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글은 47쪽 하단에서 시작한다. 세 단락만 읽는다. 51쪽 상단까지 이어진다. 앞서 말한 '유사정념'이 늙어 사라지는 이유는, 삶의 비가시성을 세계의 현상성의 한 변형, 의식의 한 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앙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삶의 현상성, 비가시성이, 하이데거, 혹은 메를로-퐁티의 비가시성의 현상성과 혼동될 때, 우리는 전적으로 길을 잃는다. 이 구분은 그의 현상학의 근본성에서 밝혀진다.
1. 왜냐하면 삶은 자기 자신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삶은 밖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의 어떤 얼글도 이론적이거나 감각적인 시선에 잡히도록 자신을 제시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에 대해 자신을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누구도 삶을 본적이 없으며, 그것을 절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삶은 절대적인 내재성의 영역이다. 우리가 이 내재성을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삶은 모든 외재성의 배재를 의미하며, 모든 사물들이 가시적이 되도록 하는 그리고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모든 가시성의 초월론적인 지평의 부재를 의미한다. 삶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비가시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단지 가시적인 것의 제한된 양태일 뿐인 비가시적인 것과, 의식의 체계에 속하는 여러 정도들의 하나로서 비가시적인 것과 절대적으로 구분할 때에만 삶을 사유하기 위한 적합한 개념이 된다. 예를 들어, 후설의 인상은, 지향적 전향 이후, 일련의 시간적 자리들을 거쳐서, 점점더 희미해지는 빛과 함께 점점더 과거로 침몰해서 결국 "무의식" 안에 경계로 사라진다. 또 이 시간적 흐름은, 그것이 더 이상 지각되지 않고, 상상이나 기억 안에서 재산출되는 한에서, 시간적 차이들에 일치하는 현상학적인 차이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로써 흐름 전체는 그 자체로 몸소 더 이상 현재하지 않으며, 다만 유사quasi의 양태 위에서, 재생에 고유한 보충적이고 특수한 현상학적인 결핍에 의해 촉발된다. 그런데 이 모든 변형들과 함께 우리는 삶이 아니라, 의식과, 그것의 정도들과 관계한다. 삶의 비가시성을 세계의 현상성의 기우는 양태들과 근본적으로 분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객관성 혹은 의식의 양태는 항상 다른 것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혼동된, 어두운 혹은 여백의 의식은 언제나 밝은, 구분된, 결국 명증성의 충만한 빛으로 변형될 수 있다. 반대로 삶에 속하고, 자신의 존재 안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구성된 것은 원리상 가시적인 것의 규정이나 그것의 한 양태로 변형될 수 없다. 명시화의 현상학적 과정, 모든 의식적 파악, 그것이 지적과정이든 정신분석학적 과정이든, 이 모든 사유는 경험의 과정에 기입된, 그것과 동일한 이 가능성에 의존한다. 삶은 의식도, 저변의식도, 무의식도 아니며, 삶은 그러한 변화le devenir를 받아들일 수 없다.
2. 이런 이유로 삶의 비가시성은 모든 진리의 토대라고 말해지는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비-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탈은폐가 은폐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산출되고 그것을 가정한다면, 탈은페와 은폐는 세계의 것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이해된다. 비가시적 것은 더더욱 가시적인 것의 부정이나 그것의 결과, 즉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고, 또 실증성을 규정한다고 주장하는 한 부정의 항의 실체화가 아니다.
3. 삶은 느껴지고,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이다. 이것은 삶이 자기 자신을 느끼는 속성들을 가지는 어떤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즉 순수한 자기 체험, 자기 자신을 느낀다는 사실. 삶의 본질은 자기-촉발 안에 자리한다. 자기-촉발의 개념은 삶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은 엄격하게 사유되어야 한다. 이 자기-촉발이 칸트와 그리고 하이데거에서 내감le sens interne을 지시할 때 이 개념은 엄격성을 상실한다. 내감과 함께 그것의 최초의 가능성 안에서 질문되는 것은 주체성의 가장 내밀한 존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칸트와 하이데거에서 이 질문의 정교화가 결정적인 오해에 이르는지는 내감 안에서 완성되는 촉발이 탈자적인 삼차원적 시간의 지평에 의한 시간 그 자체의 촉발이 될 때 명백히 알려진다. 이런 의미에서 촉발은 시간 그 자체의 촉발이고,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는 이것을 칸트의 용어를 빌려 "자기-촉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간이 던지고 받는 이 탈자적 지평에 의한 시간의 촉발은 타자성의 본래적 환경에 의한 촉발이다. 그래서 이 촉발의 유일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세계의 이미지 안에서 놓인 것이고, 순수한 세계성 안의 세계이며, 초월론적인 외재성이다. 이러한 촉발은 감성과, 그것의 특수한 구조 안에서,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항상 느끼는 힘과 다른 어떤 것에 의한 촉발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삶은, 그것의 최초의 촉발에서,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다. 삶은 그것이 받은 내용을 스스로 구성하며, 그 내용은 삶을 촉발한다. 삶은 자기 정립, 자기 객관화가 아니다, 삶은 자기 자신을 촉발하기 위해, 한 대상의 현시와 같은 자기 현시의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 자기가 자기를 통각하는 것처럼, 자기 앞에 자신을 정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이 아니고 삶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자기 촉발한다. 삶은, 탈자의 대상화 안에서 자기를 자기 자신에게 제시함이 없이, 자기에 대해pour soi* 존재한다[대자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chacun pour soi"라는 표현이 말하듯, 각자 자기에 대해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그런 의미에서]. 삶은 감각, 내감, 또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감각의 매개도 없이 느껴진다. 그런데 근본적인 의미에서, 모든 지향성과 초월성과의 단절에서 절대적인 내재성의 의미에서, 본래적인 자기-촉발은 사유의 논리적 요청postulat이 아니다. 우리는 존재를 논리적으로 혹은 변증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성에 의해 조건들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이어야 한다il faut bien que"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주체성은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해야 한다고, 삶은,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촉발되기 전에, 단순한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하나이며 자기 자신인 것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상학은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직면할 수단들을 가진다. 그리고 현상학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자신을 견디는 것은, 어떤 감각의 매개도 없이, 자신의 정감적 본질 안에서이다. 정감성은 계시의 본래적인 본질이며, 존재의 현상학적인 자기-촉발이며, 최초의 존재의 용출이다. 바로 여기에 왜 비가시적인 것이 현상성의 반주제적이고, 형식적이고, 공허한 개념이 아니가에 대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감정의 실질성 안에서 그것의 실행이다. 또한 여기에 왜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의 규정들 중의 하나로 변화될 수 없는지, 무의식에서 명증성의 충만한 빛으로 가는 일련의 의식의 정도들을 편력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이유가 있다. 삶이 자기 감정의 실질성 안에서 자신의 본래적인 지배를 전개하는 거기에는 외재성이 없으며, 그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 반해서 우리는 존재는 사유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존재는, 사유가 삶 안에 자리하는 한에서, 이 사유의 변형도, 이 사유에 속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실재를 파악하는, 해석하는 혹은 이해하는 방식도 아니다 . [맑스가 말하듯]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유가 불완전하거나 잠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가 움직이는 환경, 의식이 빛 아래서 파악하는 연장된 존재는 삶의 본질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배재하기 때문이다. ...실재의 변화는 이 실재가 자신의 본질을 전개하는 곳에서만, 삶 안에서만, 그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의 고유한 운동으로서, 이론적 담론, 모든 이론, 모든 이데올로기의 무능에 대립한 실재적 변화로서, 삶 안에서 삶으로부터 오는 이런 변화, 우리는 그것을 실천이라고 부른다.
-이어지는 글은 이 삶의 실천, 즉 삶의 운동에 대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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