불어서 나타남이, 자기 안에서 자기에의 나타남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나타남은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에 자기의 자기에 대한 동일성이 아닌 차이가 생겨난다. 레비나스가 헤겔의 자기의 자기에의 동등성이 보지 못한 것은 이 자기의 자기에의 균열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가 헤겔의 비판에서 옳았다고 할지라도, 비판 후에 그가 자아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길을 잃는다.
“그런데 이
잉여의 ‘나’는 해롭기조차 하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의식에서 의식을 떼어낼 것이다. 그것은 의식을 나눌 것이며,
그것은 불투명한 칼날처럼 매 의식마다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것이다.”(23) 사르트르가 너무 멀리, 아니 진정으로 멀리 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불투명성, 그가 본 이 불투명성, 매번 의식의 활동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이 자아의 불편함을 더
멀리까지 생각했어야 했다. 바로 여기에 자기의 비밀이, 주체성의 의미가, 자아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봤어야 했다. 의식의
투명성에 상처를 내기 때문에 해로운 이 자아를 저 밖의 세계로 내 던지기 전에 이 자아의 해로움을 나의 내밀성, '나의 것'으로
의식의 저 밖의 대상일 수 없는, 다시 말해 의식의 존재에 의해서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사르트르가 환원을
수행했을 때, 그는 진정으로 남김없이 모두 의식 밖으로 내 몬다. 남김없이. 그런데 이 남김없이에 저항하는 실체를 그는 보지 못했다. 이 저항이 다름 아닌 '자기'라는 사실도 보지 못했다. 이 자아가 자기의 지울 수 없는 제거할 수
없는 자기의 흔적, 자기의 잔여라는 것을 그는 보기를 거부했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실수가, 그의 길 잃음이, 그의 비극이, 그의
거짓이, 그의 기만이 자리한다.
존재론은 근본적인가? 그 존재론의 의식은 절대적인가? 이제 레비나스와 더불어
사르트르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한다. 그의 존재론,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의 요구는 현상의 줌과 주어짐을 모른다. 이 현상의 수여의
근저 위에 존재는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구성하는 의식은 이 줌 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원초적인,
최초의 수동성이 우선한다. 이 주어짐은 제거할 수도, 환원되어질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특권적이 아니라면, 원초적, 본래적이다.
“만일
우리가 의식 안에 이 불투명성을 도입한다면, ...의식은 더 이상 자발적이기를 그칠 것이다.”(25) 사르트르의 인간, 이
자발성, 이 특권적인, 우선적인 자발성, 다만 자발성, 이것에 우리는 인간의 정의를 주어야 하는가? 의식은 자발적인가? 다시
묻자. 이런 권리를 누가 의식에게 주었는가? 의식은 본래적으로 원천적으로 수동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자발성과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이 자발성 안에 다른 것이, 의식이 떼어낼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의식을 비실체적인 절대로 만드는 이 의식의 자발성을 포기하게 하는 이 불투명성”(같은 곳) 이, 이 실체성이 바로
현상학적인 주체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존재론의 편견, 너무 한정된 존재론의 규정을 버림으로써만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순수한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히 절대이다. 그래서 의식은 존재와 나타남이 하나라는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의 현상”(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의 형이상학이 정착한다. 그가 후설의 자아론을
형이상학이라고, 관념론이라고 길게 오래 비판하면서 그가 시작한 자아에 대한 비판은 반대로 그 자신이 명백한 형이상학으로 떨어진다.
의식은 절대가 아니다. 의식이 자기의 자기에 대한 관계인 한에서 의식은 절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의 다른 자기와의 관계는 순수한 자기의 자기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존재와 나타남은 동일하지 않다. 존재는 나타남 이상이거나 이하이다. 존재는 나타남 이후에 오는 것으로 이 나타남과의 관계에서부터 오는 규정일 뿐이며, 이 나타남의 부분일 뿐이다. 주체, 존재자의 존재의 지평 밖에서 의미의 지평인 주체성은 이 존재에의 나타남의 일치가 어긋나는 곳, 그 나타남의 나머지이다. 주체, 그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의식의 놀이 밖에, 그 놀이 이전에, 의식이 지향하는 존재자들과의 관계 밖에 놓인다. 다시 말해 지향성으로부터 길어지지 않는, 지향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다른 진리의 장소, 말하기의 장소, 의식의 지향 밖에, 다시 말해 의식이 스스로 줄 수 있는 것 밖에 놓인다. 다시 한 번, 나타남은 존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남김없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없듯이 나타남은 남김없이 자기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상학적 진실이다. 나타남 그 자체에서 유지되는 존재와 다르게, 칸트의 가르침을 따라서 존재의 진지함을 거부하기, 나타남에 존재의 뿌리를 놓기, 여기에 후설의,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진실이 자리한다.
“따라서 의식은 무거워지고, ...그것은 무겁고 자기의 무게에 짓눌린다.”(26)
사르트르가 벗어나고자 하는 이 의식의 무게, 짓눌림, 자신의 고유한 무게, 내가 짊어져야 하는 자신의 고유한 무게, 이것이 주체가
아닌가? 이것이 주체이다. 나는 항상 내가 덜어낼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이 무게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이다. 현재가 아닌
항상 내 안에 현전하는 이 무게, 후설이 1913년 『이념 I』에서 자아를 다시 도입했을 때, 그에게 쏟아질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아를 다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제거할 수 없는 이 나의 무게, 제거할 수 없기에
저항하는, 그래서 살아남은 이 자아, 이 잔여를 말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의 솔직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놀랍게도 이
자아를 다시 살려내는 레비나스의 후설 읽기는 이전의 잘못 읽히고 아니, 후설의 이 전향을 이해할 수 없었던 무수한 비판에서
현상학을 구해낸다. 레비나스는 이 무게, 이 짐을 나의 신체라고 부른다. 이 나의 신체는 존재의 경제 밖에 존재한다. 레비나스가
사적인 것, 혹은 감성의 육화(incarnation)라고,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나의 신체는 사르트르가 말하듯 세계 내의
대상으로서의 여러 다른 신체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내가 ‘나’는 나무를 자른다고 말할 때, 나는
대상으로서의 신체, 지금 나무를 자르고 있는 중인 ‘신체’를 보고 느낀다.”(72) 사르트르에게 신체는 자아처럼 세계의 대상들
중의 하나, 세계의 존재자이다. “신체는 “나”라는 개념의 환상으로 채워진 것”(같은 곳)으로 어떤 신비도, 어떤 초월성도, 어떤
원초적인 성질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성의 끈적임을 혐오했던 그였기에 신체의 거추장스러움은 의식의 투명성 앞에 어떤
중요성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르트르의 의식은 순수한 의식으로 그 안에 불투명한 나의 육체, 나의 “살”의 간섭을
거부한다. 그런데 신체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의 자리이며, 의식의 자리잡기(localisation)에 의한 의식의, 감성의 육화이다.
사르트르가
“자아는 의식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그런데 그가 몰랐던 것은 모든 자기화 이전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소유로서의 사적인 것의 의미, 나의 것이면서 낯선 자아의 의미, 의식의 거주자인 자아를 보지 못했다.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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