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 번 읽은 카프카의 몇 줄 안 되는 '잠언' 혹은 '우화'parabole/Gleichnis, 앞서 소개한 3개의 번역과 또 조금 다른 4번 째의 번역을 다음과 같다. 스테판 모제스Stéphane Mosès(그의 책, Exégèse d'une légende. Lecture de Kafka에서)의 번역이다.
Mon grand-père avait coutume de dire: "La vie est étonnement brève. A présent, dans mon souvenir, elle se resserre à tel point sur elle-même que je comprend à peine, par exemple, qu'un jeune homme puisse se décider à partir à cheval pour le prochain village sans craindre que - toute idée d'incident malheureux écartée - la durée d'une vie ordinaire, se déroulant heureusement, ne suffise pas, de bien loin, même pour une telle chevauchée."
할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삶은 놀랄만큼 아주 짧다. 현재, 내 기억 안에, 삶은 마치 한 점처럼 자기 자신 위에 수축되기 때문에, 어떤 한 젊은이가 이웃 마을까지 아무런 염려 없이ㅡ일상적인 불행한 사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ㅡ, 행복하게 흘러가는 일상적인 삶의 지속은 이 행보를 위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니 차라리 아주 멀다는 사실에, 아무런 염려 없이, 감히 말로 거기까지 가지로 작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제 나는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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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는 시간과 삶에 대한 카프카의 성찰을 아주 간략하게 표현한다. 그 간략함에 나는 놀란다. 그 놀람은 물론 카프카에 대한 경외일 것이다. 그 놀람이 이 짧은 몇 줄에 많은 이들이 그 보다 10배 20배 더 긴 글을 쓰게 했을 것이다.
위의 글을 더 짧게 요약하면 '삶의 전 시간을 다들여도, 소위 평생을 다 바쳐도 가장 가까운 이웃 마을까지 가기에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삶은 짧다'는 말일 것이다. 이 역설은 거꾸로 말하면, '가장 가까운 마을도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에는 너무 멀다'는 말일 것이다. 삶이 덧없기가 그지없어서, 가까운 이웃 마을도 거기에 이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공간적으로 그 거리가 무한히 멀다는 말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공간적인 시간의 개념에서 우리는 한 지점과 다른 지점을 분리하는 이 무한의 거리, 이 측정할 수 없는 이 무한의 거리 때문에 누구도 이 거리를 건널 수 없는 거리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철학사 안에서 아주 일찍 말해진 것이기도 하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역설에서 또 아실Achille과 거북이의 경주에서 말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소한 이 글을 쓸 당시의 카프카를 사로잡았던 어떤 생각은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수학적 무한과 존재의 부동에 의존해서 읽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이러한 역설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주 가까이 우리 시대에 레비나스가 전개하는 멈lointain과 가까움prochain의 역설의 논리도ㅡ하이데거에서도 말해지는, 더 앞서서 세익스피어에서도 말해지는ㅡ, 또 블랑쇼가 문학의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문학의 공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무한히 다가가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치지 않는, 어떤 한 끝terme에, 어떤 완성terme에 이를 수 없는interminable,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작품Oeuvre의 작업oeuvrer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반복은 어떤 종류의 반복인지 물론 물어야 할 것이다.
공간적인 유비를 통해 드러나는 이런 시간의 이해는 이 거리를 느끼는 주관적인 체험으로부터 생각할 때 가능한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성』은 위와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그의 직업이 측량사, 더 정확히 기하학자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학자 데카르트처럼, 기하학자인 그는 이 성 아래 마을에 머물면서 성에 접근하려고 무수한 노력을 하지만, 그는 그 성에 절대로 이르지 못한다. 도달해야 할 '목적', 혹은 목적지는 매번 그의 시도가 일어날 때마다 가까워지기보다 더 멀어지기조차ㅡ레비나스가 분석하는 무한의 욕망의 구조ㅡ한다. 또 그 욕망이 줄어들기보다 더 배가된다. 매번의 시도에서 이 거리를 무한히 멀게하는 것은, 카프카에서, 무엇인가? 매번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체 안에서 무엇이 여기에 도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최소한 그의 글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 '주저'이다. 탄생 앞에서 주저하는 나, 목적이 있으나 거기에 이를 방법이 없는 이 주저는 매 시도에 동반된다. 이 주저는 그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바틀비의 정식-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ㅡ도 이 주저와 다르지 않을 것일 것이다. 여기에 블랑쇼는 재난dés-astre, 다시 말해 길을 인도하던 별들이 길을 읽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매번 목적에 이르고자 하는 주체의 매 시도 안에서 주체가 매번 느끼는 체험된 시간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주체는ㅡ그 주체는 이 글에서 할아버지로 나타난다ㅡ젊은이를 불러내서ㅡ이 젊은이, 특히 '기사',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성>의 주인공인 '기하학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ㅡ, 삶은 우리가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에 이를 수 없을 정도로 짧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여행자ㅡ삶은 보통 길에,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여행자로 표현되지 않는가?ㅡ는 결국 제자리에 머문다ㅡ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삶의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그렇게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하는 단순한 행위가 실행되기까지는 아주 단순한 행위에 비해서 사실 때때로 복잡하기 그지 없다ㅡ카프카가 약혼자 앞에서 주저했던 그것은 무엇인가? 의심 없이, 아무 주저 없이 한 발에 이어서 다른 발을 내딛기를 결심한다는 것은ㅡ우리는 보통 그렇게 한다, 그 앞에서 주저하면서도 나아간다ㅡ'누군가'에게는 너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934년 벤야민은 카프카 서거 10주년을 기리면서, 한 유대인 잡지에 카프카에 대한 글ㅡ<카프카, 그의 서거 10주년을 기리며>(불어본은 그의 전집 2권 말미에 자리한다)을 실른다.
벤야민을 이 글을 오랫동안, 기록에 의하면 1928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그가 쓴 노트들이 이 글과 따로 남아있다. 한 노트에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삶의 진정한 척도는 기억이다. 과거로 돌아서서tourné, 기억은 빛의 속도로 삶의 길을 거꾸로à rebours 다시 만든다. 또 책의 몇 페이지를 거꾸로 훓어보기 위해 필요한 아주 짧은 그 시간 동안, 기억은 이웃 마을에서 그 기사가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삶이 글écriture로 전환되던 시대의 사람들은, 조상들처럼les Anciens, 이 글을 거꾸로à l'envers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만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ㅡ현재를 회피하면서만ㅡ그들은 삶을 이해하는 데에 이른다." (그의 준비 노트에서)
그의 많은 글들이 읽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이 글도 그렇게 한 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위에 벤야민에 글에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들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그의 글쓰기의 모티브는 달리는, 말 탄 기사로 표상되는 '경주cours'ㅡ시간의 흐름, 삶의 흐름, 삶의 경주ㅡ이다. 이 이미지는 그의 역사의 천사에서(1940)에서 다시 발견할 것이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려는 역사의 천사를 발 밑에서 끌어 당기는 과거, 기억의 천사는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벤야민의 카프카 읽기는 그의 용어를 따라가면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함께 간다. 하나는 그가 의미(작용)의 논리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의 논리이다. 전자에 대해 벤야민은 우리에게 카프카의 텍스트는 그것들에 외적인 의미들로 보내진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이것들은 잠언들paraboles이고, 이것들은 가르침과 지혜를 전달한다. 다른 한편, 텍스트는 이미지들의 망으로 형성된다. 이 이미지들은 벤야민이 종종 '행위들' 혹은 '상징들'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것들은 전자와 달리 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한다. 사유의 체계나, 개념에 환원불가능한 이것들은 벤야민에 의하면 카프카의 선지자적visionnaire, 혹은 신비적, 더 나아가 계시적, 벤야민의 입장에서는 '구원적 관점'을 지시한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이데올로기적인 블레이트의 해석에 반한다.
벤야민은 "가장 가까운 마을"을 읽으면서 위에서 말한 대립하는 두 논리에 따라서 읽는다. 우선 '파라볼'을 중심으로, 벤야민은 할아버지의 경험을 노인의 단순한 축척된 경험의 증언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척도로서 기억"으로 읽는다. 벤야민이 여기서 제기하는 질문은 "어떻게, 어떤 종류의 경험을 거쳐서 우리는 삶을 그것의 전체성에서, 다시 말해 그것의 전체 지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가?" 카프카는 그의 글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두 예ㅡ두 방식ㅡ를 제시한다. 하나는 말을 탄 젊은이이고 다른 하나는 노인이다. 젊은이의 경우, 시간의 지속은 현재의 순간들의 합에 의해서 측정된다고 믿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해지는 합산의 시간. 그런데 이런 유형의 경험의 경우, 매 순간에, 우리는 그 경주의 도달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뒤로 물러선다. 매번 그러한 경험은 우리를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어떤 끝에도 이르지 못하는 시작점에 놓는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미래로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선 노인, 할아버지의 경우, 과거, 가장 오래된 과거는, 프루스트에서처럼, 현재의 경험과 혼동된다. 과거와 현재의 일치 안에서 시간은 사라진다. 말하자면 시간은 그 유명한 유일한 한 순간un instant uniqueㅡ스테판 모제스가 un tel point이라고 옮기듯이ㅡ에 모인다. "과거로 돌아서서tourné vers, 기억은 빛의 속도로 삶의 길을 거꾸로à rebours 다시 만든다."
그의 "역사철학의 테제"에서 다시 발견되는 대립되는 두 시간성에 대한 두 모티브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는 앞서서 젊은이에 의해 상징된 미래로 향한 무한한 진보의 이념으로, 이 생각은 우리를 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 제자리에로, 끝없는 반복으로 인도한다. 다른 하나는 벤야민이 '메시아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현재와 과거와 함께 참여하는 한 국면과 관계한다. 죽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살아있는 현재로 만드는, 자고 있는 것을 깨어서 작동하게 하는 현실화actualisation의 과정 혹은 재가동réactualisation을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경험"이라고 부른다. 실재의 삶의 시간이 우리의 목적에, 그것이 아주 가까운 이웃마을일지라고 할지라고, 도달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다면, 내적인 경험의 순간성은 우리가 거의 동시적으로 과거를 되돌이키는 것과 미래를 '예시anticipation'ㅡ그의 메시아적 시간론은 로젠쯔바이크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ㅡ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기억의 순간으로서 예시를 체험한다: "책의 몇 페이지를 거꾸로 훓어보기 위해서도 아주 짧은 그 시간 동안, 기억은 이웃 마을에서 그가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벤야민의 카프카 읽기의 두 번째 부분은 이미지의 논리를 따라서 전개된다. 이미지라는 말 아래에서 벤야민이 이해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야기의 상황, 인물의 유형, 그들의 반복적인 행위, 혹은 '기호' 등등의 단독적인 사실들, 요약하면 '시적인 요소'들을 지시한다.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벤야민이 카프카의 글들에서 끌어내는 반복적인 이미지는 '길'이다. 그리고 말과 말탄 젊은이로 드러나는 '말 달리는 들판'의 이미지, 그 외에 '거꾸로 가는 여행'의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쓰기écriture'ㅡ그는 여기서 대문자Ecriture성서라고 적지 않고 소문자로 적는다. 소문자로 쓰면서 벤야민은 두 가지를 소문자와 대문자를 모두 불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ㅡ와 '읽기와 연구'의 이미지들이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카프카에게 그리고 벤야민에게 모두 '삶의 은유들'이다. 벤야민은 위에서 우리가 읽은 카프가의 "가장 가까운 마을"에 대한 노트에서 "기억"을 말을 타고 달리는(그런데 거꾸로, 과거로 달리는) 들판에 비유한다. (물론 카프카의 글에서 다만 '말을 타고 가로지는 것chevaucher'만을 언급하고 '들판'은 언급하되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벤야민이 인용하듯이 카프카의 "아카데미를 위한 보고"에서 그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말달리기galoper"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말달리는 들판, 혹은 아주 간단히 경마장은 그에게 삶의 하나의 은유로 드러난다. 이 곳은 경주가 일어나는 곳이고, 시련이 있는 곳이다. 이 경주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 도달점,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보자. 여기서 그 목적에 도달하는 사람은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이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시간의 변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그가 드는 이미지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이다. 말탄 기사의 이미지는 카프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그 여럿 중의 하나를 들자면 "시골 의사"에도 말탄 기사가 나온다. 이 이미지는 그에게 항상 같은 이미지를 불러낸다. 어딘가에, 아주 먼, 그 목적지가 아주 먼 여행의 이미지이다. 이 여행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날 수 있다. 레비나스와 앙리, 그리고 데리다, 앙리가 선택한 길은 카프카처럼, 벤야민처럼 뒤로 물러서는 여행을 선택한다.
벤야민은 그의 글에서 이 두 방향을 근본적으로 대립시킨다. 일전에 읽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그의 짧은 글과 비슷한 뉴앙스를 던지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Malheureux le cavalier cramponné à sa crinière parce que c'est l'avenir qu'il s'est fixé pour but. Bienheureux au contraire le cavalier qui galope bride abattue en direction du passé, en un voyage libre et joyeux, et qui n'est plus un fadeau pour son coursier.
갈기에 매달린 기사는 불행하다. 왜냐하면 목적을 위해 그가 고정된 곳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로 향해 달리는 기사는 행복하다. 과거로 향한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 속에서 그는 굴레가 벗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의 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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