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레비나스 전집 3 권: 에로스, 문학 그리고 철학

aurorepark 2013. 12. 21. 06:51






레비나스 전집 3권이 나왔다. <에로스, 문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그의 유고들, 전쟁 이전에, 그가 젊었을 때 썼던 에로스에 대한 두 소설, 그리고 러시아어로 쓴 시들,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에서 다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에로스에 대한 노트들 등이 실려있다. 이 책의 서문은 "L'intrigue littérature de Levinas"(이 제목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자)라는 제목으로 장-릭 낭시가 썼다. (전집을 내면서 편집진들은 'Lévinas'라고 악상을 가지고 쓰던 그의 이름에서 악상을 제거했다. 어디에서도 그 설명을 찾을 수는 없다. 어쨌든 전집에서부터 우리는 이제 그의 이름을 악상 없이 'Levians'라고 써야할 것 같다. 아마도 본래 그의 이름에 악상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에 들어와서 그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악상을 첨가했을 것이다. 이제 그 첨가를 떼고 본래의 그의 이름으로 돌아간 듯하다.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적 풍경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이 문학을 기웃거리는 것, 혹은 버섯이 피듯이 철학이 문학에 서식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루소가 그랬고, 사르트르가 그랬고, 장 발이 그랬고, 바타이유도 소설을 썼으며, 미셀 앙리도 여러 권의 소설을 썼다. 철학적 글쓰기가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소설적 혹은 시적 표현들이 철학을 보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미 레비나스의 전기를 말하면서, 이 전집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그의 '전-철학적인' 문학의 시기를 말하곤 한다. 또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철학적 글쓰기라기보다는 긴 산문시라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또 그의 글들에서 지속적으로 말해지는 한 사유, 한 삶의, 한 실존의 극적 성격(dramatique)을 상기한다면, 전접 3권에서 발견하는 소설과 시들은 우리에게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제 장-릭 낭시의 글을 잠시 읽어보자. 그의 글의 제목은 불어로 "l'intrigue littéraire de Levians"이다. 'intrigue'는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또 <존재와 다르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그의 전 저작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용어이다. 사실 이 단어를 레비나스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다만 그의 글에서, 그의 전 철학적 경향을 검토하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장-릭 낭식가 말하듯, 레비나스에서 이 말은 그의 '얼굴' 혹은 '인질'처럼 아주 다양한 의미로polymorphe 사용된다. "소설을 가지고서 레비나스가 하고자 하는 것은 현상성, 즉 지향의 상관자로서의 현상성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빠져나온 벌거벗음을 출현하게 하는 것"이라고 낭시는 말한다.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의 서문에서부터 명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현상보다 경험, 파악보다는 감각, 접촉"이 문제가 된다. "경험과 감각이 있는 거기에, intrigue가 있다. 다시 말해 얽힘intrication, 혹은 함축implication, 그리고 관계relation가 있다. 다시 말해 '만남', 뜻하지 않은 도래, 알림, 그리고 대답, 즉 책임이 있다: l'intrigue, 레비나스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 이 용어는 소설을 산출하는 범주로 근접성, 노에시스-노에마의 구조로 생각할 수 없는 접촉의 '관계들의 매듭'을 지시한다. 이 경우 '문학적 관계의 매듭intrigue littéraire'은 이론적인 전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일 것이다."(15).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이 용어는 사실 한 단어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최소한 나의 경우에) 거의 불가능하다(나는 이 용어를 때로는 '관계'로, '얽힘'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로, '상황'으로, 혹은 '간계'로 옮겼다. 매번 그의 글의 문맥 안에서 이 용어는 한 의미로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글의 '드라마틱한 구조'를 생각한다면, 낭시가 말하듯이 소설을 산출하는 카테고리, 더 나아가 연극, 특히 비극을 산출하는 한 범주와 관계한다. 이 말을 레비나스가 어디서 가져왔을까? 그가 어디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비극을 형성하는 6섯개의 카테고리 중의 첫 번째에 놓은 "muthos"에서 왔을 것이다.(리쾨르가 그의 책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에서 레비나스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할지라고 intrigue를 다룬다. 또 랑시에르는 역사와 시학을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mutrhos/intrigue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그 사용의 매락이 다르다고 할지라고 모두 Fiction/fable과 관계한다.) 이 말은 불어로 'intrigue', 혹은 'fable', 혹은 이야기로서 'histoire'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 말은 17세기 연극이나 소설을 형성하는 구조로 'intrigue'라는 말로 정착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muthos"는 "agencement des actions"(1450a 3-5)다시 말해 "행위들 혹은 사건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비극을 형성하는 한 카테고리이다. 혹은 연극에서 말하는 'argument'이기도하다. argument은 연극이나 오페라에서 각 단락에 대한 개요를 지시한다. (argument이라는 단어는 우리는 <존재와 다르게>의 목차에서도 발견한다. 이 말을 처음에 번역하면서 연극의 argument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레비나스는 그의 <존재와 다르게>라는 한 드라마를 쓰면서, 각 단락의 개요(argument 혹은 prologue)와 그 전재ex-position, 그리고 에필로그autrement dit를 썼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1967년 <언어와 근접성>은 그의 용어 intrigue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진술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사물들의 접근은 시"라고, 또 "세계의 시는 근접성과 분리될 수 없다"(EDE, 228)고 말한다. 여기서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낭시가 말하듯 파울 첼란 안에서 레비나스가 발견한 '시', 즉 만남, 더 정확히 '에로스'일지도 모른다. '시'는 레비나스에서 다른 말로, '신비'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에게 성적관계가 신비로 말해지는 한에서 레비나스가 정신분석을 포르노그라피라고 말하는 것은 이 신비, 이 시에 반해서 일 것이다.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intrigue'는 근접성(지향적 관계를 벗어난 타자와의 관계, 나와 나의 대담자와의 관계에 대한 레비나스의 용어, 결국 후설의 지향적 관계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으로부터, 만남의 '시'로부터 이해되는 윤리적 관계에 대한 한 이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향적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관계를 레비나스는 근접성의 intrigue라고 바꿔쓰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다른 이야기의 배치의 가능성을 열 수 있게 된다. 레비나스는 같은 글에서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은 두 항 사이의 관계로, 그 각각의 항이 오성의 종합에 의해서도 혹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의해서도 결합되지 않고, 다만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무게를 가지고(짓누르고), 혹은 중요하고, 혹은 의미가 있는 두 항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두 항은  지식이 고갈할 수도, 풀 수도 없는 'intrigue(관계의 매듭, 윤리적 관계)'에 의해 연결"(EDE, 225 주 1)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다른 곳에서 무한, 혹은 '말하기(le Dire)'의 모험은 "존재와 존재자의 모호성 이전에 엮이는 관계로, 이 관계intrigue, 이 이야기는 절대적인 통시성으로 엮인 것으로 ...에 대한 의식에 환원되지 않는 근접성으로부터 출발해서, 책임으로 그리고 대체로서 알려지는 것" (Le Dit et le Dire)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의 전집 2권에서 레비나스가 블랑쇼의 문학적 상황에 대해 말하면서, "블랑쇼의 상황: 모험의 소설도, 심리적 소설도, 유비적 소설도 아닌ㅡ특별한 논리적 함축의 상황"이라고 말할 때, 이 함축적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명시적인 논리적 관계에 반해 레비나스가 말하는 intrigue의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더 나아가 양심에 꺼릴 것이 없는 une bonne conscience에 반해 레비나스가 말하는 항상 자책하는 의식인 une mauvaise conscience와 intrigue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이 말을 레비나스의 "말하는 한 방식une façon de parler"(DQVI, 266-270), 다시 말해 "반박되고 모든 것을 다르게 말하고자 하는se dédire et à se voulir tout autrrement dire"(270) 존재론적 독단론과 명증성에 환원되지 않는 철학의 수수께끼와 함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