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얼굴, 전쟁과 평화

aurorepark 2013. 10. 7. 23:20

"타자의 극도의 불확실성으로서 얼굴. 타자의 불확실성에서 깨어남으로서 평화." 

"Visage comme l'extrême précarité de l'autre. La paix comme éveil à la précarité de l'autre." (레비나스, <평화와 근접성>(1984) in Altérité et transcendance, p. 147)


레비나스는 아주 짧은 이 문장에서 그의 '얼굴'에 대해서, 얼굴이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에서 그의 철학을 아주 짧게 요약하고 있다. 이 문장은 또한 버틀러가 그녀의 논문 "불확실한 삶"에서 레비나스의 얼굴로부터 그의 '유대적인 비폭력적인 윤리'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녀의 레비나스 읽기는 정확(juste)하다. 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읽기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질을 꽤 뚫고 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레비나스의 윤리를 현실적으로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가능성을 탐구한다. 바로 이 지점, 레비나스에게 부재하는 이 지점에서 그녀의 읽기는 '생산적인' 읽기의 한 모범으로 나타난다.


우선 'précarité', 그리고 이 단어의 형용사형 'précaire'는 아주 일상적인 말로(최소한 프랑스어의 일상어에서) 그 어원에서 보면 "기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허락이나,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는 관용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의 지속, 미래는 보증되지 않고 매 순간 문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아침에 노량진 시장 앞에서 하루의 일을 찾는 일용직 노동자들, 공장의 임시직 노동자들, 언제든지 해직될 수 있는 월급쟁이들, 직장이 없는 대학 졸업자들, 대학의 강사들, 불법이민자들...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이 모든 종류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들을 지시한다. 누군가가 비록 정규직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그녀/그는 언제든지 병에 걸릴 수 있고 일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기 그지 없는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우리는 복지사회/복지국가라고 말한다. 비록 그녀/그가 병에 걸려 일을 잃어도 그의 삶은 최소한 보장되는 사회를 말한다. 모든 종류의 보험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불확실성이다. 맑스의 프로레타리아트라는 노동자 계급으로 다 포함할 수 없는 이런 삶들 모두를 지시하기 위해 '프레카리아트'(프레카리오+프롤레카리아트)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불확실한 삶에 'extrême', '극단의', '최상의'라는 형용어가 붙을 때, 그런 삶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보험으로도, 사회보장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삶의 근본적인 불확실성, 다시 말해 '죽음의 가능성', 그런데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레비나스의 다른 용어로, 이 말은 삶의 '허약성', 혹은 '상처받을 수 있음', 혹은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 '유한성'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과 대비되는 말로 아마도 '평범한 삶la vie ordinaire'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ordinaire', 말 그대로 "질서를 따른 삶", 반복적으로 실행되는 안정된 삶을 지시한다. 그런데 평범한 그녀/그의 삶은 언제든지 상처받을 수 있는 허약함에 노출되어있지 않는가? 그녀/그의 극단적인 삶의 허약함, 근본적인 상처받을 수 있음, 최상의 불확실성은 그녀/그의 죽음 앞에 놓일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가능성은 객관적인 한 가능성, 나와 상관없는 제 삼자의 일이 아니라, 그것은 나와 연루된 '나의 일'이다. 다시 말해 그 죽음의 가능성은 내가 그녀/ 그를 살인할 수도 있는 한 가능성을 지시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레비나스의 얼굴이 가진 '윤리적인 원초적 장면scène'을 구성한다.     


두 문장은 두 사건을 지시한다. 하나는 타인의 얼굴의 극단적인 허약성, 다시 말해 타인의 죽음에의 노출, 죽음의 가능성을,  다른 하나는 그 타자의 허약함에 의해 깨어나는 '나'에 의해 도래하는 평화를 말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위의 두 문장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설명해 준다. 


"불확실성과 무방비 상태에서 드러나는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살인의 충동인 동시에 "절대로 살해하지 말라"는 평화의 요청이다."(147)


그런데 타자의 허약함, 타자의 죽음에의 노출은 왜 나에게 동시에 살인의 충동인 동시에 절대로 살해하지 말하는 평화의 요청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얼굴은 동시에 나에게 살인을 충동질하면서 동시에 이 살인을 금지하는가? 레비나스가 놓는 이 원초적인 상황은  전쟁과 평화의 원초적인 상황이다. 이 두 상황 사이에 얼굴이, 다시 말해 죽음 앞에 타인이 자리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표면상 전쟁이 앞서고 평화가 한 결과처럼 도래하는 듯이 보이지만, 레비나스에게 "전쟁은 평화를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전쟁은 평화, 즉 "타인의 앞선 현전, 타인에 대한 비-알레르기적 현전"(TI, 218)을 전제한다(반면 존재론은 레비나스에서 알레르기학으로 기술된다). <전체성과 무한>을 전쟁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하듯이, 레비나스에게 전쟁의 상황은 그의 철학의 한 출발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가 말하는 최소한의 사회, 나와 타인이라는 대면의 관계 위에 세워진다. 최소한 홀로 존재함에 윤릭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맥한 사실로부터 말이다. 다시 말해 나와 신의 관계, 혹은 유한한 나와 무한의 관계와 같은 것은 타인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 철학이 다른 철학과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대면의 관계는 이를 중재할 제 삼자가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끔찍한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면의 관계가 아닌 여럿의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다시 말해 제 삼자가 존재하는 관계 안에, 보통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다수의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기초, 다시 말해 어떻게 한 단독자는, 더 정확히 나는 "처음부터 타인에 바쳐져 있는가"ㅡ이것은 레비나스 철학의 주제이다. 다시 말해 그의 철학은 이 사실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ㅡ를, 어떻게 나는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가지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럿의 관계로부터 원초적인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여럿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그보다 앞선 상황으로, '세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체성과 무한>의 서론에서도 말하듯이, 이 책은 "전체성의 경험으로부터 이 전체성이 부서지는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 조건은 전체성 그 자체를 조건 짓는다"(TI, 9)라고 말할 때, 이 조건은 우리가 위에서 평화가 전쟁을 앞선다고 말할 때, 평화를 지시한다. 이때 평화는 "타인의 얼굴 안에 초월성", 즉 "무한의 이념"(TI, 10)을 엿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레비나스에게 전쟁은 절대로 모든 것을 앞선 말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라는 말은, "존재가 전쟁인" 한에서 우리의 삶에 최초의 말이 아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의 출발이며 끝인 존재론에 대한 비판, 즉 존재 너머의 노력은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절대로 존재가 모든 것의 처음에 놓여서는 안된다는 믿음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적 노력은 이 상황, 전쟁에 내재하는, 그에 앞선 평화를, 존재에 내재하는, 그에 앞선 존재 너머를, 이 긴장을 기술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평화의 이념은 서양철학의 모든 종류의 평화의 이념과 구분된다. 물론 이와 연관해서 여기서 말하는 전쟁의 개념도 인간의 자연적 상태로기술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태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적으로 다만 "전쟁은 순수한 존재의 순수한 경험으로 산출된다"는 것만을 상기하자(TI, 5). 여기서 "힘겨운 실재(dure réalité)=존재=전쟁은 동의어처럼 울린다".



그럼 이런 순수한 존재의 경험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시 처음의 인용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자. 위의 문장을 보면 계사 être를 comme가 대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방식은 그의 후기로 갈수록 더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종의 말하는 방식'이다. 'comme'는 ...로서, ...처럼으로, 우리는 이것을 'comme si(als ob)'로, '마치...인 것처럼'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als ob/comme si'는 레비나스가 한 주(De la coonscience à la veille, in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 51)에서 말하듯, 불확실성도 또는 그럴듯함을 지시하는 것도, 또 경험주의적 신중함에도 불구하고 후설에서처럼 객관적인 것의 이상적인 동일성, 혹은 존재 혹은 현전의 한목소리univoque와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comme si'는 여기서 "비-현상, 혹은 "비-표상적인 것의 수수께끼, 혹은 다의성équivoque"을 지시하며, "해독할 수 없는 흔적, '일 이 아'가 내는 마모의 소리의 비-의미non-sens", 또 "무한의 이념 안에서 이하를 깨우는 이상le plus-éveillant-un-moins"을 증언한다. 또 이것은 다른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면, 서양 철학의 후회와 가책을 모르는 의식une bonne conscience 이면에 놓인 또 다른 의식, 항상 자신을 문제 삼는, 자기가 저지른 죄도 없이 가책에 사로 잡히는 une mauvaise conscience를 지시하기도 한다. 이 두 종류의 의식은 철학사 안에서 헤겔적 의식과 니체적 의식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헤겔적 사유를 가진 사람들이 니체적 사유에 대한 깊은 반감을 드러내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두 의식은 서로 대립된 의식인가? 그것은 반대로 마치 등을 맞댄 쌍둥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레비나스의 사유는 이 두 종류의 의식의 떼어낼 수 없음에, 이 둘 사이의 갈등에, 그렇다고 둘이 등가는 아닌, 다시 말해 결국 하나가 다른 하나의 '조건'으로, 앞선 것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가 항상 말하듯, 드러난 것을 조건짓는 이전의 상태, 연출mise en scène의 상황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자기로의 돌아감'은 후설의 환원 근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의식 안에 갈등하는 두 의식의 이러한 모습은 레비나스가 같은 글("평화와 근접성")에서 인용하는 창세기 32장 8절에서 야곱이 형 에사오가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시에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에서도 드러난다. 이 두 감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랍니 하시Rachi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다른 한편 살인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 두 번째 감정에서, 내가 저지를 수도 있는 살인에 대한 '불안' 안에서 레비나스는 위기에 처한 유럽의 윤리적 계기를 발견한다.


"우리는 평화는 진리의 요청보다 더 긴급한 요청에, 다시 말해 진리의 요청과 구분되는 요청에 대답해야 하지 않는지 물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진리의 이상 그 자체는 이미 지식의 이상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다만 진리의 요청에서 열리는 평화의 이념에 의해 이해해야하지 않는지 물을 수 있다. 우리는 또 역사를 지배하는 지식과 정치학은 이미 그것들이 평화의 요구에 대답할 때, 또 이 요구에 의해서 인도될 때, 자신의 자리를 가지지 않는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평화는 더 이상 실체성 안에 인간적 동일성의 확인으로, 방해받지 않는 자유liberté faite de tranquillité로, 자기 자신 안에 자리를 발견하는 존재자의 휴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외적인 모든 것은 거부하고 부정하는 자기집의 부르주아지의 평화가 아니다. 더 이상 평화는 모든 타자성이 방해하는 일자의 단일성의 이상과 일치하는 평화가 아니다."(142-143)


위에 진술에서 평화의 이념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와 휴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지식과 정치학에 의해서 정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다'를 '하나'로 환원하는 플라톤 혹은 신플라톤 주의의 일자의 이념에 일치하는 것으로 전체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단단한 지반 위에 각자 자신의 자리를 가지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 자기집의 평화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평화의 이념 안에서는 외국인이, 타자가 자리할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반대로 타자의 타자성에 의해 불-안(in-quiétude)한 의식, 조용하지 않은, 방해받는 의식만이, 그로부터 깨어나는 의식 안에 평화의 이념이 자리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표현하는 다른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in-quiétude'이다. quiétude는 적요를 지시하는 방해받지 않는 'tranquilité'를 말한다. 거기에 부정 접두사 in이 붙어, 이 말은 불-안, 염려이다. 레비나스의 유럽의 평화의 이념, 결국 유럽 철학에 반해서 말하는 평화는 이제 어떤 공통된 장르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성과의 관계로서 평화를 말한다. 이 조용할 수 없음, 끊없이 불-안하고, 끊없이 깨어나는 휴식할 수 없음 안에 이제 우리는 평화의 이념을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순적으로, 혹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에게 평화의 이념은 자기 안의 무수한 전쟁의 가능성, 조용할 수 없는 불-안과 방해 안에 자리한다. 내 안에 불-안과 방해가 없는 한에서 타자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깨어나는 평화의 이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깨어남은 항상 자신 안에 균열을 만들고, 자기집의 방해받지 않음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보듯이, 그 평화는 나의집, 우리집, 우리끼리의 평화가 될 것이다. 우리끼리, 우리집의 평화는 동화와 배제의 논리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