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현상학』 서문에서 앙리 자신이 지적하듯이, 그의 철학 안에 전적으로 부재하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타자'이다. 더 정확히 타자(타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이다. 사실, 『현시의 본질』(1963)이 출간되자마자 제기된 반복된 비판은, 하나는 "순수한 정감성의 철학을 구성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념적이고 비우주적인 자기성이 (그와) 같은 유형의 타자와 관계 맺을 가능성, 즉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상호 주체성 속에 자신을 기입할 가능성"(『물질 현상학』, 자음과 모음, 15)이었다. 76년 그의 대작 『맑스』에서도 타자의 문제는 명시적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90년 이전에 앙리가 타자의 경험의 문제에 유일한 글들은 『물질 현상학』안의 마지막 장, 「공-정념Pathos-avec」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글이다. 하나는 후설의 『다섯 번째 데카르트적 성찰』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는 이것에 이어지는 "공동체의 현상학"에 관한 것이다. 『물질 현상학』서문을 마치면서 앙리는 우리에게 현재 그가 준비하고 있는 "상호 주체성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에 대한 도래할 책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모든 약속이 그러하듯이, 그 책은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고, 그것은 아주 늦게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그의 『육화-살의 철학』(2000)이다.
<현시의 본질>에서 <육화-살의 철학> 사이에는 근본적인 어떤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앙리가 한 대담에서 설명하듯이 하나의 '질문'이, "이전l'Avant"에 대한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 둘이 결국 연속적이라는 것은 앞선 것의 획득에 근거해서 두 번째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물질 현상학의 전제들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시의 본질>이 시작하는 "자아의 존재"이다. 단독적인 이 자아 위에 그가 말하는 육화도, 그가 말하는 타자의 경험도, 그가 말하는 공-정념도 가능해진다. 후기의 "자아의 존재l'être de l'ego"의 존재는 이제 앙리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지만 "l'être-avec de l'ego", 즉 "자아의 공-존재" 혹은 "자아의 함께-존재"라고 쓰여질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그의 표현은 "Eux en moi"라는, "내 안의 그들"이라는 표현이다. 앙리에게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타자가 없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런 타자가 없다. 그에게는 자아만이 있다. 그 자아 안에, 자아의 정념 안에 모든 것이, 그들이, 당신이, 모두가 다 함께한다. 그래서 종종 그의 철학 앞에 서는 것이 나는 두렵다. 타자 없는, 타자 없이 가능한 타자의 경험, 이 '역설'-그의 현상학은 바로 이 역설의 현상학이다-, 이것이 그의 '타자 철학', 이 표현이 그에게는 적절하지도, 그가 원하는 표현도 아니지만, 더 정확히 틀린 표현이지만, 말하자면, 다만 하나의 말하는 방식으로, 그런 철학이 그에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육화>에서 삶의 철학이 제시하는 '타자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지금까지 전 철학사가 "해결하지 못한", 결국 "실패한" 그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하나의 "도전challenge"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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