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인 '대면'은 그에게 윤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 관계를 밝히는 것은 그래서 그의 윤리를 밝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랑쇼의 한 텍스트, 지금은 쉽게 <무한과의 대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Tenir parole"이라는 글에서 그는 레비나스의 이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은 끔직하다cela est terrible"(84)고, 그런데 공포 없는 끔찍함mais sans terreur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와 타인 사이에는 그 관계를 완화할 어떤 '중재자', 혹은 어떤 '매개' 혹은 어떤 '중간항'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심지어 "어떤 신도, 어떤 가치도, 어떤 자연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없기" 때문이다. 블랑쇼는 이런 관계를 "중성적 관계", "관계 없는 관계"라고 부른다. 내가 타인과 가지는 관계는 존재에 의해서도, 그것이 전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든, 혹은 신을 의미하는 것이든, 혹은 하이데거의 존재이든, 어떤 종류의 존재에 의해서도 그 관계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기" 때문이며, 또한 "타자는 나에 대해 현전 그 자체, 무한의 현전"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대면의 윤리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특징을 유지해야 한다. 인간만이 나에게 낯선 것, 타자(<전체성과 무한>에서 "절대적인 타자는 타인"이라는 진술을 상기하자)이며, 인간만이 이 타자의 현전이다.
이런 대면의 관계에서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나눔과 같은 것은 생겨날 수 없다. 그런 나눔은 이 윤리적인 관계 이후에만 올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정치는 나중에!"라는 구호는 이를 의미한다. 그것은 타인과 나 사이에는 이 둘을 매개할 수 있는 어떤 둘에게 공통된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전체성과 무한>의 담론의 관계를 상기하자). 그것이 시간이든, 공간이든, 그것이 공동체이든, 그것이 존재이든, 법이든, 나와 타자 사이에는 함께 나눌 어떤 것도 없다. 나눔의 관계가 들어오는 것, 즉 '정의'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제삼자가 그 둘 사이에 들어오면서만 가능하다. 사회적 정의 이전에 대면의 관계가 모든 종류의 변증법, 모든 종류의 합리적인 논리를 회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한 거리,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벽, 거리는 사실, 나를 타인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나와 타인 사이에는 일정한 척도도, 일정한 한계도 벽도 없는 한에서, 이 벽이 무너진 한에서, 인간은 그 자체 '접근불가능한' 듯이 드러난다. 이 "접근 불가능성은 즉각적"이다. 이때 나는 어떻게 그의 현전을 파악할 수 있는가? 사르트르처럼, 혹은 오르페우스처럼 '시선'에 의해서인가?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유리디스는 대면의 순간에 오르페우스가 다다를 수 없이 먼 곳에 존재하는 전적인 낯섬으로서 타인이다. 오르페우스가 '말하기'를 그치고, 그녀를 '보기' 위해 돌아섰을 때, 그의 시선은 죽음을 가져오는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블랑쇼와 더불어 "인간은 인간 앞에서 두 가지 선택만이, 말을 하거나 죽이거나, 두 선택만을 가진다"(86)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말과 죽음(살인)이라는 이 극단적인 선택에서 '나'는 타인의 현전 앞에 존재한다. 그런데 나와 타인과의 무한의 이 거리는 인간 안에서 절대적인 가능성pouvoir의 실행, 즉 '살인'을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타인의 초월성에 직면해서 살인의 초월성에 의존해서 타인의 초월성과 직면하고자 하는 '나'이다"(87).
이 두 초월성은 같은 질서를 가지는가? 카인이 아벨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너의 무한하고 절대적으로 외적인 영역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네게 내가 그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가능성의 인간homme de pouvoir으로서 나는 이 절대의 주인이며, 나는 죽음을 나의 가능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인에게 아벨의 이 무한한 현전은 전적으로 아벨에게 속하는 것으로 그에게 사물처럼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현전은 아벨에게 행운이고 양떼가 늘어나는 축복이기도 하다. 이 타인 안에 타자의 현전이 '나'에 의해 환대되지 않을 때, 이로부터 무한이 내게 도래하지 않자마자, 이 현전이 세계 안에서 설립된 타인의 속성으로서 타인 안에 갇히지마자, 이 현전이 '말'에서 일어나기를 그치자마자, 땅은 더 이상 타인과 나를 둘다 동시에 살 수 있을 정도로 넓지 않게 된다. 이때 둘 중의 하나는 타자를ㅡ절대적으로ㅡ이 땅으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이 현전이 카인에 의해, 죽음의 위협에 의해 아무런 방어 없는 현전의 벌거벗음이 되는 순간에, 다만 이 순간에, 이 현전은 가능성으로서 죽음이 파괴하는 것, 그런데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죽음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 그런데 잡을 수 없는 것", "죽음이 부재로 만들 수 있는 것, 그런데 만질 수 업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능성이 파악할 수 없는 이 현전은 죽음에 의해 다만 이 현전은 모든 파악을 회피한다만 것만을 드러낸다: "손상될 수 없는, 그런데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현전". 그런데 이런 결론은 블랑쇼가 보기에 너무 쉬운 결론이다. 사실 죽음의 폭력은 그 현전을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은 적어도 그 현전을 '무의미한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 현전이 모든 의미에 앞서는 한에서, 이 현전이 의미를 줄 수 있는 한에서ㅡ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체 이미 구성된, 의미를 가진 실재의 진리가 아닌 의미를 주는 한에서, 그런 의미에서 "의미화되지 않은insignifiée"(88) 진리, 레비나스의 후기 용어로 '말하기dire'인 한에서 ㅡ말이다.
그와 같은 말이 인간에 대면한 인간이 말과 죽음의 두 선택만을 가진 관계일 때, 그 관계를 "측정"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이런 말은 죽음만큼 심각할 것이다. 다만 이 말이 죽음의 '우회détour' 혹은 '이면'인 한에서 말이다. 이런 한에서 말과 살인의 선택은 그 말이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아주 단순히 배제하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이런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 두 가지만을 지적하자. 말이 심각한 것은, 그것이 벌거벗은 현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을 한다는 것은 현전을 어떤 가능성도 없는 허약함으로 환원하는 근본적인 폭력에 노출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말을 하거나 살인을 하거나의 이 선택의 상황에서 말의 역할은 말을 하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 이 '거나'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항상 말과 근본적인 폭력 사이의 이 간격으로부터 말하는 것이다"(88).
이 간격은 레비나스에서 '대면face-à-face'으로 말해진다. 그런데 이 '대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말을 이 그 말이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표상하는 것으로부터 이해할 때 우리를 이중적으로 속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레비나스의 대면은 "두 얼굴(figures)의 직면이 아니라, 말에 의해 인간의 이방성 안에서 인간에 접근하는 것"(89)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ㅡ즉 표상이 아닌ㅡ현전으로서 대면을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관계 안에는 어떤 '상호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 상호성의 부재는 두 측면에서, 나의 방식과 타인의 방식에서 일어난다(다만 여기서 나는 나의 방식만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이 결국 레비나스에서 나의, 주체의 '주체성'을 형성한다). 또 상호성이 없다는 것은 '대면'이라는 말이 상식적으로 지시하듯이 '나'라는 한 점과 타인이라는 한 '점'이 얼굴을 맞대고,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처럼, 같은 거리에서 '대칭적'으로 그려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불평등은 환원불가능하다."(89)
나와 타인의 불평등,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비대칭성은 타인이 나로 향할 때, 그는 나에게 무한히 외적인 것으로, 마치 무한히 나로부터 멀어지는 듯이, 나로부터 돌어서는 듯이 보인다. 타인은 바로 이 운동, 나로 향하면서se tourné vers moi 영원히 되돌아서는détourné, 우회하는 자이다. 여기에, 여전히 분리가, 나로 향하는 타자의 현전의 분리가 지배적이다.
이런 말은 완성을 위해 긍정되거나 부정되기 위해 나와의 논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 말은 반박 밖에, 반박될 수 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을 비난할 수도, 배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그 말을 아주 단순히 제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다만 (루소가 말하듯) 나의 귀를 막는 것, 듣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권리이다."(91)
그 말이 반박을 회피한다는 것은 그 말은 또한 의미를 낳는 '확실성'을 회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규정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쪽에서 보면 그 말은 내가 그 말에 부여한 어떤 의미도 회피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여기에 내가 그 말을 반박할 수 있음과 없음이, 그 말의 높음과 낮음이, 지평의 저편이 존재한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말이 모든 지평 저편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말은 '세계 밖'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소통'의 놀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모든 말의 "놀이 밖의 말로서" 소통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소통인가?
이 말 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경험을 말해야 한다. 동등화의 작업 안에서 모든 동등하지 않은 것들은 결국 이 안으로 포함된다. 또 다른 경험은 이 동등의 진리가 처음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운동, 화해할 수 없는 이 두 운동을 함께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전체이고자 하고, 반면 다른 것은 이 전체 밖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든 대립된 것을 환원하기 위해서, 동등으로서 진리가 긍정되기 위해서, 힘, 대결, 대립, 부정이 되는 말이 있고, 다른 한편 타자의 무한의 거리, 타인의 현전 안에서 타인의 무한의 요구는 부정하고 긍정하는 모든 힘을 회피하기 때문에, 모든 긍정 밖에, 모든 대립과 부정 밖에 머무는 말이 있다.
"이미 말해진 말과 다른 말, 이로부터 항상 새로운 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 정확히 내가 대답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이해도 없는 이 말이다. 이해를 초과하는 이 말에 대답하는 것, 진정으로 들었는지(이해했는지) 앎이 없이 그 말에 대답하는 것, 그것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말하게 하면서 그것에 대답하는 것,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일'일 것이다."(92)
"가능한 것들을 우리는 명명한다". 그런데 '이름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대답한다". 이 대답, 이 말은 대답하는 것에서 시작하며, 이 시작 안에서 '말'은 미지인, 이방인으로부터 온 말, 질문을 다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책임의 원리 안에, "말을 해야한다"는 요청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능성 없는 말parole sans pouvoir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말을 유지하는 것tenir parole, 이 말을 지키는 것, 약속을 이행하는 것, 이 불가능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 어떤 확실성도, 어떤 보증도, 어떤 이해도 없이 대답하는 것, 행위하는 것, 레비나스는 후에 플라톤의 표현을 빌려 "beau risque/ kalos kindunos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접근할 수 없는, 이름이 없는 것, 불확실 한 것, 불가능한 것에 '대답하는 것', 이 말을 유지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후기에 '소통'을 위한 '접근proximité'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기서 소통은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 즉 '대체'의 의미로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알듯이 대체는 대답에 대한 '과장'으로부터, 그의 과장의 논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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